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루크 왕조

 


'''이집트 맘루크 술탄국'''
아랍어: سلطنة الممالي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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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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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왕조의 강역
1250년 ~ 1517년
왕조
바흐리 왕조부르지 왕조
수도
카이로 (1250년 ~ 1517년)
공용어
아랍어
튀르크어
체르케스어
민족구성
아랍인
튀르크
유대인
정부형태
군주제(술탄)
면적
1,564,220km2 (추정치)
인구
6,800,000명~7,300,000명 (추정치)
국교
이슬람(수니파)
통화
디나르
이전국가
아이유브 왕조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크 공국
트리폴리 백국
이후국가
오스만 제국
1. 개요
2. 성립
3. 십자군 축출
4. 경제적 번영
5. 왕가 교체
6. 멸망과 부흥운동
7. 역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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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유브 왕조에 이어 시리아와 이집트를 통치한 제국. 십자군과 몽골 등 외세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맞섰고 형식적이긴 하지만 압바스 칼리파까지 옹립하여 기존 이슬람 문화를 보전하였다. 특히 9세기 이후 알레포, 다마스쿠스 등 지방 왕조들과 십자군, 아사신 등 외세로 점철되었던 시리아를 완전히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경제적으로도 중계 무역을 통해 번영하였고 이에 경도된 서유럽 국가들이 원양 항해에 나서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비록 술탄의 평균 재위 기간이 6년에 그칠 정도로 권력 투쟁이 심했지만 일본의 바쿠후 (막부)처럼 지극히 내부 다툼이었기에 민중의 삶을 크게 악화시키지는 않았다. 십자군과 몽골의 침공 모두 잦아든 14세기 초반부터 도시 문화와 제조업, 상업이 융성하고 마드라사와 모스크 등 다양한 건축물이 지어졌다. 특히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장기 집권 하에 번영하던 맘루크 조는 이후의 권력 투쟁과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로 쇠퇴하였다.
15세기 후반 술탄 카이트베이[1]의 안정적인 통치 하에 힘을 회복, 킬리키아를 두고 벌어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중흥기를 맞았으나 16세기 들어 대항해시대를 맞은 포르투갈의 인도양 무역 잠식으로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1516년 신무기와 근대적 군대를 앞세운 오스만 술탄 셀림 1세에게 정복되었다. 다만 왕조는 멸망했어도 맘루크 군부 자체는 건재하였으며, 오스만 지배에 협력하면서도 종종 소요를 일으키다가 19세기 무함마드 알리 대에 와서야 소멸한다. 여담으로 원조 맘루크 왕조는 1250년보다 약 반세기 앞서 세워진 인도 델리술탄왕조일 것이다. 둘다 원주민들과 매우 다른 태생의 맘루크 출신 군부가 통치하였고, 이슬람 왕조였으며 창건자 역시 아이바크로 동명이인이다. 심지어 티무르의 침공을 받아 쇠퇴하고 약 270여년간 존속하다가 포병을 앞세운 제국에게 멸망한 것도 비슷하다.

2. 성립


맘루크는 후기 아이유브 왕조의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1240년 당시 군주였던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흔들리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맘루크의 권한을 강화시켜 사병으로 썼다. 이들은 바흐리 맘루크 혹은 바흐리야로 불렸는데,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그들의 거점으로 카이로 나일 강의 루아드 섬에 '칼라트 바흐르 앗 닐' (나일 강의 성채)을 지어 제공한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한편 1250년 루이 9세의 7차 십자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면서 맘루크의 정치적 권한은 매우 강력해졌다. 당시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병사하고 군권을 이양받은 그의 심복 파크르 앗 딘이 만수라 전투에서 십자군과 싸우다 전사하며 맘루크의 득세를 제어할 사람이 없어진 것도 큰 요인이었다. 그리고 맘루크들은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후계자인 알 무아잠 투란샤가 자지라 출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임명하며 자신들을 견제하자 1250년 5월 그를 무참히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우선 아이유브 왕가의 알 아슈라프 무사를 술탄으로 옹립하였으나 실제 권력은 맘루크 대장인 아이바크가 독차지하였고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애첩이던 샤쟈르 알 두르(Shajar al-Durr)와 결혼하여 이를 정당화 하였다. 몇년 후에 아이바크는 허수아비 술탄 무사마으저 폐위시키고 자신이 술탄이 되었다. 이로써 맘루크 왕조가 성립되었다. 한편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사후 이집트가 혼란을 겪는 틈에 시리아를 통일한 알레포의 아미르 앗 나시르 유수프는 이집트의 맘루크들과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1260년 몽골군에게 시리아가 정복되며 자연스레 맘루크의 경쟁자는 사라져버렸다. 그 사이에 아이바크는 부인 샤쟈르 알 두르와 대립하다 그녀에게 암살되었고 그의 아들 알리가 옹립되고 아이바크의 부관이던 쿠투즈가 섭정을 하였으나 이내 자신이 술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힘을 비축해둔 맘루크 군은 1260년 여름 훌라구 칸이 몽골 내전의 추이를 지켜보려 부관 키토부카 노얀 휘하 1만여 병력만 남기고 이란으로 돌아간 틈에 북상,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괴멸시키고 시리아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맘루크 군의 선봉장이자 쿠투즈와 불편한 주종 관계를 유지하던 바흐리 맘루크의 바이바르스는 이집트로 돌아오는 길에 그를 암살하고 자신이 술탄이 되었다.

