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무흐타디

 


1. 개요
2. 치세
2.1. 살리흐 vs 무사
2.2. 대립과 죽음
3. 여담
4. 참고 문헌


1. 개요


아랍어: المهتدي بالله‎[1]
재위 869년 7월 21일 ~ 870년 6월 21일
생몰 ? ~ 870년 6월 21일
압바스 왕조의 14대 칼리파. 알 와티크와 그리스인 노예 출신의 쿠르브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나이가 어려 847년 부왕의 사망 이후에 숙부 무타와킬이 계승하였고 이후 22년간 잊혀져 지내야 했다. 869년 7월, 그의 사촌인 알 무타즈를 폐위시키고 며칠간 고민하던 튀르크 병사들은 21일에야 '잊혀진 왕자' 무함마드를 칼리파 알 무흐타디로 추대하였다. 다만 바그다드에선 무타즈의 동생 탈하 (무와파크)를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의 치세는 튀르크 무신들인 살리흐 이븐 와시프와 무사 이븐 부가 간의 대립으로 얼룩졌으며 후자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한편, 무사가 잔즈 반란을 진압하러 사마라를 떠난 사이에 무흐타디는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튀르크 정권을 타도하려 하였다. 이에 무사가 회군하였고 왕당파 군대를 격파한 후 무흐타디에게 퇴위를 종용하였으나 그가 거절하자 살해하였다.

2. 치세


[image]
9세기 후반 칼리파 가계도 (알 무타심 ~ 알 무타미드)
무흐타디는 검소하고 경건했으며 개혁과 포용의 군주로 추앙받던 우마이야 조의 칼리파 우마르 2세를 본받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는 악기를 금지하는 등 사치가 만연한 궁정 문화를 혁파하였고 친히 풍기문란을 바로잡는 법정 (마잘림)을 주재하기도 하였다. 그외에도 시민들과 소통하며 검소히 사는 무흐타디의 모습에 민심은 그를 따르게 되었다. 한편, 869년 당시 튀르크 정권의 실세였던 살리흐 이븐 와시프는 무흐타디 즉위 직후 선대 칼리파 무타즈의 재상이었던 아흐마드 일파를 다시 체포하여 고문하였다. 이후 법률가들로부터 파트와를 얻어낸 살리흐는 궁전 앞 광장에서 아흐마드와 그의 비서 아부 누흐에게 5백대의 매질을 가하여 죽였다.[2] (9월 8일)

2.1. 살리흐 vs 무사


살리흐의 잔혹한 복수는 칼리파 무흐타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행된 것이었다. 하지만 살리흐 역시도 군대의 급료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무타즈 시절 대신들과 태후인 카비하의 재산을 압수했지만 역부족이었으며 오히려 그의 명성만 추락하였다. 한편, 하마단에 머무르며 타바리스탄의 알라비 왕조 등 반란군과 싸우던 튀르크 장군 무사 이븐 부가 알 카비르는 살리흐의 실정 소식을 듣고 사마라로 향하였다. 이에 살리흐는 무흐타디로 하여금 전선으로의 복귀를 명하는 편지를 쓰게 하여 무사에게 보냈지만 그는 가볍게 무시하곤 계속 진군하여 869년 12월 11일, 사마라에 입성하였다. (869년 12월 18일) 무사는 무흐타디를 소환하여 태후를 능멸한 죄목으로 살리흐의 처벌을 약속하게 하였다.
한편, 무사에 맞서기 위해 살리흐는 5천 병력을 소집하였으나 막상 싸우려 하자 대부분 도주하고 8백명만이 남았다. 이에 절망한 살리흐는 정면대결 대신 숨어버렸다. 남은 살리흐의 부하들은 시내에서 난동을 피웠고, 이에 무흐타디는 설리흐를 사면할 것을 약속하며 양측 간의 화해를 주선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칼리파가 살리흐와 내통한다고 여긴 무사는 그를 폐위하려 하였는데, 명망이 높던 무흐타디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봉기하여 칼리파가 해를 입는다면 무사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외쳤다. 상황이 복잡해지자 양측 간의 협상이 오갔고, 870년 1월 13일에 무사와 살리흐 모두 예전의 직위로 돌아가며 권력을 분할해 가진다는 잠정 합의가 이루어졌다.
화해의 일환으로 살리흐에 대한 안전 보장이 공표되던 때에, 살리흐의 부하들이 재차 난동을 벌였다. (1월 14일) 무사는 즉시 궁전을 접수하곤 칼리파로 하여금 살리흐와 그 가족 및 장교들은 다음날까지 궁전 앞으로 모이라는, 그리고 그에 불응할시 태형에 처해진 후 투옥된다는 칙령을 내리게 하였다. 이후 무사의 부하들은 살리흐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의심가는 주택들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알 타바리에 의하면 살리흐는 며칠 후에 체포되었고, 궁전으로 압송되던 중 말위야 미나렛 부근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의 수급은 무흐타디에게 보내진 후에 '이것이 자신의 주군을 살해한 자의 최후다' 라는 글귀와 함께 장대에 메달려 사마라 시내에 전시된 후에야 유족들에게 보내져 매장될 수 있었다고 한다.

