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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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의 전쟁으로 촉발되어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 세계적으로 전개된 전쟁이다. 인류의 역사가 2014년에 들어서면서 1차 세계 대전 개전 100주년을 맞았으며, 2018년 11월 11일에 종전 또한 100주년을 맞게 되었다.'''"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The war to end war."'''[2]
2. 명칭
전 세계로 전장이 넓어짐과 동시에 총력전의 양상을 띤 최초의 전쟁이기 때문에 세계 대전이란 이름이 붙었다. 세계 대전이란 명칭은 그 당시에도 붙은 이름이었다. 지금도 'The Great War'는 제1차 세계 대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다.[3] 물론 18세기 유럽은 늘 전쟁이었으며 특히 7년 전쟁과 프랑스 혁명의 나폴레옹 전쟁도 대규모에 전장은 컸지만, 빈 회의 이후로 약 100년간 유럽 열강들 간의 전투는 크림 전쟁, 보오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전부라서 더욱 충격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의 기간을 전간기라고 칭한다. 전 계층이 전쟁에 참가하였으므로 인민전쟁(People's War)이라고도 한다. 전쟁 기간 동안 발생한 전사자는 약 990만 명이며 학자에 따라서는 이 전쟁에 참가한 국가들 대부분이 제국주의 국가라는 것을 지적해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이라는 제국전쟁(Imperial War)이라고도 부른다.
3. 소개 영상
위의 두개의 영상은 1차 세계 대전에 대해 쉽게 설명한 토크멘터리 전쟁사이고 아래는 패러독스 인터렉티브 갤러리에서 만든, 1차 세계 대전의 주요한 특징들을 4분에 요약해 보여주는 뮤직비디오. 노래는 스웨덴의 메탈밴드 Sabaton의 Great War이다.
4. 참전국
이 외에도 라이베리아, 파나마, 쿠바, 과테말라,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아이티, 온두라스, 에콰도르가 협상국에 속해 있었지만 그냥 미국이 선전포고를 하니까 따라서 하거나 형식상으로만 선전포고를 한 경우로 기껏해야 미국의 전쟁수행에 합류한 수준이다.
협상국에 합류한 국가들이 더 있는데 대표적으로 안도라, 네팔 왕국, 산마리노, 모나코 등이 있는데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나마 네팔의 경우 수십명의 병력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또 영국의 식민지 또는 보호령이었던 캐나다, 인도, 뉴펀들랜드 자치령,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 로디지아, 몰타 등등도 전쟁에 합류했다. 또 국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의용군이 싸운 곳으로는 아르메니아, 폴란드, 헤자즈 왕국, 체코슬로바키아[17] 등이 있다.
기타 동맹국에는 다르푸르 술탄국, 데르비시 국,[18] 자발 샴마르 토후국,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이 있으나 선전포고 시기가 모호하며 폴란드나 리투아니아도 잠시 독일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지만 곧 독일이 패망했으므로 제외한다. [19]
4.1. 중립국
도중에 침범 받고 중립 태도를 바꾼 나라들은 기재되지 않는다.
전쟁의 주 무대가 중부 유럽인 만큼 북해와 발트해 너머의 북유럽쪽 국가들이 주로 중립국임을 표방했음을 알 수 있다.
5. 배경
전쟁은 크게는 일련의 유럽 내 외교동맹의 변화(세력 균형 변화)에 의해 일어났다. 전쟁의 복잡한 배경, 특히 발칸 반도의 배경은 제1차 세계 대전/배경을 참조할 것. 해당 문서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단이 된 발칸 반도의 19세기사(에 더한 그 이전 역사)와 그에 대한 유럽 열강의 변화를 다룬다.
5.1. 근본적 원인
제1차 세계 대전의 기원은 팽창된 유럽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유럽의 생산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급성장했고 이는 곧 벨 에포크 시대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에 필요한 자원을 얻고 생산된 상품을 판매할 식민지가 필요하게 되어 유럽 각국은 식민지 쟁탈전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일찌감치 산업혁명을 성공시키고 국내 정치가 안정되어 있던 영국은 우위에 서있는 해군력 등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보유했고 프랑스도 여기에 가세했다.
그에 비해 엠스 전보 사건과 보불전쟁을 통해 새로 떠오른 신흥 강국 독일 제국은 통일전쟁을 거치면서 영국, 프랑스에 비해 산업과 공업 발달 과정이 늦어졌고 이 때문에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고 보니 이미 알짜배기 땅들은 영국, 프랑스 등이 차지한 상태였다. 결국 독일이 식민지를 획득할 방법은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를 뺏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독일은 기존 식민국가인 영국, 프랑스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으로 가장 크게 지적되고 있다.'''[20] 범게르만 주의로 탄생한 국가가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상황은 독일인들에게 강대국의 국력에 걸맞는 식민지를 바라게 만들었다.
특히 빌헬름 2세는 식민지를 위해 영국 해군에 맞서 해군 증강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것은 영국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 처칠은 함대는 영독 관계에서 알자스-로렌 지방이 의미하는 것과 같다고 경고했고, 런던 주재 독일대사였던 메테르니히도 해군을 증강하면 1915년 이전에 영국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영국의 경고를 무시했고, 계속해서 해군 증강을 반대한 메테르니히를 1912년에 해임해 버렸다. 건함 경쟁은 영국과 독일을 적대관계로 만들었으며 세계대전의 흐름을 결정지었다.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도 독일 제국과 영국, 프랑스의 대립은 위험수위에 달해 있었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계 보어인들과 싸운 보어 전쟁 당시에도 보어인들의 배후에 독일 제국이 있었고, 프랑스와는 두 차례에 걸친 모로코 위기로 대립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식민지와는 인연이 없는 다민족 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내부적으로는 점점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민족주의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주요민족인 오스트리아, 헝가리인들은 인구 구성의 반도 안 되었으나 다른 민족들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너무 많은 이권을 가졌다는 것에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외적으로도 안 좋았는데 독일 제국과 함께 범게르만주의의 영향을 받는 국가로서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에 맞서 발칸 반도를 둘러싼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발칸 반도는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하게 되었는데, 독립 이후 발칸 반도의 각국은 발칸 전쟁 등 영토를 놓고 치열하게 싸운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을 선동하여 지중해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 제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불만을 품은 것은 세르비아 왕국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를 합병하고 러시아 제국이 독일 제국의 압력으로 이에 굴복하자 (1878년, 1908년) 세르비아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극렬한 적대감을 품게 된다. 세르비아 왕국의 적대감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으로 마침내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21] 하지만 이것만으로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과 관련 세르비아 왕국 측에 검은 손의 해체 및 처벌과 내정간섭 허용만을 요구했기 때문. 다만, 을사조약을 통해 내정간섭을 받기 시작한 대한제국같은 사례[22] 들을 생각하면 내정간섭 허용은 좀만 생각해보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조항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독일 제국의 지원이 확실시된 이후에는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선전포고 역시 예견되어 있었고, 그에 대한 핑계가 필요했던 것 뿐이라는 해석이 존재한다.[23]
이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번진 진짜 원인은 러시아 제국이 영-불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 그래서 명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노련한 감각으로 유지하던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삼각동맹 체제를 빌헬름 2세가 파기해 버린 것이 독일 제국의 결정적 실책으로 꼽힌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러시아 제국이 동맹을 맺어 포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이가 좋지 않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을 잘 구워삶아 삼각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빌헬름 2세 즉위 후, 비스마르크를 강제로 은퇴시키고 외교체제를 개편하면서 러시아를 버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유일한 동맹 파트너로 선택한다. 이에 러시아는 당연히 서로 고립된 프랑스와 1894년에 러불동맹을 체결하며, 독일은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24] 영국 역시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충분히 약화되었다고 보고 1907년 영러협상을 체결한다.[25]
이에 따라 독일은 이러한 전략적 약점을 전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먼저 프랑스를 치고 나중에 러시아를 손본다!"는 슐리펜 계획을 구상한다. 결국 슐리펜 계획 자체가 1차 대전 개전 원인의 일부가 됐으니 1차 세계 대전 개전의 가장 큰 책임은 독일의 빌헬름 2세에게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1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책임은 독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닌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게 있다는 것이 오늘날 역사가들의 입장이다.
즉, 1차 세계대전은 각국의 이익의 충돌로 인해서 벌어진 전쟁이며, 특히 발칸 반도 내에서 영향력을 키우려는 러시아와 발칸반도의 영향력을 지키려는 오스트리아의 갈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같은 경우 당시 대통령이었던 레몽 푸앵카레와 외무 장관이었던 델카세가 반독감정을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당시 로마노프 왕조가 쇠퇴기를 걷고 있었으며, 멘셰비키와 볼셰비키가 활동했던 시기와 겹친다. 이러한 사정 등으로 국내 사정이 불안한 상태였는데 이걸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타켓을 찾던 러시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며, 프랑스 대통령을 초청하거나 총동원령을 내려서 독일을 자극시켰다. 프랑스 역시 이러한 것을 이용하여 독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뒤에서 전쟁을 부추겼다는 것이 사실이다.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영국 역시 본인들이 직접 나서서 개입한다면 단순 갈등이나 국지전으로 끝났을 이 전쟁이 영국의 관망 정책 즉 영광의 고립 정책으로 인해서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이 전쟁은 단순히 특정 인물과 국가의 책임이 아니라 유럽 내의 거의 모든 나라들의 책임으로 봐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5.2. 안온한 대처
존 키건의 1차세계대전에 의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영국대사와 러시아 차르가 최초로 세계대전의 불씨를 인식했다고 추측된다. 이들은 당사국들에게 회의를 제안하면서 이 사태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당시 들어오는 정보와 각종 제안들만으로 이미 각국 외교부 실무진들은 그로기 상태였다. 전화같은 현대 통신의 이기가 없던 시절의 한계. 가장 큰 문제는 독일 제국 수뇌부들은 카이저부터가 일단 요트타고 놀고 있었던 걸 시작으로 거진 휴가 중이란 것이다.
