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하킴 1세

 




1. 개요


아랍어 أحمد المستنصر‎

아흐마드 알 무스탄시르

재위 1262년 11월 21일 ~ 1302년 1월 19일
생몰 1247년 ~ 1302년 1월 19일
압바스 왕조의 39대 칼리파. 본명은 아부 압바스 아흐마드로, 카이로에서 즉위한 2번째 칼리파이다. 1258년 바그다드가 함락될 떄에 탈출하여 베두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칼리파를 칭하였다. 이후 적통에 가까운 알 무스탄시르 2세가 카이로에서 추대된 후 바그다드 수복에 나서자 칼리파 주장을 버리고 그에게 가담하였다. 하지만 이어진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그가 사망하자 카이로로 향하여 정식으로 칼리파로 즉위하였다. 다만 그는 맘루크 술탄들의 꼭두각시였으며, 이후로도 그 후계자들은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압바스 왕가는 이어졌지만 그 정치 생명은 완전히 종식된 것이었다.

2. 생애


1138년 알 라시드가 암살된 이후 칼리파위는 그 숙부인 알 묵타피의 후손들이 이었다. 그중 바그다드에서 7대가 부자 상속만으로 이어졌고, 1258년 바그다드가 몽골에게 함락된 후 알 무스탄시르 2세가 카이로에서 추대되었다. 아흐마드는 알 라시드의 동생 알리의 현손이자 알 무스타르시드의 5대손이었다. 사실 그는 알 무스탄시르 2세의 등극 전에 이미 두각을 드러내었다. 우선 그는바그다드의 학살을 피해 탈출한 후 베두인 족장 이사 이븐 무한나에게 의탁하였다. 당시 시리아를 지배하던 아이유브 왕공 앗 나시르 유수프는 그를 다마스쿠스로 초대하였으나 1260년 몽골군이 시리아 원정에 나서며 무산되었다. 아인잘루트 전투의 승리 후 이집트로 회군하던 맘루크 술탄 쿠투즈는 아흐마드에게 칼리파위를 약속하고 대리인을 파견해 바이아 (충성 서약)까지 하였다.이는 정통성이 희박했던 맘루크 술탄이 칼리파의 후견자라는 명분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회군 도중 쿠투즈가 암살되며 아흐마드의 칼리파 등극은 일단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알 하킴 비 아므르 알라의 라캅을 골라 칼리파를 칭하였다. 그리고 아인잘루트 전투 후로도 1차 홈스 전투 등 몽골의 관심이 시리아에 집중된 틈을 노려 베두인 기병대와 의용군을 이끌고 이라크 원정에 나섰다. 비록 바그다드 수복은 실패했지만 알 하킴은 이라크의 아나, 하디싸, 히트 등지를 습격한 데에 이어 안바르에서 몽골군 분견대 (카라굴)를 격파하는 용맹을 보였다. (1260년 12월) 유니니에 의하면 1천 5백의 몽골 기병이 전사하고 칼리파 군은 오직 6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다만 바그다드의 몽골 사령관 카라부가가 대군을 이끌고 나서자 시리아 사막으로 도주하였다고. 이 승리는 이듬해 술탄 바이바르스와 알 무스탄시르가 이라크 원정에 나서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1] 1261년, 알 하킴은 다마스쿠스 총독 타이바르스 알 와지리와 연락한 후 그에 의해 카이로로 보내졌다.
하지만 도착하기에 앞서 6월에 기존 직계에 더 가까운 친척 아흐마드가 카이로에서 술탄 바이바르스에 의해 알 무스탄시르 2세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졸지에 역적이 된 알 하킴은 맘루크 조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던 알레포로 향해 군벌 아쿠쉬 알 바를리 알 지지에 의해 칼리파로 선포되었다. 이후 재차 이라크 원정에 나서기로 한 알 하킴은 알 바를리로부터 6백의 튀르크 기병을 얻어 동쪽의 하란으로 향하였다. 현지 주민들과 주변의 바누 타이미야 베두인들로부터 칼리파로 인정받은 그는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남하하였다. 그러던 같은해 10월, 알 무스탄시르 역시 다마스쿠스에서 라흐바를 거쳐 이라크로 향하였다. 그리고 이라크의 아나에서 양측은 조우하였다. 칼리파권의 부활을 우려한 바이바르스가 고작 3백의 병력을 내주는 바람에 베두인 원군을 합쳐도 알 무스탄시르의 병력은 7백에 지나지 않아 알 카임의 6백 병력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병사들의 여론에 따라 알 히캄은 바그다드 탈환이라는 대의를 위해 칼리파 칭호를 버리고 연장자인 알 무스탄시르의 휘하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1천이 조금 넘는 병력으로 5천 몽골군에 맞선 이들은 대패하였고 알 무스탄시르가 살해되었다. 전세가 기울자 전자을 이탈한 알 하킴은 50여명의 패잔병과 배회하다가 1262년 3월 22일 카이로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이미 술탄으로 책봉되어 더이상 칼리파가 필요하지 않았던 바이바르스는 그를 시타델에 유폐하였다가 11월 16일에서야 혈통 검증을 거친 후 그를 추대하였다. 다음날 쿠트바에서 알 하킴은 바이바르스를 칭송하며 지하드를 촉구하였다. 확실치 않은 혈통으로 즉위한 알 하킴은 젊은 날의 야심을 접고, 맘루크 술탄들의 뜻대로 행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꼭두각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 외에는 시타델에서 사실상의 죄수로 지냈다.
1296년 12월 술탄 라긴이 시내의 저택과 더 많은 경비를 지급한 후에야 칼리파는 곤궁한 생활을 면할 수 있었다. 알 하킴은 40년간 칼리파위를 지켰고 바이바르스부터 앗 나시르 무함마드까지 8명의 맘루크 술탄들의 치세를 지켜보며 조용히 지냈다. 명분상으로나마 유의미한 일은 1269년 한세기 이상 칼리파를 칭해오던 무와히드 왕조가 멸망한 것과 바그다드 압바스 조를 멸한 훌라구의 증손자 가잔 칸이 1295년 무슬림으로서 칸에 오르며 일 칸국의 이슬람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던 1302년 1월, 죽음을 직감한 알 하킴은 아들 술레이만을 후계자로 지목하는 유언을 남기고 이틀 후 사망하였다. 술탄 앗 나시르는 카디들과 아미르들을 모아 새 칼리파 알 무스탁피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 역시 부친처럼 38년의 장기간 허수아비 칼리파위를 지켰다. 이후로도 그 후계자들은 200여년간 압바스 왕가를 유지하였다.

[1] 즉 이라크 주둔 몽골군이 생각보다 약하다고 판단하여 한번 해볼만 하다고 여기게 된 것. 근데 실제로 바이바르스가 정말 마음먹고 친정했으면 바그다드 회복이 가능했을 것이라 여겨지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