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카임

 



아랍어
أبو القاسم محمد القائم بأمر الله
아불 카심 무함마드 알 카임 비아므릴라
영어
Al-Qa'im bi-Amr Allah
재위 934년 4월 3일 ~ 946년 5월 17일
생몰 895년 ~ 862년 6월 7일
1. 개요
2. 치세
2.1. 마그레브 전선
2.2. 실패와 반란
2.2.1. 아부 야지드 마크라드의 반란
2.3. 후계자 문제


1. 개요


파티마 왕조의 2대 칼리파.
그리고 944년부터 아우레스 산맥 (알제리-튀니지 국경지대)의 카와리지파 베르베르 인들이 아부 야지드의 지휘 하에 뭉쳐 반란을 일으키며 제국을 위협하였다. 그들은 수도 마흐디야를 포위하기까지 하였으나 수비군은 막강한 해군의 원조를 받으며 버텼다. 아부 야지드의 반란이 지속되던 946년 5월, 알 카임은 사망하였다. 아들 이스마일 알 만수르가 계승하였다.

2. 치세


어린 시절 쿤야로 불리던 아불 카심은 부왕에 의해 무함마드라는 이름과 함께 카임 ('신의 이름을 받드는 자') 칭호를 받았다. 카임은 부왕의 명을 받고 2차례의 이집트 원정을 감행하여 각각 몇년간 머물며 그 지배자처럼 행세하였다. 하지만 두 원정은 모두 결과적으로 실패하였고 이로써 서쪽은 알 마흐디, 동쪽은 알 카임이 통치한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후계자 칭호인 왈릴 아흐드 알 무슬리민[1] (압바스 왕조의 왈릴 아흐드와 유사)으로 봉해졌고 934년 칼리파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그의 치세는 순탄치 않았다. 비록 마흐디를 칭했지만 종말론적 성격의 바틴 대신 '무함마드 혈통'이 이슬람 제국을 다스려야 한다는 자히르 사상을 기반으로 했던 부왕이 사망하자 새로운 마흐디를 칭한 무함마드 이븐 툴라트가 트리폴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내륙에서 멀리 떨어진 알 마디야의 정권의 위엄을 느끼지 못했던 내륙의 베르베르 인들이 그에 호응하였다. [2]

2.1. 마그레브 전선


한편 파티마 해군은 935년 제노바를 습격하는 등 지중해를 호령하게 되었다. 같은해 트리폴리의 반란이 진정되자 알 카임은 928년 자신의 회군 이후로 모로코 북부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후우마이야 왕조에 맞서기 위해 슬라브 출신 장수들을 파견하였다. (935년) 그리고 페스의 미크나사 부족 외에 새로운 동맹을 찾고자 했던 알 카임은 쿠타마 베르베르 인처럼 고산 지대의 산하자 베르베르 부족인 탈카타에 접근, 그 수장인 지리 이븐 마나드를 포섭하였다. 936년, 지리는 음실라와 타헤르트 사이에 아시르 (아키르) 성채를 건설, 거점으로 삼았고 파티마 조를 대신하여 이프리키야에서 마그레브로의 교통로를 관리하였다. 이로써 마그렙 문제가 일단락되던 때에 이집트에선 마그리바 (베르베르) 군대와 마샤리카 (튀르크) 군대 간의 내분이 벌어졌다. 그 결과 후자를 이끄는 푸스타트 총독 무함마드 이븐 투구즈가 승리하였고 마그리바 군벌들이 파티마 영토인 바르카로 망명하였다.