2.2. 대립과 죽음


870년 4월 6일, 무사는 이라크 남부에서 일어난 잔즈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무사의 동생인 아부 나스르 무함마드가 사마라에 남았다. 그해 6월 4일, 튀르크 장군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4천이 마울라 (비아랍계 무슬림)들이 봉기하여 칼리파가 거처하던 자우사크 궁전을 향하였다. 이에 무흐타디의 동생 압둘라가 원하는 바를 말하면 전달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그들은 막무가내로 칼리파에게 직접 상주하겠다면 궁전을 에워쌌다. 무흐타디는 시위대 중 대표단과 면담하겠다고 하였으나 그들은 역시 거절하였다. 군중들이 궁전을 습격한다고 여긴 궁전의 경비대와 관료들 대부분은 도주하였고 시민들은 빈 궁전에 들어와 알 무흐타디와 대면하였다.
마울라들의 봉기 의도는 무흐타디의 실권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튀르크 아미르 (장군)들 대신 칼리파와 그의 동생들이 사마라를 맡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또한 튀르크 무신들이 국고에서 1억 5천만 디나르를 횡령한 것을 규탄하며 부패 청산을 외쳤다. 무흐타디는 이 문제를 엄중한 자세로 살펴볼 것을 약속하였다. 시민들은 하루동안 궁전에 머물도록 허가받았고, 그들을 먹일 보리가 준비되었다. 일련의 '친위 쿠데타' 소식을 들은 무사의 동생 무함마드는 시내 동쪽이 알 하이르에서 5백의 군대를 모아 불상사를 준비하였으나 하룻밤이 지나자 흩어져버려 백여명만이 남았다. 이에 무함마드는 인근 마을로 도주하였다.
6월 7일, 시위대 중 열성 왕당파 천여명이 조용히 기회를 엿보라는 칼리파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결집하여 튀르크 정권과 싸우기로 맹세하였다. 그 대표였던 이사 이븐 파루칸샤는 스스로 와지르 (재상)을 자처하며 칼리파의 명의로 무함마드에게 편지를 보냈다. 서신에서 이사는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였고 무함마드의 권위에 도발할 의도는 없으며 순순히 입궁한다면 그의 직위는 복구될 것이라고 적었다. 이에 무함마드는 자신의 동생들과 여타 튀르크 장군들과 함께 자우사크 궁전에 들어와 무흐타디 및 마울라 대표들과 마주하였다.

무흐타디 : 무함마드여, 마울라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고?

무함마드 : 그들이 뭐라 합니까?

무흐타디 : 그들이 고하기를 자네 일당이 (사사로히) 재물을 취하였고 작위를 찬탈하였으며 그들 (마울라들)의 문제와 민생 회복을 위한 노력에 신경쓰지 않았다고 하는군.

무함마드 : 신앙의 지도자이시여, 제가 재정 관련 사항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 저는 장관도 아니었고 행정 구역들이 제 수중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무흐타디 : 그럼 그 엄청난 재산이 자네 혹은 (자네) 형제, 혹은 그 비서들 수중에 있지 않다면 대체 어디있단 말인가?

대화에는 두가지 판본이 있다.

무흐타디 : 무함마드여, 너의 형제 무사가 그의 군대, 노예들과 (사마라에) 와 살리흐 이븐 와시프를 죽이기만 하고 다시 떠나는구나.

무함마드 : 신앙의 지도자시여, 신께서 그런 생각으로부터 폐하를 보호하시길! 무사는 폐하의 충복으로, 악한 군대와 전투 중입니다.

