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스

 



수스 (튀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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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튀니지의 도시
1.1. 개요
1.2. 역사
1.2.1. 고대의 번영
1.2.2. 중세
1.2.2.1. 아글라브 왕조 시대의 번영
1.2.2.2. 노르만 인의 지배
1.2.3. 중근세
1.2.4. 근현대
1.3. 교통
2. 아머드 코어 4에 등장하는 링크스
3. 그래비티 폴즈의 등장인물
4. Tokyo 7th 시스터즈의 등장인물


1. 튀니지의 도시


'''유네스코''' '''세계유산'''
[image]
'''이름'''
수스의 메디나
Medina of Sousse
'''국가·위치'''
튀니지 수스 주, 수스 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8년
'''등재기준'''
(iii)[1], (iv)[2], (v)[3]
아랍어 سوسة‎
베르베르어 Susa
프랑스어 Sousa
영어 Sousse / Soussa

1.1. 개요


[image]
튀니지 동부 해안에 위치한 도시. 카르타고 시대와 중세 아글라브 왕조의 유적이 있다. 튀니스와 스팍스 중간 지점에 위치한, 함마메트 만을 끼고 있는 항구 도시이다. 튀니스에서는 남쪽으로 140km 떨어져 있고, 해안이 아름다운 휴양도시이다. 곡류 재배지역에 위치한 상업 중심지이며 인광석, 올리브유, 에스파르토초 (펄프 원료) 등을 수출한다. 인구는 28만명으로 튀니지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다.

1.2. 역사




1.2.1. 고대의 번영


기원전 11세기에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하드루메툼(𐤃‬𐤓‬‬𐤌𐤕 또는 𐤀𐤃‬𐤓‬‬𐤌𐤕‬; Hadrumetum)이라는 이름으로 항구 도시가 형성되었다. 하드루메툼은 포에니 전쟁기에 로마와 동맹하여 다른 카르타고의 도시들과는 달리 파괴를 면하였다. 역사가 리비우스에 의하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로마 군대가 자마 전투를 위해 상륙한 곳이라고 한다. 전쟁 이후 도시의 이름은 하드루멘툼(Hadrumentum)으로 바뀌었다.
하드루멘툼은 카르타고가 복원되기 전까지 로마 제국령 아프리카 속주의 중심 도시였다. 그리고 5현제 시대에는 트라야누스 황제로부터 Colonia Concordia Ulpia Trajana Augusta Frugifera Hadrumetina 칭호를 받아 식민도시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2세기 말부터는 그리스도교가 확신되어 카타콤베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293년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행정 개편 시에 신설된 비자시움(Byzacium)의 치소가 되어 번영을 이어나갔다.

1.2.2. 중세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 이후 서로마 제국에 속하게 된 도시는 보니파키우스아이티우스 간의 내전 이후 434년에 반달족에게 함락되어 우네리코폴리스(Hunericopolis)로 개칭되었다. 100년 후인 534년에 동로마 제국에게 수복된 도시는 혹은 유스티아노폴리스(Justinianopolis)[4]로 불리게 되었다. 670년 경에 도시는 두달 간의 포위 끝에 우마이야 왕조의 무슬림 군대에 함락되었고 파괴되었다.

1.2.2.1. 아글라브 왕조 시대의 번영

리바트
아랍인들은 폐허 위에 새롭게 계획된 도시를 세웠고 이름도 수스로 바꾸었다. 9세기에 튀니지의 첫 자치 왕조인 아글라브 왕조 시대에 수스는 카이로완의 외항 역할을 하며 번영하기 시작하였고, 821년부터 동로마 해군으로부터 도시를 지켜줄 리바트가 지어지기 시작하였다.[5] 아랍인들은 870년에 몰타 군도의 고초 섬의 도시인 음디나의 성당에 있던 대리석을 뜯어와 수스 성벽 건설에 사용하였다. 아글라브 왕조 시절에 수스에는 부 프타타 모스크, 카스바, 에미르 압둘 압바스 무함마드[6]가 세운 대모스크와 같은 중요한 기념물들이 건설되었다.[7]

1.2.2.2. 노르만 인의 지배

827년, 동로마령 시칠리아를 정복하기 위한 원정군이 수스의 항구에서 출항하였고 902년에 시칠리아는 무슬림의 섬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글라브 조는 909년에 파티마 조에게 멸망하였고 수스의 위상도 916년, 동남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세워진 항구인 알 마디야에 밀려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11세기 후반[8]에 시칠리아를 정복한 노르만 인[9]들은 1146년에 트리폴리 점령에 이어 1148년 6월 22일에 마디야, 7월 1일에는 수스에 무혈입성하였다.

1.2.3. 중근세


수스는 1159년에 무와히드 왕조에게 회복되었다. 무와히드 조의 칼리파 알 무민은 알 마디야의 기독교도들에게 이슬람 혹은 죽음...을 선택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전까지의 이슬람 정복자들에게서 보기 힘든 행위로, 레콘키스타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고조된 험악한 양 종교간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무와히드 조의 지배도 13세기 초에 끝났고 튀니지 일대는 토착 왕조인 하프스 왕조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1.2.4. 근현대


16세기 전반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수스는 1545년에 마디야가 스페인에게 점령되자 다시금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바르바리 해적 소탕 작전의 일환으로 18세기 말에 베네치아 - 프랑스 함대의 폭격 (1786년)을 받았다. 1881년에 이르러 튀니지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20세기 초의 수스의 인구는 2만 5천명이었다. 그중 1만 5천명은 유럽인이었는데, 1만명은 프랑스 인이었고 나머지는 주로 이탈리아/몰타 출신이었다.
프랑스 지배기에도 수스는 중요한 항구였고, 2차 세계대전 시에는 독일군과 연합군과의 격전이 일어나 시가지가 일부 파괴되기도 하는 피해를 입었다. 튀니지 독립 후에도 수스는 여전히 중요한 항구 역할을 하고 있다.