당시 세계대전은 그저 '가능성'이었고, 경제적으로만 보면 또 별개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벨 에포크를 거치며 산업혁명과 철도는 인구, 기술, 생산, 운수에 혁명적인 진보를 만들어냈다. 당시의 글로벌 경제 규제는 없다시피했고 국제 자본은 전세계를 오갔다. 1900~1910년 사이에는 평균적으로 연간 3억 5천만 파운드의 금액이 유럽에서 아메리카, 아시아로 오갔으며, 독일 철강 기업에 투자금의 상당수가 적국 프랑스의 자본이거나 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국제 전신 연합, 만국 우편 연합과 같은 온갖 국제협력을 위한 협의회들이 설치되어 가며 상호의존을 가속화시켰고, 이러한 거미줄과 같은 상호 교류는 세계대전과 같은 악몽은 그저 악몽일 뿐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26] 하지만 2차 대전과 마찬가지로 전쟁은 단순한 기대만으로 피할 수 없었다.
6. 발발 과정 - 7월 위기
위에 영상은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과정의 '''최악의 나비효과''' 및 막장스러움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전쟁 발발까지의 과정은 꽤 유명해서 외교사나 국제관계사에도 단골로 소개된다. 주요 열강들 내부에서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후일 연합국에서 전범으로 매도하던 빌헬름 2세조차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고, 막바지에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열강간 전면전쟁이 아닌 오스트리아-세르비아간 전쟁, 못해도 오스트리아-러시아간 전쟁에서 그치기 위해 일선의 외교관들을 중심으로 그야말로 처절한 전쟁회피 노력이 있었으나 정말로 드라마틱한 우연의 일치와 경우의 수 중 최악의 수가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했는데도 전쟁이 터진 건 어차피 터질 전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14년 6월 28일 벌어진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초강경모드로 나설 것이라는 것이 국제외교가의 공통된 관측이었다. 그러나 정작 '''오스트리아 제국은 對세르비아 최후통첩에 1달 가까운 시간'''을 소모한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이중제국 내부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세력이 상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다민족 특성상, 만약 세르비아와 전쟁을 한다면 (패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필연적으로 승리의 대가인 영토 획득을 하게 될 터인데, 그럼 자연스레 다른 민족이 제국의 구성원으로 추가되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던 이중제국 내부의 민족갈등에 불을 뿌릴 우려가 있었다. 특히, 이중제국 내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헝가리 왕국이 중심이 되어 개전에 반대했다. 그러나 세르비아에 유화적이었던 온건파 황태자가 암살당했다는 사실은 헝가리가 최후까지 개전 반대를 고집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대신, 헝가리는 이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매우 결정적인 단서조항을 내걸었고 제국정부는 이에 동의한다. 바로 '''전쟁 후에도 세르비아의 현 영토와 주권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상술했듯 이중제국의 복잡한 민족문제를 현상유지하면서도, 황태자가 암살당했다는 사실에 징벌을 외치던 제국 여론을 수용하는 타협책이었다. 이 사실이 외부에 공개되었으면 '''러시아와 독일이 줄줄이 참전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겠지만, 오스트리아의 유약함을 드러낼 수 있다는 이유로 대외적으로 비밀에 붙여졌다.
어쨌든 내부 합의가 도출됨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외부 환경을 살피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동맹국 독일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했으며, 두 번째로는 세르비아의 후견국인 러시아 제국과 그 동맹국 프랑스의 태도를 주목해야 했다.
독일의 절대적 지지는 의외로 쉽게 떨어졌다. 빌헬름 2세는 영국과 프랑스가 발칸 문제에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며, 러시아도 최종적으로는 위기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을 받고 전면적인 오스트리아 지원을 약속하고 3주 일정으로 뱃놀이하러 갔다. 독일 내부적으로 열강들이 발칸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이유는 매우 간단했는데, 사라예보 사건의 여파가 아직 가시기 전이었고 영국과 프랑스, 심지어 '''러시아 내부에서조차 불쌍한 페르디난트 대공, 세르비아 놈들이 쳐맞을 짓 하긴 했네'''라는 여론이 주류였기 때문이다. 다만 독일의 지지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강경책을 쓰건 유화책을 쓰건 오스트리아가 확고한 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태의 직접 당사자는 오스트리아였으니 이 요구는 당연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는 여러 가지 내부 문제로 인해 사라예보 사건 발발 후 10여일이 지난 7월 7일에야 제국 내각이 소집되었고, 여기서 각료들의 출신별, 민족별로 다른 정치적 입장 때문에 조율[27] 에 또 10여 일을 보내 7월 19일에야 통첩문이 완성되었으며 실제로 세르비아 및 유럽 열강에 이 통첩이 통보된 것은 7월 23일이었다. 통첩문이 완성되고도 오스트리아가 통첩 발송을 지연시킨 건, 그 시점에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와 프랑스의 외무장관이 러시아 제국을 방문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러시아 영토에 있는 도중에 통첩을 발송한다면 러시아-프랑스 간의 공동대응이 논의될 시간과 여지를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 군부에서 내각에 전쟁 준비가 전혀 안되어있다고 보고'''하면서 전쟁 준비를 할 시간을 벌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세르비아에 전달된 최후통첩은 세르비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항이 담겨진 내용이었다. 반(反)오스트리아 교육의 금지, 사라예보 사건에 연루된 세르비아 관리들의 체포 및 심문, 오스트리아 관리가 직접 세르비아 영토에 들어가 수사에 참여할 것 등이 그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48시간 내에 통첩에 대한 답문을 요구했다. 이는 사실 오스트리아의 계략도 있었는데 오스트리아는 당시 세르비아 정부 수반들과 세르비아 주재 외교관들의 행적을 감시하고 있었고 세르비아 정부가 대답하기 어렵고 다른 나라와 외교적 협의가 어려운 타이밍에 최후통첩을 들이밀어 세르비아가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리고 이 최후통첩이 세르비아에 도착했을 때 세르비아 수상은 지방 여행 중이어서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그나마 수도 복귀가 늦어 이미 최후통첩 48시간 중 24시간을 날려먹었다. 거기다 외교적 조언 역할을 해줄 강대국 외교관들도 우연의 일치로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러시아 공사는 사망[28] , 프랑스 공사는 병환으로 각각 공석 중이었으며 후임자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는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가 러시아를 방문하는 중[29] 이었기에 프랑스와 러시아의 대사 파견 일정이 지연됐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세르비아 공사는 이미 전쟁이 터지고 난 1914년 8월 26일에나 도착했다. 영국 공사는 자리는 지키고 있었지만 역시 병환.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이 때문에 유럽 열강의 권고는 상당히 늦게 세르비아에 전달되었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한결같이 "님이 잘못했네여. 걍 수용하고 살려달라 하셈." 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비관론이 지배적이던 세르비아 내각은 이와 같은 권고를 받아들여 오스트리아의 통첩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려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살려달라고 하셈'이라 했던 건 이유가 있다. "자기네 나라 국왕이나 태자가 저렇게 암살당하면 어쩔 텐가?"라는 것이다. 프랑스도 왕정이 철폐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고, 영국은 왕실이 존속 중이기에 오헝제국의 태자가 암살당한 사건이 남의 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통첩시한을 몇 시간 남기고, 러시아 주재 세르비아 공사로부터 "러시아가 우릴 지원한다!"는 희소식과 함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실질적인 낭보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사실 오스트리아가 조금만 더 빨리 행동했어도 러시아가 이런 신속한 결단을 내리긴 어려웠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사라예보 사건 이후 약 1달여를 허비하는 동안 니콜라이 2세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중관료들은 "설마 독일이 개입하겠어? 이참에 오스트리아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는 식으로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이에 세르비아 내각은 일제히 궐기하여 대 오스트리아 강경론으로 전환했으나, 러시아가 지원한들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라는 제국을 상대로 딱히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최후통첩 중 오스트리아 관리의 자국 영토 진입을 거부하고 나머지를 수용하기로 하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오스트리아에 통보했다.
