알 무스탄시르 2세

 


아랍어 أحمد المستنصر‎

아흐마드 알 무스탄시르

재위 1261년 6월 13일 ~ 1261년 11월 28일
생몰 ? ~ 1261년 11월 28일?

1. 개요


압바스 왕조의 38대 칼리파이자 카이로에서 즉위한 첫 순니 칼리파. 그는 훌라구에게 함락된 바그다드를 수복하기 위해 맘루크 왕조의 지원을 받아 이라크 원정에 나섰다. 하지만 바드다드를 80km 남겨둔 히트에서 벌어진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패해 사망하였다. 이후 12촌 친척인 알 하킴 1세가 카이로에서 옹립되어 그 후손들이 명목상으로나마 압바스 칼리파 조를 이어나가게 된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지휘한 마지막 압바스 칼리파였다.

2. 즉위


본명은 아불 카심 아흐마드로, 35대 칼리파 앗 자히르의 차남이다. 조카 알 무스타심에 의해 바그다드에서 투옥되었던 그는 1258년 정복자 훌라구 칸에 의해 석방되어 시리아 사막의 카파자 베두인 취락에서 은신하였다. 그러던 1260년 맘루크 왕조가 몽골군을 시리아에서 몰아내며 정세는 급변하였다. 이듬해 아흐마드는 50명의 베두인들과 시리아로 향하였다. 맘루크 총독의 환대를 받고 그의 주선으로 카이로로 향한 아흐마드는 1261년 6월 9일 그곳에 당도하였다. 환영 행사 후 술탄 바이바르스는 그의 정통성 확인을 위한 공청회를 열었다. 카디 (법관)과 울라마 (학자들), 셰이크 알 이슬람인 이즈 앗 딘 압둘 살람을 비롯한 종교계와 각지의 아미르들로 위원회가 구성되어 심사에 나섰다. 카디들이 혈통을 따지고 카디 알 쿠다트 (대법관)이 그 순수함을 따지가 술탄을 필두로 참석자 모두가 바이아 (충성 서약)를 행하였다.
이로써 그해 6월 13일, 아흐마드는 형과 같은 '알 무스탄시르' 라캅을 선정하며 칼리파로 즉위하였다. 멸망 직전의 무와히드 왕조와 신생 하프스 왕조의 영향력이 미치는 서부 이슬람권을 제외한 전 수니 무슬림들이 맘루크 술탄의 그를 칼리파로 받들었다. 그 후 알 무스탄시르는 타클리드 (칙령)을 내려 바이바르스를 술탄으로 책봉하고 지하드를 촉구하였다. 한편 비슷한 시기 그의 12촌인 아부 압바스 아흐마드 역시 안바르에서 몽골군 분견대를 격파한 후 다마스쿠스 총독 타이바르스 알 와지리의 주선으로 카이로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칼리파가 즉위했다는 소식에 그는 체포될까 두려워 도중에 이탈, 알레포로 향하여 그곳의 군벌 아쿠쉬 알 바를리에 의해 칼리파 알 하킴으로 추대되었다. 알 바를리는 그에게 튀르크 기병대를 주어 재차 이라크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알 하킴은 하란에 당도하여 주민들과 바누 타이미야로부터 칼리파로 인정받고 천천히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남하하였다.

2.1. 히트 전투와 죽음


한편 알 무스탄시르 역시 술탄과 함께 바그다드 수복 원정을 준비하였고, 그해 9월 본격적인 출정을 위해 다마스쿠스로 향하였다.[1] 본래 바이바르스는 1만 대군을 준비했는데, 모술의 한 아미르가 원정이 성공해 칼리파가 바그다드를 되찾는다면 술탄과 재차 대립할 것이라 조언하자 변심하여 원정 불참을 알리고 겨우 3백의 기병만을 칼리파에 내주었다. 다만 3천 기병대를 따로 유프라테스 강으로 보내 유사시의 원군으로 삼게 하였다.[2] 1261년 10월 11일 다마스쿠스를 떠난 알 무스탄시르는 라흐바에서 4백 베두인 병력, 이라크의 관문 아나에서 알 하킴의 6백 튀르크 기병대와 합류하였다.[3] 알 하킴은 병사들의 뜻대로 칼리파 주장을 버리고 알 무스탄시르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후 그들은 동진하였고 아나와 하디싸 등의 도시들이 복속을 표하였다. 하지만 11월 12일 바이바르스는 다마스쿠스를 떠나 카이로로 돌아가버렸다. 그리고 몽골의 이라크 사령관 카라 부가는 일전을 준비하였다.
11월 말엽, 카라부가는 5천의 몽골군을 이끌고 출정해 바그다드의 서쪽 관문인 안바르에 향하였다. 무슬림 주민들이 칼리파를 도울 것이라 여긴 그는 학살을 자행하였고, 이후 바그다드의 샤흐나 (총독) 알리 바하두르 알 콰레즈미의 병력과 합류하였다. 이번에도 무슬림 병사들은 전투에서 배재되었다. 비슷한 시기인 11월 25일, 알 무스탄시르는 하디싸와 안바르의 중간 지점인 히트를 접수하였다. 카라부가 역시 진군하여 히트 부근에 당도하였고, 어둠을 틈타 유프라테스 강을 도하해 11월 28일 히트 마을 앞에 나타났다. 알 무스탄시르는 군대를 각각 1백으로 구성된 12개의 부대로 편성하고 베두인을 좌익, 튀르크 기병을 우익에 두었다. 이후 그는 몽골군에 선제 공격을 가했는데, 알리 바하두르의 선발대가 못이기는척 후퇴하였다. 하지만 매복해 있던 몽골군이 반격해오자 전세가 역전되었고 칼리파군 양익의 베두인-튀르크 기병대는 도주하였다.
알 무스탄시르는 남은 3백의 맘루크 군대와 함께 끝까지 싸웠으나 전멸하였다. 칼리파는 도주하였는데 이후로 다시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아예 종적을 감춘 것이라는 설도 있다. 공교롭게도 전투가 벌어진 당일 바이바르스는 카이로에 귀환하였다. 라카 부근에 있던 3천 맘루크 병력도 안티오크 공국을 약탈하고 회군하였다. 전투 후반부에 50여 튀르크 기병대와 도주한 알 하킴 아흐마드는 사막을 배회하다 이듬해 3월에야 카이로에 당도했으나 시타델에 사실상 연금되었다. 이로써 칼리파위는 약 1년간 공석에 있었고, 바이바르스는 자신이 확실히 제어할 수 있다고 판단한 1262년 11월에야 아흐마드를 다시 칼리파 알 하킴 1세로 추대하였다. 다만 그와 후계자들은 권력에서 철저히 배재되었다. 알 무스탄시르 2세는 자신의 의지대로 운명을 선택할 수 있던 마지막 칼리파였다.

[1] 이때 아인잘루트 전적지에 마슈하드 앗 나스르 기념 예배당을 건설하였고 몽골에 협력한 십자군 영토를 습격하였다. 다만 이내 원정을 앞두고 그들과 기존 아이유브 왕가가 맺었던 휴전을 갱신한다[2] 후대의 역사가 이븐 마크리지는 칼리파가 카이로에 있으면 미래에 후계자들을 위협할 수 있다고 여긴 바이바르스가 일부러 칼리파를 사지로 보낸 것이라 주장함[3] 다만 대동했던 모술의 아미르 앗 살리흐 이스마일 등의 아미르들이 이탈하여 영지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