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란 가르시아

 

'''페루 공화국의 역대 대통령'''
88대
벨라운데 테리

89대
'''알란 가르시아'''

90대
알베르토 후지모리


이름
알란 가르시아
출생일
1949년 5월 23일
사망일
2019년 4월 17일 (향년 69세)
페루의 88대 대통령으로 정치역경 자체는 매우 파란만장한 인물이다.
알란 가르시아는 페루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지만 집안 자체가 정치인 집안인지라 1960년대와 70년대 당시의 페루 정국이 혼돈과 독재를 겪고 있던 참이라서 부침이 있었다. 청소년시절부터 아메리카 혁명인민동맹의 당원이 되었고 파리에서 몇년간 유학을 다녀왔다가 1978년 군부가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총선을 재개했고 페루 의회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1982년에 아메리카 혁명인민동맹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티토주의와 펠리페 곤잘레스 스페인 총리에게 영감을 얻은 정책들을 선보였는데 당시 페루는 민주화 이후로도 외채난으로 인한 극심한 물가상승과 치안공백으로 인한 치안 불안에 허덕이고 있었고 민주화 직후에 집권한 벨라운데 테리가 이에 대해 무능한 대처로 일관하면서[1] 이를 강력하게 비판했고, 잘생긴 얼굴과 뛰어난 연설실력을 발군 삼아서 지지율을 급속히 끌여올려나갔다. 이익고 1985년 대선에서 53%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 초기에는 외환보유고의 감소를 막기위해 외채동결 조치를 취하고 동시에 환율 안정화 및 물가통제와 임금인상 정책등을 폈는데 사실 이러한 조치는 초기에는 큰 효과를 내서 1986년에 경제성장률은 9%대까지 치솟기 이르렀고 또한 당시 페루군이 반군을 척결하겠다면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광범휘한 인권침해를 저지르는 문제도 있었는데 초기에는 인권침해를 저지른 군인이나 부패한 경찰관을 해고시키는 개혁정치를 펼쳤다. 최고지지율이 무려 96%에 달해서 페루의 케네디라고 불릴 정도였다. 여기서 끝났다면 페루를 안정화 시킨 인기있고 유능한 대통령으로 남았을것이다.
허나 이러한 경제정책은 든든한 빽 없이 진행되었기때문에 오래 지나지 않아 삐그덕거리기 시작했고,[2] 1987년도부터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잡힐듯 보였던 물가상승률도 다시금 오를기미를 보이자 경제를 부양하려고 은행국유화 법안을 통과시켰다가 우익진영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은행국유화 법안은 논란끝에 의회에서 부결되며 이후로 알란 가르시아는 급속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은행국유화 법안 파동 이후로 기업들의 투자는 급속히 위축되고, 물가상승률은 1987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다시 급속히 치솟기 시작하여 1988년에 1722% 1989년에 2775%까지 치솟았고, 국가경제는 마비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 틈을 타서 지방에서 빛나는 길이 페루 전역에 위세를 떨치며 리마 근교지역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이들은 페루의 인프라 시설에 테러를 가하며 치안은 다시금 급속도록 악화되었다.
더군다나 빛나는 길도 빛나는 길이지만 인권을 중시했던 초기행보와는 다르게 반군을 진압할 대책으로 강경책을 쓰면서 페루군이 일반 민간인을 임의적으로 살해하는 등의 인권침해적인 작전을 벌여도 이를 방조하거나 조장하기 시작했고, 이때 페루 교도소 학살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또한 경제가 나빠지던 상황속에서 가르시아의 측근들이 부패스캔들에 연류되면서 지지율은 10% 아래로 추락, 이미지는 망신창이가 되기에 이른다. 1989년 지방선거에서는 쌓아놓은 조직력을 통해 세를 확보해나갔지만 그럼에도 당세의 쇠락은 막을수 없었고, 1990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당선될것으로 예측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알란 가르시아는 여기서 머리를 잘 써서 TV방송 진행자이자 농업전문가 정도로 알려졌던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지지율이 올라가며 결선에 진출하자 적극적으로 밀어주었고, 일본이 한창 경제적으로 호경기를 누렸던 시절인지라 일본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 될것이라는 예측이 난무했었던 점을 이용한것인데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알베르토 후지모리와의 관계는 나빠졌고,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페루 의회를 해산하고 알란 가르시아의 비리를 조사하려고 하자, 알란 가르시아는 콜롬비아로 망명을 갔고, 반 후지모리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2001년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추문끝에 탄핵되고, 페루 대법원에서 알란 가르시아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며 페루로 귀국했다. 당초 대통령 선거에서알베르토 후지모리에게 적극적으로 맞서던 톨레도가 대통령에 당선될것이 확실시 되었던 상황이었고 알란 가르시아는 이전의 반군이 판치고 물가상승률은 극도로 높아졌던 악몽같던 시절을 대표하던 대통령으로 잡룡으로 취급되었지만 뛰어난 선거운동 능력을 선보이면서 결선투표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고 2001년 대선에서 석패했지만 그럼에도 46%라는 무시할수 없는 득표율을 확보하며 선전했다는 평을 들었다. 이후로 톨레도가 지지율에서 지속적으로 죽을 쓰면서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가 되었다
하지만 알란 가르시아가 약점이 적지 않은 인물이었는데 이 와중에 우얀타 우말라가 경제성장에도 빈부격차는 여전히 컸던 페루의 상황을 비판하며 급속히 치고 올라오자, 보수파의 표를 얻기 위해 골몰했고, 이를 위해 노선을 온건화했다. 2006년 대선에서 우고 차베스와 우얀타 우말라와 연계하며 실컷 까대며, 언론사들의 지원을 얻었고 우파의 표를 획득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기 집권기때는 페루의 경제는 보수적인 재정운영을 하며 우려를 불식시키고, 미국과의 관계도 어느정도 친해졌으며 매년 연 7~8%의 높은성장률을 기록하며 금융위기에 휘말린 2009년도를 제외하면 평온하게 경제관리를 잘했다는 평을 들었지만 사회운동에 대해서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고 그렇다고 복지를 획기적으로 늘린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집권기간 동안 사회정책에 대한 평은 영 꽝이었고 그 때문에 지지율은 낮았다. 1기 집권기때보다는 성과는 낫다는 평을 듣기는 했지만 퇴임 이후로는 퇴물로 전락했고 2016년 대선에서 6%의 득표를 확보하는데 그쳤다. 이후로 오데브레시 뇌물수수 사건에 연루되었고 이 와중에 우루과이로 망명을 갈려고 했지만 우루과이 정부에서 거부하면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로 2019년 4월 17일에 뇌물 혐의를 조사하던 경찰이 가르시아 전 대통령의 집에 들어오자 총을 들고 스스로 총을 쐈고, 병원으로 응급이송되었지만 회복되지 못하고 사망했다.
마침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가 건강이 썩 좋지 않은데다가 한때의 정적이었지만 동병상련의 처지인 톨레도와 우얀타 우말라도 알란 가르시아의 죽음에 대해서 애도했다. 사실 알란 가르시아의 자살이 가져올 파장이 페루 정치권에서 만만한 것이기 아니기 때문에 페루정부에서 3일간의 애도기간을 가졌다.

[1] 이미 1기 집권기때에도 토재개혁을 제대호 수행하지 못하고 미국기업과 이면합의를 했다며 군부에게 쫓겨났던 경력이 있었다.[2] 특히 국제통화기금의 큰 빽이 미국이었는데 미국과의 관계가 급속히 나빠지면서 페루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