하지만 백지수표를 내준 독일을(이것은 독일이 1차 대전을 피할 수 없는 원인이 되었다) 등에 업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의 제안을 무시하고 세르비아의 외교공문 접수를 거부하는 동시에 국교를 단절했다. 만약 세르비아가 전면적으로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무시한 것이었다면 오스트리아가 세계대전의 원흉 중 하나로 지목되었을 테지만, '''결국 세르비아가 전면적 수용을 거부한 탓에 세르비아가 욕을 많이 먹고 말았다.''' 애초에 최후통첩을 하게 된 원인인 사라예보 사건의 주범이 세르비아의 보스니아 합병을 지지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였으니.
결국, '''1914년 7월 28일에 오헝제국이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자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독립을 보호할 것을 선언하고 7월 31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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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애초 부분 동원령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특히 총동원령을 내리면 독일을 자극할 것이 명백하다는 것은 러시아 역시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 수뇌부들은 "부분 동원령 내리면 오스트리아 놈들은 총동원령 내릴 텐데 그러면 빠르게 군사적인 대응을 할 수가 없다." 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참전할 경우 세르비아 전선과 러시아 전선을 동시에 유지해야 하므로 병력면에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었으니 러시아가 부분 동원령을 내리더라도 오스트리아로서는 총동원령 수준으로 대응해야 했던 게 사실이었다.오스트리아 왕립정부는 주 베오그라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사를 통해 1914년 7월 23일 귀국에 통보한 요구에 대해 귀국이 만족스러운 회답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정부와 왕국정부는 스스로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도록 강요받은 상태에 놓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국은 무기와 힘에 의지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는 세르비아 왕국 정부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통보한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통보한 선전포고문 전보. 세르비아에서 제출하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링크
거기다 이 시기에는 산업의 발전과 철도의 등장으로 총력전이 가능해지면서 전쟁은 더 빠른 시간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달리기 경쟁으로 바뀌어갔고 적들이 유리한 곳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가야 한다는 생각이 당시 유럽의 군 수뇌부 모두를 지배했다. 결국 차르인 니콜라이 2세는 참모들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총동원령을 내렸다.
사실 이 과정도 복잡했다. 니콜라이 2세는 날밤을 꼬박새며 고민했고, 7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베를린 사이에서 니콜라이 2세와 빌헬름 2세간의 수많은 전보들이 오고갔다. 두 황제는 필사적으로 독일-러시아 전쟁을 막으려 애썼고, 특히 니콜라이 2세는 어떻게든 빌헬름 2세에게 '''이번 군사행동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가 대상'''이라고 항변했으며 빌헬름 2세는 그에 따른 진정성을 보여달라고 요구했고, 때문에 니콜라이 2세는 7월 31일 오전에 일시적으로 총동원령을 취소한다. 그러자 러시아 군 수뇌부가 궁전으로 달려와 동원령을 내리지 않을 경우 독일의 기습에 일패도지한다며 동원령 취소를 철회할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이들은 몇 시간에 걸쳐 짜르를 압박했고, 짜르는 결국 그들의 압박에 굴복하여 다시 총동원령을 내렸다.
러시아의 총동원령에 위협을 느낀 독일 제국은 뱃놀이 갔던 카이저가 허겁지겁 베를린으로 돌아오고, 독일 제국은 수많은 격론을 벌인다. 사실 이 때만 하더라도 독일 제국이 바로 전쟁을 시작 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했다. 당시 전 유럽은 사회주의에 기반한 노동계급 정당들이 득세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전쟁은 지배 엘리트층의 투쟁에 노동계급이 일방적으로 희생되는 것이란 시각을 견지하고 있어서 반전성향을 강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의 보수파가 러시아의 공포를 이용하여 가까스로 독일 사민당 지도자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하면서 추는 순식간에 기울어진다.
결국 강경파의 주장대로 이런 때를 대비해 만들었던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키고 8월 1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린다. 독일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수 있었던 건, 주 러시아 공사 및 독일 본국의 외무 관료들이 "너네 1904년 못 봤음?? 러시아는 전쟁 좀만 하면 혁명나서 망함여. 그래서 함부로 전쟁 못하고 설사 하더라도 혁명 때문에 GG칠거임." 이라고 호언장담을 했고 이를 빌헬름 2세 및 독일 수뇌부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30]
한편 빌헬름 2세는 양면전쟁의 위험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승리가 불확실한 슐리펜 계획 대신 영국이 보증하는 프랑스의 중립 약속을 받아낼 수 있는 쪽을 선택하여[31] , 몰트케에게 "당장 서부로 가는 병력 다 동부로 돌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러시아만 이기면 승리한다!" 라고 의기양양하게 외쳤으나 몰트케는 "폐하, 지금 병력동원 다 시작되고 철도 움직이는 중인데 여기서 병력 이동을 취소하고 동부로 옮기면 혼란에 빠져 재배치되다 자멸할 것입니다." 라면서 맞섰다. 빌헬름 2세는 그에게 "그대의 걸출한 삼촌[32] 이라면 나한테 다른 대답을 했을 것이다." 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으나[33] , 결국 대 프랑스 개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34]
결국 '''독일은 8월 1일에는 러시아에, 8월 3일에는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민, 아직도 전쟁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을 자신의 몸을 집어넣어서라도 막아보려던 온건파들은 많았다. 당장 독일의 대 러시아 선전포고문을 전달하러 러시아 외상을 방문한 주 러시아 독일 공사는 선전포고문을 건네지도 않고 외교장관과 자신의 유대관계, 인간적 친분을 언급하며 사정하고, 또 사정하고, 고개를 조아리고 무릎을 끓으면서까지 총동원령을 취소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 그럼에도 (총동원령을 취소할 권한이 없던) 외무장관이 그 요청을 거부하자 그제서야 선전포고문을 전달하며 난 러시아가 너무 좋았다, 어찌하여 이런 관계가 되었느냐, 짐을 싸 귀국해야 하는데 도저히 짐을 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며 울먹였다.
프랑스에 대해서는 빌헬름 2세와 외교부처 모두 삼국동맹-삼국협상간 대립이나 슐리펜 계획때문이라도 선전포고는 피할 수 없다고 인식은 했지만, 적어도 마지막으로 협상은 해보자며 독일의 대 러시아 전쟁에 대해 프랑스가 중립을 지켜줄 수 있냐는 의사를, 그리고 영국에게도 독일-프랑스 사이를 중재해줄수 있냐는 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군부 및 강경파들의 경우 1870년의 원한으로 이 제의를 묵살하자고 했고, 온건파들의 경우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파기했다가 프랑스가 외교적 신의를 깨트리고 다시 과거처럼 고립될 수 있다는 생각에 협상 주장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프랑스가 아무 것도 안한건 아니었다. 러시아가 동원령을 선포하기 전, 프랑스에서도 전쟁을 할 의사가 없다는 표시로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병력들을 10km 이상 후퇴시켰다. 그러나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독일도 이에 맞대응하면서 말짱 도로묵.
결국 '''8월 4일에는 프랑스가 의회 만장일치로 독일과의 전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대로 벨기에를 침략'''하는데 사실 벨기에 침공 직전에도 빌헬름 2세는 다시 한 번 몰트케에게 "벨기에 공격하면 영국이 참전한다. 벨기에를 피해서 공격해라!" 라고 명령했으나 몰트케는 "안됩니다. 병력집결부터 기동, 전투까지 이미 계획이 짜여 있어서 벨기에를 넘어가지 않는다면 계획이 다 무너집니다." 라며 펄쩍 뛰어서 어쩔 수 없이 독일은 벨기에를 지나가게 된다.
당시 영국은 느닷없는 발칸의 분쟁이 전 유럽을 휩쓰는 대규모의 전쟁으로 커지려고 하자 기가 질려서 직접적 참전을 꺼리는 중이었으나[35] '''영국이 보증한 국제적인 벨기에 중립이 슐리펜 계획에 의한 독일의 침략으로 무시되면서 참전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 결국 독일에 맞서 참전하게 된다.'''
또한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는 아닐 것 같던 일본도 칭다오 무너트린 거만 빼면 별로 싸운 건 없지만 영일동맹과 영국의 지원요구에 근거해서 8월 28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했다.
이로서 당시 주요 열강국가 중 동떨어진 아메리카 대륙에서 혼자 놀고 있는 미국과 삼국 동맹을 깨고 중립을 선언해버린 이탈리아 그리고 열강은 열강이지만 내부적인 문제가 많아서 참전은 무리라고 평가되던 오스만 제국을 제외하고 모조리 대전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고 이 세 나라도 결국 시간 차이를 두고 참전하게 되면서 결국 모든 열강 국가들이 얽힌채 치고 박고 싸우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참고로 오스만 제국의 경우 영국의 병크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오스만 제국을 전쟁통으로 밀어넣은 범인이 바로 윈스턴 처칠이다. 우리가 아는 그 처칠 맞다.(...) 그리고 그 처칠은 오스만 제국을 적국으로 만들어버린 것을 메꾸겠다[36] 며 처칠 정치생명을 고자로 만들어버린 대참사를 일으킨다.
