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무타즈
1. 개요
المعتز بالله
알 무타즈 빌라[1]
재위 866년 1월 25일 ~ 869년 7월 13일
생몰 847년 ~ 869년 7월 16일
압바스 왕조의 13대 칼리파. 알 무타와킬의 차남으로 부왕을 암살한 튀르크 무신들에 의해 계승 포기 각서를 쓰고 형 문타시르와 사촌 무스타인의 치세 하에 근신하였다. 하지만 사마라의 튀르크 정권과 바그다드 정권 간의 5차 피트나가 발생하자 그는 사마라 군대에 의해 칼리파로 추대되었고 866년 1월에 내전이 종식되며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무타즈는 재상 (와지르) 아흐마드 이븐 이스라일의 도움으로 와시프와 부가 등 튀르크 장군들을 숙청하고 내전을 승리로 이끌며 군대의 지지를 얻은 동생 탈하를 투옥하는 등 왕권 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이집트에 반독립적인 툴룬 왕조가 들어서고 (868년) 이라크 남부에는 잔즈 반란의 기운이 감도는 등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무너져 내리는 혼란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되었고 군대에게 줄 봉급도 부족하였다. 결국 869년 7월, 무타즈는 와시프의 아들 살리흐가 주도한 쿠데타 군에 의해 폐위되었고 투옥된지 3일만에 사망하였다.
2. 즉위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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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후반 칼리파 가계도 (알 무타심 ~ 알 무타미드)
본래 알 무타와킬은 세 아들에게 차례로 칼리파에 즉위할 것을 장려하였다. 그는 장남 문타시르에게 자지라 (사마라)와 이집트를, 차남 무타즈에게 이란 (타히르 조)을, 삼남 무아야드에게 시리아 통치권으 주었다. 사남인 탈하 (알 무와파크)와 막내인 아흐마드 (알 무타미드)는 어린 나이 때문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한편, 시간이 흐르며 무타와킬은 생각을 바꾸어 야심이 많았고 아랍 엘리트 층의 지지를 받던 차남 무타즈를 단독 후계자로 정하려 하였다. 이에 장남 문타시르를 지지하던 튀르크-마그레브 용병들은 칼리파 암살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861년 10월) 그리고 그해 12월 5일, 무타즈가 라마단 종식을 알리는 금요 예배를 이끌었고 9일에는 무타와킬이 장남 문타시르를 죽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결국 10-11일 밤에 거사가 일어나 무타와킬이 살해되었고 문타시르가 즉위하였다. 이후 알 문타시르는 동생들을 소집하여 충성 서약 (바이야)을 명령하였다. 한편, 무타와킬의 와지르였던 우바이둘라는 궁전을 탈출하여 무타즈의 거처로 갔으나 그는 이미 문타시르에게 소환된 상태였고, 대신 수천에 달하는 무타즈의 친위대[2] 와 마주쳤다. 그들은 문타시르의 궁전으로 쳐들어가려 하였는데, 우바이둘라는 '우리의 주군이 그의 수중에 있다'며 그들을 무마시켰다. 862년 4월 27일에 무타즈와 무아야드는 계승권 포기 각서에 서명하였다.
하지만 두달 후에 문타시르가 급사하며 무타즈에게 재차 기회가 온듯 하였으나 튀르크 정권은 그의 사촌인 알 무스타인을 추대하였다. 이에 사마라 시민들과 페르시아인 군대가 봉기하였으나 튀르크 군에게 진압되었다.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후 무스타인은 무타즈와 무아야드에게 연간 8만 디나르의 연금을 주며 회유하려 하였으나 이내 생각을 바꿔 그들의 재산[3] 을 몰수하고 자우사크 궁전에 감금시켰다. 여론을 의식한 정권에 의해 겨우 목숨을 부지했을 뿐이었다.
3. 5차 피트나
- 자세한 포위는 알 무스타인 문서 참조
비록 5차 피트나가 사마라 정권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양측 모두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을 소모하였고 수만여명이 희생되었다. 백여년간 세계 최대의 도시로서 번영을 누리던 '평화의 도시' 바그다드는 4차 피트나 때의 이상으로 크게 파괴되었고 특히 주요 전장이었던 티그리스 강 동안 지역은 이후로도 끝내 회복하지 못할 피해를 입었다. 제국의 중심부이자 가장 부유한 지역인 이라크 일대가 1년여간 전장이 되며 겪은 약탈과 인명 손실은 약화되어 가던 압바스 조에게 또다른 악재였다.