1.3. 교통


관광지로 유명한 도시이고, 카이로우안, 엘 젬, 모나스티르, 마디야 등 인근 관광도시들을 둘러보기 위한 거점으로도 자주 이용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보니 수도인 튀니스에서 이쪽으로 오기 위해 이용할수 있는 교통편의 종류와 그 양은 매우 많은 편이다. Moncef Bay의 루아지 역에서 출발하는 루아지를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추천된다.[10]또는 남부 지상역(Gare Routière Sud)에서 SNTRI의 버스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고[11], 3선택으로, 궤도교통 Place de Barcelone역 바로 옆에 있는 튀니스 역(Gare de Tunis)에서 출발하는 수스행 기차를 이용하는것도 좋다. 단 기차는 연착이 잦고 시설도 그리 깨끗하지 못하다. 사실 튀니지의 교통수단이 대부분 그렇지만...
항공편으로는 모나스티르 국제공항으로 도착하여 바로 앞에 있는 Aéroport 역에서 사헬선(Ligne de Sahel)을 이용해 올 수 있다.
도시 남쪽에 있는 수스의 루아지 터미널은 가프사, 카이로우안,튀니스, 마디야, 스팍스 등 모든 방향의 루아지들이 출발하는 곳이기에 상당히 복잡하고, 매표소도 목적지의 방향에 따라 5개로 나뉘어져 있으니 자신의 목적지로 가는 루아지의 표를 끊어주는 매표소를 잘 찾아서 이용하자. 그냥 루아지 기사들이 모여있는데서 목적지를 말하면 그분들이 매표소 찾기부터 알맞는 루아지 탑승까지 전부 대신해줄 것이다.

2. 아머드 코어 4에 등장하는 링크스


마그리브 해방전선에 속해 있는 이레귤러 링크스로 아리사와 중공의 탱크형 기체에 탑승한다. 설정상 판단력이 느려서 동료인 아마지그가 '아마지그 선생'이라 불릴 정도의 실력자인 것에 반해 거의 잉여레벨이라고 한다. 작중에서는 다수의 노멀과 함께 나세르 정유소를 점거한 것으로 나오는데 오히려 미사일 트럭이 위협적일 정도고, 미사일 트럭만 격파한 뒤 건물 지붕위에 올라가서 공격하면 제대로 반격도 못하고 박살나는 잉여.
탑승기는 아슈트 민야. 이름의 유래는 이집트의 도시에서. 한국어로 치면 서울 부산 같은 느낌으로 읽어주면 된다. 초중장 탱크형에 그레네이드 같은 제압형 무장을 탑재한 상태. 하지만 안타깝게도 PA를 벗겨낼 만한 무장이 별로 없어 대넥스트전은 조금 애매하다.
사실 설정으로도, 실력으로도 조제남조가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쳐주는 링크스다. 하지만 기체만으로 놓고 보면 '''아마지그보다 몇 배 강하다'''. 중요한 건 실력이라는 것을 그 몸으로 증명하는 상대.
AMS적성이 낮아서 그런지 같이 낮았던 아마지그에 비해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단어 몇개만 말하는 수준이다.

3. 그래비티 폴즈의 등장인물


수스 라미레즈 항목 참조.

4. Tokyo 7th 시스터즈의 등장인물


알레산드라 수스

[1] 리바트, 카스바 성채, 성벽들, 부 프타타 모스크, 대모스크가 있는 수스는 헤지라의 첫 세기의 문명의 증거들이다. 메디나는 균형 잡힌 계획에 따라 탄생되었다. 그것은 바브 엘 카블리에서 리바트와 고대의 내부 항구까지 이어지는 남북 축선에, 바브 엘 제디드에서 바브 엘 가르비까지 이어지는 동서 축선 위에 건설하는 것이다. 이는 이슬람 도시 새로운 형태의 발전되고 흥미로운 사례이다.[2]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잘 보존된 수스의 리바트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지어진 건축물의 탁월한 사례이다. 즉, 초입에 탑과 포탑이 있으며 남쪽 편에 문 하나가 있고, 35개의 방이 있으며, 내부의 안뜰이 있는 직사각형 인클로저이다. 남동쪽 탑이 있는 1층의 남쪽 편에는 모스크가 있다. 남동쪽 탑은 미너렛과 망루 역할을 하는 것으로 821년에 추가된 것이다. 이 탑에서 보내는 신호는 모나스티르에 있는 리바트까지 전달되었다.[3] 어쩔 수 없는 변화의 영향을 취약한 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수스의 메디나는 전반적으로 전통적 인간 거주지의 뛰어난 사례이다.[4] 라틴 식으로는 유스티아나(Justiniana)라고 불렸다.[5] 당시 에미르는 에미르 지야다트 알라 I세(Emir Ziyadat Allah I)[6] Abdul Abbas Mohammed[7] 도시의 성벽은 859년에 완공되었다.[8] 1060 ~ 1091년[9] 시칠리아 왕국의 개창자인 로제르 2세가 주도하였다. 1123년에 판텔레리아 섬, 1135년에 제르바 섬이 정복되어 아프리카 침공의 교두보가 되었다.[10] 사람이 다 찰때까지의 대기시간이 5~10분도 채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이고, 장거리라 그런지 루아지 차량도 대부분 새것이다. 18년 9월 기준 편도요금 11디나르.[11] 단 휴일에 티켓을 현장구매 하겠다는건 역 도착 후 3시간쯤 뒤의 버스를 이용할 생각이 없는 이상 단념하는게 좋다. 18년 9월기준 편도 요금 약 9디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