사실, 인척관계로 얽혀있던 각 참전국의 군주들은 내심 전쟁을 피하려고 노력했다.[37] 하지만 높은 수준으로 산업화된 국가들은 이미 군주들이 일일이 통제하기는 어려운 수준으로 복잡해졌으며, 민족주의의 열풍은 군주들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해 있었다.[38] 이미 군주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국가를 제대로 제어할 수 없었고, 오히려 군주들의 어설픈 조치 때문에 내부에서의 모순과 문제점은 더욱 커졌다.
6.1. 자원병 열풍
1차 세계 대전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역사상 손꼽힐 정도로 크고 끔찍한 전쟁에 자원해서 입대하는 젊은이들이 넘쳤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언론에서는 청년들에게 군대로 입대할 것을 권했고 "Your country needs you", "I want you" 등 유명한 문구의 모병 포스터들이 거리에 붙여졌다. 물론 전쟁에 대해서 비판적이며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았다.[39] 하지만 전쟁을 피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겁쟁이나 매국노 등으로 몰리기 일쑤였고 심지어 프랑스의 장 조레스처럼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주변 또래들은 자원해서 군대로 입대하는데 건강한 청년이 입대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기란 쉽지 않았다.
거기다 당시에는 낭만주의적 사회현상이 나돌던 시대(벨 에포크, 1871 ~ 1914)였다. 시나 소설에서도 나폴레옹과 같은 전쟁 영웅들의 멋진 서사시를 나타내었지, 전쟁의 참혹함이나 그속에서 죽은 병사들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젊은이 들에게 이러한 낭만주의는 전쟁을 참혹하고 잔인한 것이 아닌, 단순히 영웅놀음이나 성인식, 모험 등으로 각인되었다.
또한 전쟁에 대한 지나친 낙관도 있었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보불전쟁 이후 40년 동안이나 이어진 벨 에포크 시대의 길어진 평화로 인해 전쟁에 대해서 다소 낭만적인 생각이나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100여년 간 전 유럽대륙을 아우르는 대규모의 전면전도 없었던데다 전쟁을 치르더라도 대부분 단기간 내에 좀 치고 받으면서 끝나는 수준이었다.[40]
그래서 시대는 산업혁명과 병기의 발달로 인해 과거와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전쟁관은 여전히 중세시대, 전근대적이였다. 19세기만 하더라도 군대라고 하면 금 장식이 달린 유니폼을 입고 포화와 총격에도 꿋꿋히 전진하는 라인배틀로 상징대는 명예와 자부심이 느껴지는 것이다. 특히 중세 유럽의 전쟁의 양상과도 1차대전은 너무나도 달랐다. 과거 유럽왕족은 친인척으로 얽힌 경우가 많았고, 전쟁을 스포츠처럼 여기는 경향이 많았다. 그래서 중국의 중원통일처럼 나라 대 나라가 존폐여부를 걸고 싸우는 경향이 아닌 몇번의 큰 전투이후 판도를 본뒤 조약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평민들에게도 전쟁은 기사들이 출진하고, 영주가 바뀌더라도 거기서 그칠뿐, 체감하는 개인적인 일은 없어 크게 상관있지 않은 이야기들이였다.
그러나 20세기가 들어서면서 더이상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였다.유럽에서 애국심과 민족주의 열풍이 강하게 불던 시기로, 또한 보불전쟁에서 징집된 병력을 철도로 얼마나 빨리 집결시키는지가 승리의 큰 요소가 됨이 증명되었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도 모병과 애국심 고취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전쟁터에 나아갔다. 냉병기시대와 달리 총이 개발되면서 더이상 숙련된 병사가 필수적이지 않았다. 1명의 숙련된 기관총 사수보다 5명의 초보 기관총 사수가 더 압도적이였다. 거기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생산이 가능했긴 때문에 물자또한 충족시킬수 있었다. 이로인해 영주 대 영주의 돈(전쟁수행유지용) 대결이 아닌 국가 대 국가의 국가 총동원개념이 되었다.
사실상 오랫동안 유럽 본토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탓에 유럽인들에게 전쟁이란 기껏해야 머나먼 식민지에서 낙후된 토착민들을 우월한 기술력이 적용된 무기로 학살하는 경험에 지나지 않았다.[41] 이렇게 이미 식민지가 된 지역들은 말 할 것도 없었고, 중국도 의화단 운동 때 열강들의 첨단 무기 앞에 자칭 '''총알을 막아내는 무술'''로 대항했다가 처참하게 학살만 당했다(...)
이렇게 조국의 군대가 타 국가를 손쉽게 혼내줄 것이라는 생각에 흥분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급속도로 발달하던 기계화된 무기들이 자신들을 향해 대량으로 사용되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이 발생할 것인가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1910년대 초기에 벌어진 몇 차례의 국가들 간의 형식적인 대치만 하는 모습은 이러한 착각을 더욱 부추겼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가 식민지 대결을 하면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졌는데... 그러다 보니 많은 청년들은 "전쟁.. 그까이거 뭐 그냥.. 대충 이번에도 적당히 그냥 대치만 하다가 끝나겠지?" 라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결국 전쟁 발발 초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의 모병소에 국가에 대한 거룩한 의무를 수행하고 살아서 돌아오면 전쟁영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한 지원병 청년들이 미어터졌다. 하지만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할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갈지 제대로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전쟁이 아무리 길어봐야 3개월 정도면 끝나고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지나친 낙관에 차 있었다.[42] 즉 낭만주의와 애국심에 빠저든 젊은이들이 "강한 우리나라의 군대가 적군을 물리치고, 나는 그곳에서 영웅처럼 싸워 훈장과 포상을 받고 제대한다" 라는 매우 비현실적인 상상에 빠져 자원입대 한 것이다.
'''물론, 그들 중에서 살아남은 일부는 진짜로 전쟁영웅이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를 무려 4년도 넘게 버텨낸 뒤에야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돌아온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으며, 결국 이들은 끔찍한 후유증 속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쟁의 끔찍한 기억을 잊지 못했다.[43] 또한 자신들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자신들에게 돌아오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생존자들 중 일부는 그대로 군대에 말뚝을 박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들은 '''또''' 세계 대전에 나가야 했다. 말뚝 외에도 국민돌격대, 임관, 정계, 재입대, 추축국의 침공에 대항한 저항운동 등으로 2차대전에도 참전한 1차대전 참전자도 많다.
7. 전쟁의 전개
제1차 세계 대전의 경과를 나타내는 영상. 유럽 외에 아프리카, 아시아 전선가지 나온다. 이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온 2014년 7월 27일은 1차 대전이 발발한 지 100년-1일이 되던 날이다. 사용된 음악과 육성에 대한 정보는 영상의 끝에 나온다.
전쟁의 경과를 서술하되 대부분의 전투에 전용 항목이 있는 만큼 요약해서 서술해주십시오.
7.1. 전쟁의 시작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왕국의 민족주의 조직 검은 손 소속의 단원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 부부가 암살당하면서 이에 분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함에 따라 제1차 세계 대전이 열리게 된다.
세르비아 침공 참조.
그 뒤 세르비아의 보호를 이유로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독일은 러시아에게 총동원령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하고 무시되자 다음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사실상 '''최초로 주변국을 침공한 것은 독일이었다'''. 독일은 서쪽의 프랑스를 최대한 빨리 굴복시켜 동쪽의 러시아 제국 방면으로 집중해 전쟁을 수행한다는 내용의 슐리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고, 1914년에 8월에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8월 2일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3일에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한 뒤 중립국 벨기에가 독일군의 통과를 거부하자 4일부터 침공해 점령한다.[44] 영국은 중립을 표방했었으나 영국이 독립을 인정했던 벨기에의 중립이 무시당한 것을 이유로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 한 뒤 프랑스로 지상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하였으며 발칸 반도의 국가 등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전포고를 교환한다.
8월 7일부터는 독일군이 프랑스 영토 안에서 국경 전투를 열어 승리해 파리 50여km 앞까지 진격할 정도로 선전한다. 한편 러시아가 급하게 8월 중순부터 독일의 동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를 공격, 갈리치아의 중심 도시인 렘베르크를 비롯한 갈리치아의 상당 지역과 동프로이센의 국경 지대 일부를 점령했지만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반격당해 큰 피해를 입고 동부전선 우위를 내줬으며 오스트리아군도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린다. 하지만 9월의 마른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프랑스+영국 연합군에게 저지당하며 진격의 힘을 잃고 주저앉게 된다. 결국 독일은 계획대로 프랑스를 조기에 굴복시키는 것에 실패하게 되었고 우려했던 대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양면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지에서도 유럽의 식민지였던 지역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독일과 영국 식민지에서는 종전까지 현지 병력들의 전투가 계속 일어났다. 8월 말에 일본 제국도 영국과 함께 독일령이었던 칭다오를 침공해 점령했다. 태평양 지역에 있던 독일 함대는 본국으로 귀환을 시도했지만 영국 함대의 습격을 받다가 포클랜드 해전에서 괴멸되었다.