무흐타디 : 살리흐는 우리에게 무사보다 더 유용했고, 그의 정책은 제국에 더 부합했다. 이제 이 알라비 세력이 알 라이로 돌아왔잖냐.

무함마드 : 신앙의 지도자시여, 그가 어쩌겠습니까 ? 그는 그 (알라비 지도자 하산)를 패배시켰고 그의 도당들을 죽였으며 모든 방면에서 그의 군대를 흩으려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떠날 때마다 그 (하산)는 언제나 돌아옵니다. 세상에나, 폐하께서 그 (무사)에게 알 라이에 영구히 있게 하지 않는 이상 그(하산)는 늘 돌아올겁니다.

무흐타디 : 그만! 너의 형제는 그 자신을 위해 재물을 훔치거나 착취하는 것 외엔 이룬 것이 없다.

칼리파의 비난에 분노한 무함마드는 이성을 잃고 '당신이 칼리파가 된 이후로 우리 집안이 이룩한 것과 당신네 형제들인 이룬 것을 제대로 평가해 보자'며 외쳤다. 이에 마울라들이 무례하다며 크게 외쳤다.

신앙의 지도자 (칼리파)의 적이 여기 있다, 그분 앞에서 칼을 찬 채로 말이야!

압둘라 이븐 타킨 등의 마울라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와 무함마드의 멱살을 잡으며 그의 칼을 압수하였다. 그러자 그의 경호원 중 한명이 칼을 뽑아들었고, 칼리파 근처로 다가가자 한 마울라가 나서 그를 베었다. 결국 무함마드는 방에 갇혔고 그의 일행은 투옥되었다. 마울라들은 무흐타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무함마드를 죽였다. 그의 시신은 하수도로 통하는 우물에 버려졌다가 무흐타디가 패한 후 수습되었다.[3]

칼리파들을 시해하고 그들 자신의 마울라들을 푸대접하는 불신자들이 바로 사리사욕을 위해 세금을 가로챈 바로 그놈들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지도자를 따르고 도와주십시오!

ㅡ 하심 씨족원들이 시민들에게

어차피 벌어진 일, 이번을 기회로 실권을 회복하기로 한 무흐타디는 무사와 함께 출정한 또다른 튀르크 장군 바야크박에게 서신을 보내었는데, 그에게 원정군 전체를 일임하며 무사를 죽이든지 사로잡아 오라는 내용이었다. 바야크박은 무사를 찾아가 '너도 이런 취급을 받는데 나라고 후에 이런 일 (토사구팽)이 없을까'라고 말하며 편지를 보여주었다. 무사는 분노를 억누르며 그에게 '사마라로 돌아가 칼리파의 신임을 얻은 후 함께 그를 제거하자'고 하였다. 바야크박은 자신의 군대와 사마라로 돌아갔다. (870년 6월 16일)
바야크박과 만난 무흐타디는 왜 무사를 처리하지 못했냐고 힐난하였는데, 이에 바야크박은 그의 무리가 더 많고 강해서 승산없는 싸움을 하느니 칼리파를 보좌하러 왔다고 둘러댔다. 이에 그에 대한 의심이 생긴 칼리파에게 한 마울라의 폭로에 의하여 바야크박과 무사의 음모가 알려졌다. 분노한 무흐타디는 바야크박에게 무장을 해제하고 혼자서 내전으로 들 것을 명하였다. 계획인 탄로난 것을 몰랐던 그는 자신을 의심하냐면서 먼저 집안과 동지들에게 명령을 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칼리파 근위대에게 체포되었다. 한편, 바야크박의 부하들과 가신들은 그의 소식이 뜸해지자 불길함을 느끼고 무장한 채로 자우사크 궁[4]으로 향하였다. 바야크박의 부하들이 그의 석방을 외치며 궁전을 포위하자 무흐타디는 고민에 빠졌고 비서 살리흐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오 신앙의 지휘자이시여 선조들 그누구도 폐하의 용기에 필적할 수 없습니다. 호라산 군대에 대한 아부 무슬림의 통제력은 이 튀르크 인보다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의 목이 (그의) 군대에게 던져졌고 비록 일부가 그를 숭배하고 신격화 하긴 했지만 (대부분) 침묵했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신다면 (이번에도) 병사들은 잠잠해질 것입니다. 폐하께선 알 만수르보다 더 용감하고 담대하기 때문입니다.