한편, 바그다드 정권은 방어를 위해 안바르 일대의 수로를 터뜨렸었는데 이후로도 완전히 복구되지 못하여 메소포타미아 중부 (사와드)의 관개 농업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요인들은 그렇지 않아도 부족했던 압바스 조의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세수는 군대의 봉급을 지급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전부터 고질적인 문제였던 군대의 난동은 해결되지 못하였고 실권을 장악하려는 칼리파 간와 군대와의 갈등도 지속되었다. 대격동기를 지났는데도 전혀 나아지지 못한 제국의 문제점은 결국 압바스 조의 쇠퇴를 가속화 시키게 된다.
4. 치세
비록 무스타인과 마찬가지로 튀르크 정권에 의해 옹립되었지만 알 무타즈는 실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자신의 비서였던 아흐마드 이븐 이스라일[4] 을 와지르로 임명하였고 866년 10월에 기어이 약속을 어기고 무스타인을 제거하였다. 이후 무타즈는 용병대 중 마그레브 군대를 중용하였는데, 이에 튀르크 군대가 동생인 무아야드와 아부 아흐마드 탈하를 지지하자 동생들까지 옥에 가두었다. 그해 말, 무아야드는 비단으로 목이 졸려 살해되었고 무타즈는 온전한 시신을 공개하며 그가 자연사 하였다고 공표하였다. 다만 전쟁의 1등공신이자 군대의 막대한 지지를 받던 탈하는 곧 석방되어 바스라로 옮겨졌다가 다시 바그다드에 살도록 허가되었다.
친인척들을 꺾어놓은 무타즈는 본격적으로 튀르크 정권과 대결하기 시작하였다. 본래 무스타인의 편에 섰다가 협상에 응하며 전쟁을 끝낸 튀르크 장군인 와시프 알 투르키와 부가 알 사기르가 첫번째 대상이었다. 866년 말, 무타즈는 그들을 해임시켰으나 군대의 반발로 번복하였다. 하지만 867년, 임금 체불로 인해 일어난 반란군에 의해 와시프가 살해되었고 이에 힘을 얻은 무타즈와 재상 아흐마드는 부가를 투옥시킨 후 처형하였다. (868년) 같은해, 또다른 튀르크 실세인 무사 이븐 알 카비르는 하마단으로 유배되었다.
4.1. 갈등과 죽음
하지만 군대에게 지급할 급료도 부족한 상태에서 군대 수뇌부와의 갈등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9세기 중반부터 관례적으로 시행되던 신임 칼리파의 군대에 대한 10개월치 급료 지급은 2개월치로 줄어들었다. 특히 내전을 거치며 이라크의 세금도 제대로 걷히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무타즈는 바그다드 총독 에게 자급자족하게 하였고 도시의 혼란은 극심해졌다. 한편, 사마라 측과 협상한 무함마드 총독은 876년 11월에 사망하였고 그의 동생 우바이둘라가 직위를 계승하였데 무타즈는 타히르 조와 대립한 우바이둘라를 해임하고 또다른 동생 술라이만[5] 을 임명하였다. (869년)
튀르크 정권을 제어할만한 능력이 있던 우바이둘라 대신 지도력이 부족한 술라이만이 바그다드를 맡으며 무타즈는 스스로의 권력을 약화시킨 꼴이 되었다. 869년 들어 와시프의 아들인 살리흐가 튀르크 정권의 실권자로 부상하였고, 그는 조정 (디완)에서 재상 아흐마드 일당을 부패 혐의로 고발하였다. 이에 아흐마드가 반박하며 논쟁이 일어나던 찰나, 회의장 밖에 대기하고 있던 살리흐의 경호원들이 난입하여 아흐마드와 그의 측근들을 체포해버렸다. (5월 19일) 살리흐는 그들을 고문하고 재산을 압류한 후에야 풀어주었다.
마침내 7월 13일, 살리흐는 급료 체불로 분노한 병사들을 이끌고 궁전 앞으로 가서 칼리파가 직접 나올 것을 요구하였다. 무타즈가 거부하자 살리흐의 부하들이 난입하여 그를 체포하였고 이틀 뒤 퇴위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제되었다. 이후 감옥에 던져진 무타즈는 튀르크 병사들의 멸시와 괴롭힘을 당하다가 16일에 사망하였다. 알 마수디에 의하면 그는 화로 속에 던져져 죽었다고 한다. 사후 와시크의 아들이자 그의 사촌인 알 무흐타디가 칼리파로 추대되었다.
[1] Al Mutazz. 본명은 أبو عبد الله محمد بن جعفر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이븐 자파르)[2] 주로 압바스 혁명을 일으킨 호라산 출신 아랍인들의 후예[3] 알 타바리에 의하면 무타즈의 재산은 천만 디르함에 이르렀다고 한다[4] 내전 당시 바그다드 총독 무함마드로 하여금 평화 협상에 나설 것을 유도함[5] 우바이둘라의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