7.2. 참호전의 수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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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진격할 수 없게 된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프랑스 방면의 점령지역 유지와 방어를 위해서 참호를 팠고 연합군도 독일의 진공을 저지하기 위해서 참호를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상대편 참호의 측면으로 계속해서 기동을 되풀이한 결과 끝내 참호선이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늘어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가장 끔찍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참호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나라에도 참호전이란 교리가 없었으며 의도된 전쟁 양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관총, 야포, 철조망 등 방어에 유리한 무기는 발달했으나 참호 돌파를 위한 효과적인 무기가 없었기에 양측은 효과적인 전진을 하지 못하고 인명피해만 늘어가는 소모전을 치르며 대치하게 된다. 대전기간 그 어느 쪽도 참호전 양상을 타개하는 데는 실패했다.
의외로 러시아 제국군이 동맹국을 상대로 참호 돌파를 많이 했었다. 그러나 상대는 독일이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동부전선에선 참호전을 중요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서부전선에선 끝없이 이어지는 참호로 요새화 된 지역은 우회해서 돌아갈 길도 없었고, 참호에는 포격도 썩 효과적이지 않았다. 결국 대량의 포격을 적의 참호에 가한 후 정면으로 병력을 돌격시키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적의 기관총과 철조망, 그리고 포격 때문에 아군은 적의 참호에 가기도 전에 전멸하기 일수였으며 설사 적의 참호를 점령하더라도 그 앞에는 적의 제2, 제3의 참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부전선을 제외한 동부전선이나 발칸, 캅카스, 중동 전선에서는 참호전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 자체가 없었다. 이쪽에서는 철도와 기병을 동원해 대규모 기동전을 펼치고 있었다.[46]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양상이 판이하게 달라진 이유는 병력밀도가 차이나는 것이 컸다. 서부전선은 전 전선에 걸쳐 병력이 빽빽하게 들어차 병력밀도가 낮은 취약점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참호전이라는 일종의 공성전 양상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동부전선은 흑해에서 발트 해까지의 거대한 전선이 형성되다 보니 참호에 의존한 고수방어를 하려다가는 쉽사리 측면돌파를 허용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보병과 기병에 의한 기동전 양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이 시점까지 눈치만 보고 있었다.[47] 그러나 1914년 7월에 영국에서 만들어지던 오스만 전함 두 척을 동맹국 병기라는 이유로 영국이 부당하게 압류하자[48] 오스만의 영국에 대한 여론이 나빠졌으며 8월에 독일은 오스만에게 비밀리에 동맹을 추진하고 전함 두척을 양도하고 군사적으로 지원해줘 환심을 산다. 그리고 오스만 해군 소속이 되었음에도 독일 해군이 지휘하던 이 두 전함은 10월 말에 러시아의 세바스토폴 항구를 기습 공격해 버렸고 러시아는 11월에 오스만 제국에게 선전포고하여 캅카스 방면을 공격하기 시작해 오스만도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곧 중동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영국령 인도 제국도 자치권을 강화시켜준다는 영국의 꼬임에 넘어가 영국군에 가세한다.[49]
1914년 12월, 대부분의 군인들이 집에서 보내리라 생각했던 크리스마스가 다가 오자 서부전선에서 대치하던 연합군과 독일군은 암묵적으로 휴전한 채 각자의 참호에서 조촐한 축하행사를 가졌으며 기적적으로 서로 총을 거두고 적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해가 가자 적어도 대놓고는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7.3. 정체되는 전쟁 상황
1915년 1월에 오스만 제국과 독일은 영국과 영국령 인도의 연결을 끊어버리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공격하였으나 점령에 실패한다.
2월부터 독일은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고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실행해 협상국의 상선 등을 무차별적으로 격침시킨다. 하지만 5월에 영국의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가 격침되며 미국인 128명이 죽자 미국의 참전여론이 거세졌으나,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취하하기로 하여 미국도 이를 인정하고 화를 잠재운다. 하지만 이 작전은 꽤나 효율적이어서 영국의 해상력을 약화시키고 경계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이후 말을 바꿔 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감행하여 미국의 여론이 다시 악화되었으며 하술할 치머만 전보사건으로 인해 몰락한다. 자세한건 각각의 항목 참조
영국은 꽉 막힌 서부전선의 교착을 풀어줄 돌파구를 찾을 겸, 독일에 고전하면서 오스만까지 상대하던 러시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프랑스와 연합한 함대를 보내 2월에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려고 했으나[50] 거센 저항 때문에 실패했고 4월부터 다시 지상군을 동원한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실행했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의 상륙작전이란 결과를 본 채 이듬해 1월에 물러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 일은 윈스턴 처칠의 가장 큰 흑역사가 되었다.
한편 4월의 협상국의 공세를 조용하게 지켜보던 이탈리아 왕국은 결국 삼국 동맹을 공식적으로 배신하여 협상국에 가담한 뒤 바로 5월에 전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51]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대를 공격하자 오스트리아는 고전하게 된다. 이탈리아 - 오스트리아 양측이 '''무려 12번'''에 걸쳐 지리한 공방전을 펼치는 이손초 전투의 시작이었다.
동부전선에서는 5월부터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갈리치아 방면에 대한 공세를 펼쳐 그 해 6월 렘베르크를 탈환하였으며 곧이어 러시아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개시, 8월에 독일군이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의 중심 도시인 바르샤바를 점령한 데 이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코브노, 빌나, 핀스크 등 러시아 서부의 주요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할 정도로 독일이 우위를 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일이 러시아 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기에는 여전히 러시아의 병력은 많았으며, 거리도 너무 멀었고 애초에 동부는 독일의 양면 전쟁에서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10월에는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오스트리아가 고전하던 세르비아 방면의 전투는 물론 발칸 반도 지역의 정세가 동맹국에게 유리하게 넘어온다.
1916년이 되자 서부전선의 전투는 격화되지만 상황은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특히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서만 200만명이 살상되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지만 전황은 크게 변한게 없었다. 다만 베르됭 전투 이후 독일은 전력이 약해져 서부전선에서 방어 입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독일 해군은 5월에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기 위해 영국 해군과 유틀란트 해전을 벌여 상대적으로 유리한 전과를 올렸지만 애초에 체급이 다른 해군이었고 봉쇄는 그대로였다. 이후 독일은 드레드노트 함대전을 포기하고 잠수함만 바라보게 된다.
또한 이시기에 포르투갈이 1차 대전에 협상국 측에 참전했다. 당초 포르투갈 정부는 중립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1916년 오랜 동맹이었던 영국이 포르투갈의 항구에서 독일 배들의 나포와 화물 압수 등을 요구하자 독일은 포르투갈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포르투갈은 중립을 포기하고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서부전선에서 포르투갈은 영국과의 협의 끝에 영국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보병 55,000명과 포병 1,000명이 참전했으며 그 중 전사 8,145명, 부상 13,751명, 실종 및 포로 12,318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으며, 80척의 포르투갈 국적 선박이 독일 잠수함대의 공격으로 침몰했다. [54]
오스트리아-헝가리는 2월에서야 세르비아 왕국을 힘겹게 점령했다. 게다가 6월에는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독일 동맹군을 상대로 브루실로프 공세를 펼쳐 오스트리아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약체라는 것을 명확히 드러냈다. 하지만 러시아 역시 여전히 엄청난 병력을 동원하고 있었지만 독일군에 비해 전력이 열세였으며 피해는 꾸준히 누적되고 있어 1916년 말까지 500만의 병사가 사상당했고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국내의 불만은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도 러시아와의 캅카스 전선에서는 러시아한테 패하며 쭉쭉 밀려나고 있었고 중동의 아랍 부족들이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을 원하고 있었던 것을 영국이 지원하여 6월에 아랍 반란을 일으켜 예상 외로 잘 버티고 있던 중동 전선에서도 수세에 몰린다.[55]
8월 27일, 그동안 중립을 표방하며 어느 편에 설지 간만 보고 있던 루마니아가 브루실로프 공세의 성공을 보고 협상국으로 참전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한다. 초반에는 카르파티아 산맥에 대한 오스트리아군의 방비가 빈약했던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으나, 양적인 병력 증강에서 비롯된 질적 부족과 동맹국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루마니아군은 곧 밀려났고 전 국토가 점령당하며 1918년 5월 7일 동맹국에 항복했다.(부쿠레슈티 조약)[56]
전쟁기간 동안 서부전선의 참호전을 타개하기 위해 숱한 신병기와 전술이 개발되었다. 현재까지 사용되는 거의 모든 보병전술의 기초가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전쟁이 시작되던 1914년에는 어느 국가의 병사도 철모를 쓰지 않았으나 점차 너나할 것 없이 채택하기 시작한다.[57] 독일은 1915년 4월부터 시작된 2차 이프르 전투에서 살상용 독가스를 사용해 효과를 봤고,[58] 6월에 화염방사기를 첫 배치했다. 영국은 전차를 발명해 마크 1이 솜전투가 펼쳐지던 1916년 9월에 실전 투입되었다. 영국의 전차를 보고 프랑스에서는 생 샤몽 을 개발했고 전쟁 후기에는 세계 최초의 경전차인 르노 FT-17을 만들었다. 전쟁 최후기에는 A7V 슈투름판처바겐과 그로스캄프바겐이라는 물건이 독일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신병기들로도 참호전의 양상을 궁극적으로 타개하지는 못했다. 독가스는 사용조건에 제한이 있는데다 화학전 방호장비가 보급되면서 효력이 감소했고, 전차는 가장 획기적인 발명이었으나 초기 전차는 성능이 부족한데다 전차 운용에 대한 노하우가 없어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바람에 참호전을 궁극적으로 타개하는 데는 실패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의 전차는 거의 움직이는 엄폐물 정도였다. 전쟁 말기인 1918년에는 MP18 등의 기관단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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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의 군사적 활용의 발전도 두드러진다. 전쟁 초에는 단순히 정찰, 그리고 상대 국민에 대한 테러 목적으로 미미한 폭격이 있었으며, 비행선을 이용한 폭격이 시도되기도 하지만, 공랭식 기관총과 동조식 발사장치의 개발로 1-2정의 기관총을 가진 빠르고 민첩한 전투기가 상대의 기구, 비행선, 정찰기를 격추시켜 나갔으며, 이에 따라 폭격용 비행선은 빠르게 사라지고 보다 빠르고 크기대비 폭장효율이 좋은 대형 폭격기가 등장하여 상대국의 도시를 노리게 된다. 이에 따라 자국 방공망 구축보다 효율적인 항공기 운용을 위해 1918년부터 영국 공군이 세계최초로 결성되었으며, 다른 참전국들도 따라간다. 대전 말 전략폭격의 이론이 영국의 트렌차트, 미국의 미첼, 이탈리아의 두헤에 의해 서서히 탄생하기 시작한다.