2.2. 실패와 반란


마그리바의 개입 요청에 알 카임은 3번째 이집트 원정을 감행, 장군 라이단 휘하의 대군을 파견하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는 수월히 점령되었다. 하지만 익시드 왕조의 튀르크 군대가 반격해오자 라이단이 바르카로 후퇴하며 원정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936년) 그리고 알 카임이 이집트에 신경쓰는 틈을 타 시칠리아 인들이 '바다 건너편'의 직접 지배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937년) 이 반란은 4년간의 소모적인 전투 끝에 941년에야 진압되었고 많은 난민들이 동로마 영토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시칠리아에 대한 무슬림들의 완전한 정복은 더욱 지연되었다. 한편 921년 이후 타헤르트에서 축출된 옛 루스탐 왕조의 카와리지파 베르베르인들은 이프리키야 남부 제리드와 나푸사 산지의 현지 카와리지파의 초대로 사드라타 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빌라드 알 수단 (흑인들의 땅)과의 사하라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2.2.1. 아부 야지드 마크라드의 반란


그중엔 루스탐 왕조 시절부터 이맘의 세습을 거부하고 선출제를 지지하던 누카리 분파가 있었는데, 그들은 특히 파티마 왕조의 세습적 이맘-칼리파제에 반감을 보였다. 한편 그들 중엔 사헬 지방의 타드마카에서 베르베르 상인인 아버지와 흑인 노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부 야지드 마크라드 이븐 카이다드란 자가 있었다. '에티오피아 흑인'이란 의미인 '알 하바시 알 아스와드'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눈먼 예언자'인 아부 암마르의 추종자였고 50대에 이르러 제리드에서 두드러진 설교자로 이름을 떨치며 파티마 당국과 대립한 끝에 붙잡혀 투옥되었다. 937년 지지자들에 의해 구출된 마크라드는 아우레스 산지로 숨어들어 (40년 전 알 쉬이처럼) 현지의 하우와라 부족에게 지하드를 설파하였다. 비록 그의 급진적인 사상에 이바디파마저 그를 '신의 적'으로 규정했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마크라드는 셰이크 알 무슬리민 (무슬림들의 원로)로 칭하였다.
7년간 산중에서 세력을 조직화한 마크라드는 마침내 관념속의 마흐디처럼 당나귀를 탄 채로 (사힙 알 히마르, 즉 '당나귀의 대장' 별명이 추가됨) 신앙으로 무장된 군대와 함께 하산하였다. (943년 말엽) 그는 카르마트의 경우처럼 다른 무슬림들의 생명, 재산, 여인들은 모두 '참된 신도'들에게 압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우와라 군대는 카이라완을 목표로 그들을 가로막는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격파하며 질풍노도의 기세로 진격하였다. 반란군은 테베사와 베자, 그리고 카이라완의 관문인 알 우르부스 (라리부스)를 점령하였다. 944년 10월 15일, 마르라드는 카이라완을 점령하였고 파티마조의 박해를 받던 말리키 학파의 환영을 받았다. 알 카임에 의해 임명된 카이라완의 카디와 사령관은 처형되었다. 다만 시민들의 환대는 하우와라 군대의 횡포로 반감으로 바뀌었고 마크라드는 청빈함 대신 비단의 호화로움으로, 당나귀 대신 말로 갈아타며 금욕적인 지지자들의 실망을 자아내었다.
카이라완 수복을 위해 슬라브 출신 장군 마이수르 알 파타의 지휘 하에 파견된 파티마 군대는 마크라드에 의해 격파되었고 알 파타 역시 전사하였다. (11월 2일) 이제 카이라완에서 알 마디야로 향하는 길은 활짝 열린셈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마크라드는 945년 1월, 옛 스승 아부 암마르에게 카이라완을 맡기고 네 아들들은 각지의 총독으로 봉한 후 대군을 이끌고 파티마 왕조의 수도 알 마디야를 포위하였다. 파티마 왕조는 스스로가 세워진 방식대로 멸망되기 직전에 이르렀다. 1월 21일 기습 공격을 통해 성벽을 넘은 반란군은 대사원과 궁전의 뜰에 이르렀으나 수비대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이후 포위망이 완성되며 양측 간의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존립의 위기에 놓인 파티마 조에게는 다행히도 마흐디의 도시는 방어에 최적화된 곳이었다. 짧은 육지 성벽은 완벽한 여러 탑들로 방비되었고 파티마 해군은 포위된 도시에 보급과 정보를 전해주었다.
6개월이 넘도록 포위가 이어지자 포위군 측에서는 이탈자들이 속출하였고 뒤늦게 해상 봉쇄의 필요성을 절감한 마크라드는 우마이야 함대의 도움을 얻기 위해 코르도바에 사절단을 보내 칼리파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에게 복속을 표하기도 했으나 945년 안으로 함대가 도착하기엔 이미 늦은 상태였다. 결국 그해 9월 수비대의 역습에 패배를 겪은 마크라드는 포위를 풀었다. 그의 파티마 조에 대한 전복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카이라완으로 복귀한 마크라드는 초심을 상징하는 금욕과 당나귀로 돌아갔고 베르베르 인들의 지지를 어느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알 마디야 공방전의 실패는 이프리키야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튀니스와 베자에서 친파티마 봉기가 일어났고 파티마 군대와 반군 간의 쟁탈전이 이어졌다. 서쪽의 타헤르트에선 전세를 지켜보던 총독 알리 이븐 함둔이 마침내 마음을 정한듯 근왕병을 이끌고 진격, 마크라드의 아들 중 한명인 아이유브를 패배시켰다.
비록 승리 직후에 아이유브의 반격에 패배했지만 알리는 그에 굴하지 않고 고원의 쿠타마 베르베르 인들의 도움으로 티지스, 바가야 등을 점령하며 마크라드의 후방을 위협하였다. 한편 946년 초엽엔 알 마디야 다음으로 중요한 항구인 수스가 파티마 조의 수중으로 돌아왔다. 이에 마크라드는 후방의 위협에 대처하는 대신 자신을 배반한 수스에 대한 포위에 나섰다. (1월 13일) 하지만 수스는 아글라브 왕조 시절 시칠리아 파병의 기지로써 요새화되어 있었고 포위가 장기화 되던 5월 26일, 40km 거리의 알 마디야로부터 수륙 양면의 지원군이 도달하였다. 마크라드는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재차 패배하여 카이라완으로 향하였다. 같은 시기 카이라완에서 봉기가 일어나 아부 암마르가 축출되었고 마크라드의 입성을 막았다. 이에 그는 그 외곽에 주둔하며 파티마 군대와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다만 알 카임은 이미 5월 18일경 사망하여 승전보를 듣지 못하채 눈을 감았다.

