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치데 데 가스페리
[image]
'''Alcide De Gasperi'''
생몰기간: 1883년 4월 3일 ~ 1954년 8월 19일
재임기간: 1945년 10월 10일 ~ 1953년 8월 17일
1. 개요
이탈리아의 정치가. 이탈리아의 제30대 총리로, 이탈리아 왕국의 마지막 총리이자 이탈리아 공화국의 초대 총리이다. 유럽의 통합과 이탈리아의 전후 재건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5년 10월부터 1953년 8월까지 8년 동안 이탈리아 총리를 맡았으며, 그의 말년인 1950년대에는 외무부 장관, 유럽 공동의회 의장 등을 지냈다.
2. 생애
1883년 4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인 트렌토에서 경찰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6년부터 사회 가톨릭 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1905년에는 신문사인 가톨릭의 목소리(La Voce Cattolica)의 편집인이 되었다. 1911년 오스트리아 원내 정당인 토렌토 인민 정치 연합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빈에 거처했다가 전쟁 후 그의 고향인 토렌토는 이탈리아에 속하게 되었고 가스페리 또한 이탈리아 시민권을 얻었다. 하지만 자신의 출신 지역에서 독일, 오스트리아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독일, 오스트리아 문화에 대한 애정을 보였고 가족들 사이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했다.
가스페리는 1919년 이탈리아 인민당을 창당한 구성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이탈리아 의원을 지냈다. 이 시기는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대두하던 시기였다. 그는 처음에 이탈리아 인민당의 무솔리니 내각 참여에 찬성했지만 무솔리니가 독재 체제를 위한 법 개정을 실시하고 파시즘을 비난한 자코모 마테오니를 살해하는 등 횡포를 부리자 파시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파시즘에 반대했던 인민당은 1926년 무솔리니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고 가스페리는 1927년에 체포되어 1928년까지 수감 생활을 했다. 바티칸의 요청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부가 무너진 1943년까지 바티칸 도서관에서 근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인민당을 계승한 기독교민주당을 세우는 데 기여했으며, 이바노에 보노미 내각의 무임소장관, 페루초 파리 내각의 외무장관을 맡았고 1944년 기독교 민주당의 당수가 되었다.
전후 1945년 10월 10일, 가스페리는 이탈리아의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한창 불었던 왕정 폐지 여론에 동조해 왕정과 공화정 중 하나를 택하는 국민투표를 추진했고, 이 국민투표에서 공화정이 선택되어 1946년에 이탈리아 왕정이 폐지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과 이탈리아 사회당을 포함하는 연정을 형성하고 신헌법을 제정했으며, 전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개혁을 실시했다. 대외적으로는 1946년 오스트리아 총리 카를 그루버와의 협정을 통해 볼차노 지역에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주고 1947년 연합국과의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 1947년 공산주의 정당을 연정에서 배제하라는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요청을 거부하여 이탈리아와 미국 간의 관계에 긴장이 돌았지만 1948년 총선거 이후 사회당과 공산당을 연정에서 배제하여 미국의 우방이 되었으며, 1949년 NATO를 지지했다. 그 결과 알치데 데 가스페리 정부의 이탈리아는 미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경제적 원조를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1950년 유럽의 석탄 철강산업을 통합할 것을 제안하는 쉬망 선언을 지지하여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의 창설에 기여했다.
1953년 총선거에서 기독교 민주당은 또 한 번 승리했지만 가스페리는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그의 정부는 주세페 펠라가 이어받았다. 1954년에 기독교 민주당의 당수를 그만둔 가스페리는 같은 해 8월 19일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로마의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교회에 묻혔다. 사후 1993년 그의 시복식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