3. 십자군 축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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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레 공방전
셀주크 제국, 장기 왕조, 아이유브 왕조 시대부터 이어지던 십자군 전쟁을 종결지은 것이 바로 맘루크 왕조이다.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 제국을 격퇴시킨 뒤 1260년대부터 대대적인 공세를 가하였다.[2] 1268년에 안티오크 공국, 1289년에 트리폴리 백국, 1291년에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켜 서방 그리스도교 세력을 194년만에 레반트 해안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4. 경제적 번영


맘루크 왕조는 유럽과 인도양을 잇는 중계 무역에서 거두는 수수료를 챙기며, 눈부신 번영을 누렸다. 14세기 무렵, 맘루크 왕조 치하의 이집트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여러 기록들을 보면, 당시 맘루크 왕조가 얼마나 풍요로운 환경을 누렸는지가 드러난다. 1341년, 맘루크 왕조의 14번째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 (재위 1310~1341년)는 11명의 딸들을 시집보내면서 한 명 당 80만 디나르의 금화지참금으로 주었다.
또한 1356년 맘루크 왕조의 23번째 술탄인 바드르 압딘 하산(Badr ad-Din Hasan 재위 1354~1361년)은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졌던 21번째 술탄의 이름을 딴 ‘하산 모스크’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3년 후에 완공된 이 하산 모스크는 유럽에서 수입해 온 제각기 다른 색깔을 가진 27개의 대리석들로 지어졌으며, 45미터의 미나렛(첨탑)이 세워졌으며, 건물 안에 약 7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기숙사가 들어가고 머무르는 사람들에게 모두 공짜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했다. 아울러 모스크 안의 기도실 벽에는 전부 황금과 은을 발라 실로 눈부시게 빛이 났다.
군주가 아닌 상인들도 세계 각지에서 몰려오는 무역에 손을 대며 엄청난 재산을 쌓았다. 한 예로 ‘나시르 알딘 발리시’란 상인은 인도와 예멘과 에티오피아에서 수입한 향신료를 베네치아와 피렌체와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에 팔아서 돈을 벌었다. 또한 그는 향신료를 파는 무역상인들이 만든 조합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나시르는 1373년 죽었는데, 아들에게 무려 100만 디나르의 금화를 유산으로 남겼다. 이처럼 나시르 같은 향신료 상인들이 쌓은 재산이 얼마나 많던지, 때로는 술탄들조차 그들에게 돈을 빌릴 정도였다.
아울러 맘루크 왕조 치하의 이집트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모두 이집트를 가리켜 놀라운 번영을 누린다며 찬양했다. 14세기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를 방문한 페르시아인 칼릴 알자히리는 “페르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 10개를 합쳐도 카이로보다 더 작다.”라고 탄식했으며, 1384년 카이로를 방문한 피렌체인 레오나르도 프레스코발디는 “피렌체 인구 전체를 합쳐도 카이로 시내 한 곳의 사람들보다 더 적다.”라고 감탄했다. 20년 동안 카이로에서 비단포도주를 팔았던 베네치아인 엠마누엘 필로티는 “카이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어떠한 도시들보다 부와 번영에서 뛰어나다.”라고 찬탄했다. 1348년 카이로의 인구는 50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인구 20만의 파리나 5만의 런던보다 2.5배에서 10배나 많은 숫자였다.[3]

5. 왕가 교체


1250년 왕조 수립부터 맘루크 왕조는 킵차크 중심의 투르크계인 바흐리 맘루크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들을 경계하기 위해 칼라운이 육성하기 시작한 체르케스계 부르지 맘루크 세력은 1377년 시리아에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고, 1382년 이들의 대장격인 알 말리크 바르쿠크가 술탄을 칭하면서 바흐리 왕조는 문을 닫았다. 바르쿠크 이후의 왕조를 부르지(Burji)왕조라고 칭한다. 디민 바흐리, 부르지 왕조를 싸잡아 구분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체르케스 맘루크 중에서도 바흐리 왕조의 술탄이 된 경우가 있고 부르지 왕조 중에서도 간혹 비체르케스계 술탄이 즉위하기도 하였다. [4]
부르지 왕조는 티무르 제국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오스만 제국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는 이들의 관계가 최고조에 달했으나, 그 후에 카라만 공국의 문제[5] 인해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한편 왕조 말기에는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최남단을 돌아 인도로 가는 길을 열면서 홍해의 제해권 통제가 어려워졌다. 평소 사이가 좋았던 베네치아공화국으로부터 간접적인 지원을 받아 포르투갈의 홍해 봉쇄를 막으려고 하였으나, 참패하여 아덴이라는 항구를 지켜낸 것을 제외하면 인도양에서의 제해권을 제약받았고 포르투갈은 맘루크의 상선을 견제하여 맘루크가 중개하는 향신료 무역이 큰 타격을 받았다.[6]
16세기 들어서 페르시아에 들어선 신생 정부인 사파비 왕조와 함께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려 했고, 결국 1514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셀림 1세는 맘루크 왕조의 보호국이었던 둘카디르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터진다. 다만 그러면서도 포르투갈에 대해서는 협력하였고, 1517년 오스만-맘루크 군은 메카의 관문이자 홍해 무역의 중심지인 제다를 침공한 포르투갈 군을 격퇴한다.