2.3. 후계자 문제


알 카임의 본명인 아불 카심 무함마드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장남은 카심이었다. 하지만 946년 5월 알 카임이 사망하자 국고를 관리하는 슬라브 출신 환관 자우하르가 이맘이 죽기 직전 비밀리에 자신에게 후계자로 결정된 이의 이름을 말해주었는데 그는 카심이 아닌 이스마일이었으며 사후에 공표할 것을 당부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자우하르의 친위 쿠데타가 일어나 알 카임의 동생들과 이스마일의 다른 형제들이 체포되었다. 이후 이스마일은 대업을 이어받을만한 인물이었음을 증명, 알 만수르로 불리게 되었다. 다른 이야기에선 알 카임이 죽기 전인 946년 4월 12일에 이스마일이 이미 집권했으며, 이에 상심한 카임은 궁전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홀로 부왕 마흐디를 그리워하다 사망하였다고 한다.[3] 한편 알 카임의 손자인 알 무이즈는 큰아버지인 카심이 가문에 분쟁을 일으켰다고 회고하였다.

[1] 다만 이 칭호를 받은 이가 압바스 조에 또 있었는데, 바로 세자 시절의 알 마하디였다. 근데 그의 본명 역시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였다. 이에 대해 마이클 브렛은 파티마 조와 마찬가지로 압바스 조 역시 메시아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저술하였다[2] 마이클 브렛은 납세를 정당화할 카리스마를 갖추지 못한 카임에 대한 반발로 해석하였다[3] 이에 대해 마이클 브렛은 '이맘의 검'이었던 카임이 reclusive 한 칼리프로 전락했다고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