ㅡ 살리흐가 무흐타디에게

조언대로 무흐타디는 바야크박을 처형하고 근위대장 아타브로 하여금 그 목을 튀르크 병사들을 향해 던지게 하였다. 이것은 큰 실수였고 분노한 튀르크 군대는 아타브를 죽이고 궁전을 공격하였다. 이에 무흐타디가 휘하의 페르가나 및 마그렙 용병, 그리고 일당 2 디르함으로 매수한 튀르크 병사을 파견하여 시가전이 벌어졌다. 16일의 혼란은 일단 튀르크 군이 철수하며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17일에 1만의 튀르크 군대가 그간의 분열을 끝내고 바야크박의 동생 타구트야의 지휘 하에 뭉쳐 다시 쳐들어왔다. 알 무흐타디는 목에 쿠란을 건 살리흐와 함께 직접 전장으로 나섰으나 수적으로 분리했던 칼리파 군대는 밀리기 시작하였다.
결정적으로, 무흐타디 편에 섰던 튀르크 용병들이 동족들 쪽으로 붙으며 칼리파 군대는 무너졌다. 복수에 눈이먼 튀르크 병사들에 의해 무흐타디의 병사들은 도망친 일부를 제외하곤 전부 살해되었다.[5] 결국 알 무흐타디는 칼을 든 채로 도망가며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칼리파를 도와라'라고 외쳤으나 그를 위해 나선 시민은 없었다. 도주를 이어가던 무흐타디는 아부 살리흐라는 관리의 거처에 머물다가 튀르크 수색대가 쳐들어오자 옥상으로 올라갔다. 병사들은 칼리파를 향해 화살을 쏘았고 가슴에 화살을 맞은 무흐타디는 항복하였다.[6]

나는 해낼 수 있었다면, 나는 확고(히 수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도와 그의 실행에는 괴리가 있었다.

ㅡ 알 무흐타디의 유언으로 전해지는 글

이후 무흐타디는 자우사크 궁전으로 옮겨져 수갑에 채워졌고 튀르크 인들의 멸시에 시달렸다. 군인들은 그를 고문하여 60만 디나르가 숨겨진 금고를 얻은 후에 활용 가치가 없어지자 바야크박의 유족들에게 넘겼다. 일설에 의하면 그들은 무흐타디가 죽을때까지 그의 낭심을 걷어찼다고 한다.[7] 튀르크 무신들은 무흐타디의 사촌이자 무타와킬의 막내 아흐마드를 칼리파 알 무타미드로 추대하였다. 무흐타디는 21일에 사망하여 알 문타시르의 무덤에 묻혔다고 한다. 튀르크 정권의 수장인 무사는 23일에야 2천 정예병을 이끌고 사마라에 도착하였다.

3. 여담


아부 이샤크 무함마드 이븐 알 와시크, 즉 알 무흐타디는 회갈색의 눈과 긴 수염, 넓은 이마 및 어깨를 가진 30대 후반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압둘라 등 그의 동생들과 아들 이샤크가 그의 사후에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후로 알 와시크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4. 참고 문헌


History of al-Tabari 36권 : The Revolt of the Zanj (David Waines 번역)
https://en.wikipedia.org/wiki/Al-Muhtadi

[1] Al Muhtadi. 신에게 인도된 자. 본명은 (아부 이샤크 무함마드 이븐 알 와시크)[2] 정확히는 매질로 빈사 상태가 된 그들을 시내에서 끌고다니며 조리돌림하였고 상처가 깊어져 죽게 내버려두었다.[3] 수천명의 튀르크 용병들은 그의 무덤 앞에서 각자의 칼을 부러뜨렸다. 지도자가 죽었을 때의 튀르크 관습이라고 한다.[4] 튀르크 인들이 집중 거주한 신도시 알 카르크와 알 두르 일대와 사마라 본 시가지 사이에 위치[5] 전투 중에 무흐타디 본인도 몇명의 적군을 베어 죽였다고도 한다.[6] 옥상의 색과 같은 하얀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고도 하고 또다른 설에 의하면 경찰 대장인 아부 살리흐가 배신하여 튀르크인들에게 넘겨버렸다고 한다.[7] 혹은 그가 양위를 거부하자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하였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