6. 멸망과 부흥운동


맘루크 왕조의 기병은 오스만 제국의 포병과 예니체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술탄이 전투에서 패배해 전사하는 치욕까지 겪었다.[7] 1517년 맘루크 왕조는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했으나,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들로 하여금 이집트를 계속 지배하게 했다. 이로써 이집트는 오스만의 평범한 한 속주가 되는 듯하였으나...
그로부터 200년이 넘게 지난 1768년, 알리 베이 알-카비르(علي باي الكبير)는 독립을 선포하고 술탄을 칭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관리들을 추방하고 오스만 제국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들을 없애려 했다.
1770년 알-카비르의 군대는 히자즈와 시리아 지방을 탈환해 이전 맘루크 왕조의 강역을 대부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 당시 유럽, 러시아와 전쟁 때문에 대규모 병력을 이집트에 파견할 여유가 없었던 오스만 제국은 이간책을 쓴다. 알-카비르는 티그리스 지방의 민족주의자인 다헤르 알-오마르와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이들과의 사이가 금이 가 결국은 알-카비르가 1772년 살해당한다[8].
오스만 제국의 계속된 공세와, 나폴레옹군이 이집트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맘루크들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1800년쯤 되면 카이로 근방의 한 줌밖에 안 되는 영토를 제외한 대부분의 강역을 잃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웠다. 혼란한 국내 정세와 오스만 제국의 가혹한 통치로 인해 1805년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났지만, 맘루크는 내부 분열로 정권을 되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당시 이집트 총독으로 부임한 메흐메드 알리의 중재로 이집트는 반독립국가가 되었으나, 맘루크들은 권력을 잡지 못하고 1811년 무하마드 알리에 의해 숙청당했다. 소수의 맘루크들이 세나 술탄국[9]으로 흘러들어가 정권을 탈취하고 복수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다가 1820년 이집트를 공격하나 역공당해 이제는 맘루크의 씨가 마른다. 이로써 맘루크 왕조는 아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7. 역사보기 틀











[1] 이스칸다리야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자리에 본인의 이름을 붙인 성채를 세운 것으로 더 유명하다[2] 바로 십자군이 몽골과 동맹을 맺은 것에 대한 복수였다.[3]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43~146쪽[4] 특히 바흐리 왕조 시기에는 킵차크 투르크와 체르케스 외에도 키토부카와 같은 몽골인처럼 다양한 출신의 맘루크 아미르들이 술탄위에 올랐다[5] 아나톨리아 반도 동남부에 위치했던 투르크계 공국. 본래 아나톨리아 반도의 여러 투르크계 국가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으나, 오스만이 뜨면서 망했어요가 된다. 이후 오스만이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동안에도 발목을 잡으려 했으나 오스만군이 마음먹고 쳐들어올 때마다 수도까지 밀리기가 일쑤였고, 15세기가 되면 맘루크 왕조에게 붙어서 오스만을 견제하는 처지가 된다.[6] 물론 맘루크 왕조가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고 해군을 보내 포르투갈 함대를 공격했으나, 디우 해전에서 패배하여 인도양 해상 무역의 제해권을 잃고 말았다. 애초에 맘루크 왕조는 권력의 기반이 맘루크로 대표되는 육군에 있었지, 해군은 거의 키우지 않아 무척이나 부실했던 반면, 16세기 포르투갈은 그야말로 세계 최강의 해군을 거느린 나라였으니 이길 수가 없었다.[7] 특히 인구에서도 오스만에게 열세였는데 이때 오스만의 인구는 1,100만이었는데 맘루크 왕조의 인구는 그 절반도 안 되는 486만에 불과했다.[8] 여담으로 시리아에서는 1520년에 셀림이 죽자마자 반란이 일어났다. 본래 맘루크 왕조의 신하로 오스만에 항복하여 카이로 정복에 공을 세운 대가로 시리아 총독에 임명되었던 잔비르디 알 가잘리라는 인물이, 오스만 제국의 지방관과 병사들을 숙청하고 주민들이 오스만 제국식의 의복을 입는 것도 금지하는 등 저항한 것. 하지만 당연히 반란에 협력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이집트가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않았던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셀림의 뒤를 이은 황제먼치킨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진압됐다.[9] 수단 북부에 존재하고 있었던 부족 연맹 국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