7.4. 미국의 선전포고와 러시아 혁명
독일은 2월부터 다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한다. 결국 이것과 독일의 테러들[59] , 치머만 전보 사건 등을 견디다 못한 미국은 4월에 독일 등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동맹국은 시한부 인생이 되었다. 하지만 급하게 징집한 병사들의 훈련 등을 이유로 미국은 전쟁 참여에 조심스러웠고, 6월부터 프랑스에 훈련이 끝난 소규모의 미군 부대가 도착하기 시작했지만 1918년 5월까지도 큰 교전을 하지 않았다.
1917년에 들어서 러시아 2월 혁명이 터져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고 러시아의 체제가 전복된다. 하지만 새 정부는 여전히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하려 하였으며, 내부적 불만 요소는 그대로였기에 사회에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감돈다.
1917년 3월에 영국군은 오스만 제국의 도시였던 바그다드를 점령하였고, 곧 메소포타미아의 대부분을 손에 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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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4월에 독일은 망명 중이던 레닌을 기차에 태워 러시아로 귀국시켰다. 레닌의 혁명이 성공하면 독일과의 전쟁을 그만둘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이렇게 러시아의 내부 상황이 혼란으로 치닫자 프랑스와 영국은 초조해졌고, 서부전선에서 4월부터 연이은 연합군의 대공세가 펼쳐지며 7월의 치열한 파스샹달 전투까지 펼쳐졌지만 대량의 인명이 소모된 것에 비하면 작은 승리였으며, 전략적으로 변화를 가져오진 못했다.
한편 그리스 왕국은 전쟁 발발 이후 계속 중립을 지키고 있었는데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와 협상국으로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갈등과 그로 인해 둘로 쪼개진 국민 여론, 그리고 세르비아 전선의 패전으로 동맹국의 추격을 피해 그리스 영내로 피난한 세르비아군과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테살로니키에 진주한 영불 협상군, 그에 대응하여 콘스탄디노스의 묵인을 받아 그리스령 마케도니아로 진주한 불가리아군으로 인해 그리스 역시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급기야 총리 자리에서 해임된 베니젤로스는 지지자들을 이끌고 협상군이 점령한 테살로니키로 가 임시정부를 세우고 수도 아테네에서는 양측의 지지자들이 대규모 시가전을 벌이고 베니젤로스를 지지하는 영불 협상군은 그리스 북부와 도서 지역을 점령하여 콘스탄티노스를 압박하는 등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마저 혁명으로 물러나자 버틸 곳이 없어진 국왕 콘스탄디노스가 퇴위하고 둘째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했으며 신정부를 이끄는 베니젤로스는 6월 30일 동맹국에 선전포고하면서 그리스 역시 협상국 측으로 참전한다.[60]
한편 이손초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의 소모전에 압박을 느끼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 전선에만 집중하려고 동부전선에서 발을 뺀다. 이후로 사실상 동부전선은 독일 혼자 담당하며 이탈리아 방면의 전선마저도 독일이 지원해야 하는 눈물겨운 상황이 펼쳐진다. 그러나 10월에 펼쳐진 카포레토 전투에서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함께 이탈리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 전투로 전선이 이탈리아 영내로 옮겨가고 이탈리아가 방어전으로 돌아서자 독일은 이탈리아 전선을 마무리하고 서부전선으로 집중한다. 하지만 1918년에 들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를 협상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마지막 여력을 쥐어짜 이탈리아에게 몇 차례 공세를 감행했으나 수십만의 사상자만 낸 채 실패하고 만다.
1917년 10월 혁명의 여파로 러시아 체제가 전복되고, 11월에 레닌은 러시아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던 전쟁을 멈추기 위해 독일과 강화한다.[61] 독일은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프랑스나 영국은 큰 위기감을 느꼈지만 사실 독일 역시 이미 인적 경제적 손실이 누적되어 국가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러시아에도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고, 러시아 내전이 시작된다.
1918년 1월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평화 14개조를 발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고 이는 핍박받는 민족과 국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나[62]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에게는 종전 후 분열을 가져오는 치명타가 된다.
7.5. 동맹국의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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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3월, 독일의 경제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에 상황을 반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쥐어짜 서부전선에서 루덴도르프 공세를 펼쳤으나 심각한 피해를 입고 얼마 못 가 주저앉게 된다. 이 공세에서 결국 미군도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5월에는 미국이 독일을 상대로 한 첫 승리를 거둔다.
결국 1918년 8월부터 미군은 하루에 만 명씩 프랑스로 들어오게 되고, 90만명의 미군을 포함한 연합군은 바로 독일을 상대로 백일 전투를 펼쳐 전례없던 속도로 전선을 밀어내며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 주요 방어선인 힌덴부르크 선을 붕괴시킨다.
결국 희망이 사라진 동맹국들은 내부적으로 패배에 대해 거론하기 시작한다. 9월에는 불가리아 왕국이 협상국과 휴전했으며 10월에는 오스만 제국이, 11월에는 혁명이 일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협상국에 항복하였고 독일도 킬 군항의 반란을 시작으로 반정부운동이 다발적으로 일어난 11월 혁명으로 정부가 무너져 같은 달에 협상국에 항복하였다.[63]
항복 직전의 독일은 전선의 병사들도 굶주림에 못 이겨 연합군 참호를 습격해 음식을 약탈해 오고, 후방의 민간인들은 순무 말고는 먹을 게 없을 정도로 굶주리고 있다가 마침내 전선과 후방에서 균열이 벌어지고 있었다. 즉 한 1년 정도는 더 버티더라도 패전을 면할 길은 전혀 없었다. 이는 힌덴부르크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시 계획경제에서 군수물자 생산에 너무 치중하다가 식량 생산 등의 기본적인 요소에서 일이 틀어진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경제 전체가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독일의 경우 오히려 관료들이 자원을 비교적 유능하게 잘 배분해서 가용한 모든 자원을 완전히 탕진할 때까지 끌고 오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식량이 풍부하다고 알려진 프랑스도 독일보다 먼저 그러한 상황에 직면한 적이 있는데, 미국의 식량 원조로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이 때 식량 원조분이 4일만 늦게 도착했으면 프랑스 전역에서 식량이 고갈될 상황이었다. 물론 이것은 춘궁기의 일시적인 상황으로, 이는 프랑스가 식량이라는 요소를 경시하다가 문제를 겪은 것을 보여줄 뿐 독일과 달리 프랑스는 전반적인 농업생산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전체적인 인구수와 공업생산력에서 독일에 심각하게 밀렸던 프랑스가 유일하게 비교우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압도적인 농업생산력이었다. 그러나 그런 프랑스조차도 식량을 자급자족할 정도로 충분히 생산하지는 못해서, (전쟁 중이니까) 미국은 1914~24년 사이에 프랑스에 842만 톤이나 되는 식량을 보냈다. 이를 보면 외부 지원 없이 붕괴하지 않고 버틴 것에서 독일 관료들은 오히려 경제를 잘 운영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없는 자원을 창조할 능력이 있을 리는 없었다.
물론 협상국의 상태도 막장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미국을 포함한 신세계와의 교역이나 지원으로 물자를 보충할 수 있었다. 협상국은 전반적인 경제 운영에 훨씬 여유가 있었고 여기에 미국 병력까지 쏟아져 들어오는 상태라 독일은 항복하는 길 밖에 없었다.
다만 독일은 항복하는 순간에도 프랑스 영토 안에서 서부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국 영토에 적군을 한 발짝도 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맞은 패전은 많은 독일 국민들에게 분노와 의심을 안겼으며 일명 배후중상설이라는 도시전설이 폭넓게 퍼지게 된다. 이것이 후일 히틀러와 파시즘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7.6. 종전
1919년 6월에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반영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고, 생제르맹 조약, 트리아농 조약, 세브르 조약, 뇌이 조약이 체결되어 패전국들은 많은 영토가 민족별 국가로 나눠져 독립해 버렸다.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협상국과 신생 독립국에 일부 영토를 할양하고 가지고 있던 식민지도 토해내야 했다. 독일 황실과 오스트리아 황실도 무너졌고 오스만 제국도 사실상 멸망했다.
러시아 제국은 정부가 혁명으로 붕괴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조기에 전쟁에서 이탈한 탓에 협상국으로 참전했음에도 승전국 반열에 들지 못하고 도리어 발트3국이나 핀란드, 폴란드 등을 독립시키고 루마니아에 영토를 할양해야 했다.
승전국인 프랑스, 영국은 식민지를 더 가지거나[64] 영토를 일부 할양 받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얻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트리에스테(트리에스트)를 포함한 이스트리아 반도와 쥐트티롤을 할양 받고 지중해랑 터키 쪽에 세력을 폈으나 가장 원했던 달마티아를 얻지 못하는 등 생각외로 많은 이득을 얻지 못해 이에 불만을 품은 국민이 파시즘을 지지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에서 빼앗은 땅을 합쳐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건국하였다.
루마니아는 전 국토가 동맹국에게 유린당하고 동맹국에 항복하는 치욕을 겪었으나 전쟁이 협상국의 승리로 끝나자 오스트리아로부터 부코비나, 헝가리로부터 트란실바니아, 불가리아로부터 남부 도브루자를 얻고 여기에 러시아 제국이 통치하던 베사라비아까지 추가로 획득하여 영토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일본은 1차 대전으로 경제호황 및 독일의 아시아, 오세아니아 식민지랑 중국의 이권들을 조금 획득하였지만 역시 대공황으로 불황을 겪자 군국주의가 대두하였다.
우드로 윌슨은 '평화 원칙'을 내세우며 베르사유 조약 1조에 국제연맹의 창설에 관한 조항을 넣었으며 1920년 1월에 첫 국제연맹 회의가 런던에서 개최되었고, 이것이 제1차 세계 대전의 공식적 종결이 되었다.
8. 피해
인명 피해가 상당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유래없는 인명피해를 발생시킨다. 세계적으로 900만 명의 사망자, 2,700만 명의 부상자, 600만 명의 불구자 (참전자들 중 28%는 목숨을 잃었다), 400만 명이 넘는 전쟁 미망인과 800만 명의 고아를 만들었다. 이러한 인명 피해는 남녀 비율 불균형, 한 세대의 상실 (통칭 "잃어버린 세대") 등 사회에 엄청난 불안정을 초래한다.
2차 대전을 제외한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케일에 비해 인명피해가 독보적이진 않다. 물론 군인들은 엄청나게 죽어갔지만 전쟁의 규모에 비해서는 민간인의 피해가 매우 적었기 때문. 사상자로 본 전쟁의 순위.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참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참호전의 악몽 때문인데, 1차 대전은 방어화력이 공격화력을 압도하여 우회기동 자체를 소멸시킨 역사상 매우 드문 사례의 전쟁이었고 때문에 서로 적국의 영토 깊숙히 진군하지를 못한채 국경지대에서 군인들끼리 밀당만 죽어라 반복했기 때문이다. 반면 제2차 세계 대전은 더 발전된 전차와 장갑차, 급강하폭격기가 참호전을 타개하여 대규모 병력이 적국 영토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고 전략폭격기로 대표되는, 아예 전선 너머의 후방으로 날아가 폭격을 날릴 수 있는 항공기술까지 발전, 여기에 인종주의-민족주의까지 결합하여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 조직적인 학살까지 빈번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피해가 컸는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참전국들의 경제적 상황은 크게 악화되어 있었다. 군비를 세금, 금 매매와 차용금으로 마련했기 때문에 참전국들의 국가채무는 굉장한 수준에 이르렀다. 유럽 각국에서 평균 350%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을 겪었고, 가장 문제가 심각했던 독일 바이마르 정부의 마르크는 3년 만에 1억 배 오르는 등 휴지조각으로 전락해버렸다. 지금까지 가장 큰 부채를 안고 있었던 미국만이 모든 부채를 해소하고 제일의 대금국가가 되었다.
9. 영향
홉스봄의 표현처럼 사실상 20세기의 모든 것이 이 1차 세계 대전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만큼 제1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20세기는 1914년에 시작되었다."'''
여기에 또 다른 문명의 발달인 국가 관리 체계의 발달과 민족주의에 의거한 국가 총력전으로의 변화는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대량의 인원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는 앞서의 요인 등으로 도리어 인적 손실을 극대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9.1. 인문학적
인문학적으로도 중요한 시기였는데 (식민지 지역 같은) 야만에서 벗어난 문명국을 자처하던 유럽이 그 어떤 야만인들보다 더 끔찍한 전쟁을 벌였던 것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는 문명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낙관하던 분위기는 문명의 이기들을 이용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통해 박살이 나고 만다.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전쟁에 자원하던 유럽의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생지옥이었으며 1차 대전 이후로 유럽 문화는 상당 부분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가 흐른다.[65]
'''염전(厭戰)사상''' 확산에도 일조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가공할 피해는 대전 직후 대부분의 국가에서 염전 사상을 확대시켰다. 전쟁에 대한 가공할 공포는 열강들에게 더 이상의 1차 대전과 같은 재앙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이 염전 풍조는 유럽 사상 유례없는 군비축소 조약과 부전조약을 체결하는 계기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영-불의 독일에 대한 소극적, 유화적 외교시책의 원인이 되었다. 당대의 이러한 염전 풍조 확산은 그 시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제1차 세계 대전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La Der des Der)이었다는 평가를 하도록 만들었다.
1914년까지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통치했던 유럽은 미국 등 다른 대륙의 국가들에 의존해 재건에 집중해야 했다.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지금까지 스스로를 세계 문명의 주축이라 여기고 미래를 낙관했던 유럽 국가들에 전체적인 비관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런 시체의 산을 손쉽게 쌓아올리는 지옥도 같은 전쟁 양상은 이전 과학 기술이 평화로운 풍경 하에 발전하던 시절에 품었던 벨 에포크적인 과학과 이성으로 가득 찬 희망차고 밝은 미래상의 붕괴를 불러오고 그 과학이 미치광이 같은 전쟁 상황에 동조하고 도리어 더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과학에 대한 회의주의적 시각을 불러오게 되었다. 반면에 당시의 미흡한 군사 기술에 대한 연구는 어마어마하게 발전하였으며 이후 이어지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말의 희망마저 꺾이게 된다.
9.2. 군사학적
군사학적으로는 승자와 패자에게 완전히 다른 영향을 미쳐 2차 대전 초기 전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승자인 영국과 프랑스는 1차 세계 대전의 전훈을 압도적인 화력과 방어자의 우세로 결론짓고 방어 위주의 군사사상을 도입, 마지노 선 건설 에 착수하지만 [66] , 독일은 그 우세를 극복하기 위한 기동전을 연구해 결국 1940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4년 동안 점령하지 못한 프랑스를 6주 만에 점령했다.
이 전쟁은 이전 전쟁과는 달리 전쟁으로 인한 인적 자원의 손실을 국가들이 감당하기 힘든 경우였다. 무기 체계의 발달, 특히 참호전 양상으로 흘러간 전쟁 양상과 더불어 새롭게 개발된 야포와 기관총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은 속도로 병력이 소모되게 하였으며[67] , 이에 반해 나이 많은 고령의 지휘관들의 생각은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전의 경우 비교적 엉성한 화망과 포를 뚫고 닥치고 기병 or 보병이 진격해서 적군을 유린하면 되는 반면, 1차 대전 초기 전선에서는 기관총에 병력을 돌진시켜야 하는 상황임에도 양군의 지휘관들은 돌격하여 상대의 방어를 분쇄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같은 무모한 돌격명령은 지휘관들의 '공격 낭만주의'와 더불어 공격하여 적의 진영을 탈취하고 적병을 사살하는 것을 명예로운 일이자 커다란 전공으로 여기고, 방어선을 굳게 하여 나오지 않는 것은 불명예스러우며, 계집애 같은 행위로 여기던 경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일본 군대에서 이 공격만능주의적 사고방식을 여전히 유지하는 이들이 있었다. 오히려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나 1차 대전 당시 칭다오 전투에서 일본군의 전투 교리는 공격만능사상식 돌격이 아니었으며 포격이 주축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정신력만 강조하는 교리가 일본군을 지배하게 되는 것은 1920년대를 넘어서인데 이러한 교리가 성립되는 데는 러일전쟁 당시 독일식 화력전에 입각한 포격이 당시의 기술 부족에 의해 영 시원치 않았던 경험과 1차 대전의 탄넨베르크 전투와 총력전 양상이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일본의 산업능력으로는 1일당 수십만 발을 쏟아붓는 서구 선진국의 "사치스러운" 전투를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식의 전투를 지향해야 한다"'''라는 무대포스러운 결론으로 이른 것이다.[68]
초기 전선이 고착된 이후에 무모한 돌격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거 말고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게 더 큰 문제. 최근에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지휘관들의 무능력에 대해선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보고 있다. 지휘관들이 전선이 아닌 후방의 성에서 체류하면서 작전 지시를 했던 것도 전선의 크기나 결정해야 할 사항 등을 고려할 때 몸을 사렸다기보다는 불가피한 지휘 방식이었다는 것이며 이는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전선 시찰 과정 등에서 일어난 고위급 지휘관들의 사상률 역시 상당해서 몸을 사렸다는 주장 역시 부정확하다고 한다. 1914년 전쟁 초기를 지나서 참호선이 구축되고 전선이 고착될 때까지만 해도 보불전쟁의 전훈으로 구축된 보병 기반의 기동전 교리가 대부분이었지만 전황이 참호전으로 고착되면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교리로는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으며 포격을 비롯해서 적의 진형을 보병의 돌격 이전에 무너뜨려야 된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단지 참호와 철조망으로 구성된 적의 진지에 충분히 빠르고 효과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포격이나 화학전, 공습, 전차의 개발 등 당시에 할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았으며 그러한 시행착오의 결과 전쟁발발 당시인 1914년의 보병 기동전술과 전쟁 후기의 1917, 1918년에 독일군이 보여준 후티어 전술이나 협상국이 보여준 제병 합동 전술의 수준은 천지차이였다.
문제는 이러한 학습이 무수한 병사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과 향상된 전술이 효과를 보는 상황에서조차도 높은 손실률 자체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한계는 있었다. 진격조차 못했던 무의미한 희생이 그나마 진격은 가능한 유의미한 희생으로 바뀐 정도. 무엇보다도 매끄러운 작전 연계를 위한 통신 기술, 특히 무선통신 기술이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렀기 때문에 포격으로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는 순간에 보병을 돌격시켜 적을 섬멸한다는 것은 책상 위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실제로는 아군에게 포격을 하는 불상사에 대한 염려로 쌍방의 매끄러운 연계가 거의 부재했다. 존 키건은 자신의 저술에서 과학기술이 인명을 살상하기에는 충분히 발전하였으나 인명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막기에는 미흡하였다고 하였다. 즉, 세상을 밝게 해줄 것처럼 여겨졌던 과학기술이 인간을 죽이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었지만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 기관총이나 가스탄 같은 병기가 너무도 쉽게 인명을 살상하는 반면에 철도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계속된 징병을 통해 전선의 병력을 바로바로 보충하였기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도 전선이 유지되었다. 결국 동부 전선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독일이 서부 전선에 총력을 다 했을 때에도 발전된 전술에 힘입어 전선의 돌파는 가능했지만 그 돌파를 확대시킬 역량은 없었고, 이후 제병합동전술로 독일군을 밀어붙이는 협상국에 대항하여 더는 싸울 수 없을 만큼 자원이 소모된 이후에야 전쟁이 끝나게 된다.
본격적인 위장 개념이 탄생한 전쟁이기도 하다. 이전까지는 경험으로 위장의 중요성을 알게 된 군인들이 개인적으로 자신의 군복을 검게 만드는 식이었으나, 1차 대전부터 국가적으로 위장에 신경쓰기 시작했다. 우선 전쟁이 일어날 무렵부터 이미 각 국가의 군복은 어두운 색이었으나 충분치 않았고, 여러 색이 쓰인 위장 무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것의 선구자는 프랑스로, 화가들을 대량으로 징집해 손으로 페인트를 칠해 전차나 군복 등에 위장무늬를 그리게 하였으며 카모플레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69] 위장용 모형이나 위장망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프랑스에서 등장했던 입체파가 위장 개념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다만 대량생산되는 제식 위장 군복은 2차 대전에서야 나온다) 한편 영국과 미국은 독일의 잠수함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고심했으며, 노먼 윌킨슨이라는 저명한 해양 화가의 제안에 따라 다즐 카모플라주(dazzle camouflage)라는 독특한 패턴을 배에 칠하기 시작해 큰 효과를 보았다. 이 위장은 배 자체를 감추는 것은 아니고, 배의 진행방향이나 속도를 알기 어렵게 만들어 어뢰를 제대로 조준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이 것에도 역시 입체파의 작품 들이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위장의 도색은 주로 여성들로 이루어진 도색 전문 부대가 도맡았다고 한다.
9.3. 사회적
후방에서 갖은 군수물자 동원을 통해 대중들의 발언권이 높아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한 것이다.[70] 전쟁을 치르는 동안 여성들이 남성들을 대신해서 공장에서 일했는데 이것이 여성들의 사회적 발언권을 키운 것이다.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스스로의 권리와 힘에 대해서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주정을 끝낸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에 유럽 바깥의 나라들의 군주정은 식민지배[71] 나 내부 소요[72] 로 무너지고 있었고 그나마 건재하던 유럽의 군주정들도[73] 이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4개의 제국이 망해 버리고 잠시 세워졌던 핀란드 왕국이나 독일 제국 내부의 수많은 제후국들의 왕정이 폐지되고 10여 개의 신생 공화국이 제국의 폐허 위에 세워지면서 '''20세기 왕정의 몰락의 신호탄을 울린 전쟁이기도 하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알바니아의 왕정도 폐지되어 버림으로 유럽의 왕정은 서, 북유럽 지역의 일부 국가[74] 를 제외하곤 무너진다.[75]
말단 시민들만 병사로서 죽은 게 아니라, 양심적이고 지성을 갖추었던 젊은 세대의 20~30대 엘리트(특히 프랑스)와 귀족 세력 역시 굉장히 큰 희생을 치렀다. 잘난 만큼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기에 능력 여하를 불문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앞장서서 전장에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수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며, 살아 돌아온 사람들도 상당수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멀쩡하게 돌아올 수가 없었다. 영국의 이튼 수상은 이 시기 입은 부상으로 평생을 고통스러워했으며, 명문대인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나 옥스퍼드 대학교의 전사자 비율이 엄청나게 높았다고 한다. 대학교를 방문하면 칼리지마다 출신 사망자들의 이름을 돌에 새겨 기리고 있다. 당시 귀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회계층의 참전자수 대비 전사자수 비율은 8:1이었는데 귀족층은 5:1이었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참고 대부분의 젊은 엘리트와 귀족들이 공격의 선두에 서야 할 초급 장교로 복무했기에 이는 사실 필연적인 결과다. 이 시대를 봐도 후대인 2차대전을 봐도 선두에 서야 하는 초급 장교의 전사율은 일반 말단병보다도 훨씬 높다!
또한 이로 인해 '''진정한 귀족계층 역시 몰락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구체제가 몰락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혁명가들이 귀족들을 증오해서 혁명을 한 게 아니라 앙시앵 레짐의 폐지를 요구한 것이기 때문에 자코뱅당의 공포정치기를 제외하면 귀족들에게서 빼앗은 건 특권과 부당하게 모은 재산 뿐이었으므로 실제로는 그 이후에도 구체제의 잔재가 꽤나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남은 귀족 역시 전쟁이 터지면 앞서 나가는 모범을 보여서 나름대로 존중받기도 했다. 하지만 1차대전 중에 많은 귀족 가문의 '''젊은이들이 죽어나가는 바람에 대가 끊겨''' 진짜로 구 체제가 끝나버렸다.
반면에 사회의 지도층 또한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경험하고 그 참혹함과 끔찍한 만행들을 뼈져리게 체감했기에, 지도층에게도 전쟁에 대한 거부감을 심을 수 있던 것은 다 타버린 집에서 그나마 건진 셈이다. 미국은 그렇게 인명피해가 타 연합군에 두드러지는 편은 아니지만, 대신 전후 참전군인의 처우 문제로 인해 보너스 군대 같은 말썽이 있었다.
이렇게 국민들을 총알받이로 희생시켰으니 국가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국가의 지배세력들이 자본주의의 논리로 움직이므로 국가를 전복하고 공산 국가를 만들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로 살자고 주장했고, 자유주의자들은 국민의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극이 있으면 또 다른 극이 있듯 이와는 반대로 국가에게 모든 권력을 실어주고 국민들을 국가가 시키는 대로 총 단결하고 자신의 국가와 민족만 잘 살자는 극단적인 전체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했고, 전쟁에서 지면 모든 걸 잃지만 이기면 모든 걸 보상받을 수 있으니 군대가 국정을 좌우하는 군국주의가 패전국은 물론이고 일부 승전국에서도 보여졌다. 20세기 사상의 대립과 충돌의 시작이다.
일각에서는 이미 18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던 자유주의 무역에 기반한 100년의 세력균형 평화시대는 전쟁이 아니었어도 경제적인 이유로 종결될 기미를 보였으며, 1차 대전은 단지 그 부산물이었지 결코 원인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칼 폴라니가 대표적.
한편으로는 세계 평화에 기여한 면도 있는데, 히틀러를 비롯한 추축국 수뇌부들의 의도된 복수심과 침략적 동기로 시작된 제2차 세계 대전과 달리, 제1차 세계 대전의 개전 과정은 '''당시 기준으로''' 수뇌부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한 결과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 때문에 국제정치학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과제로 떠올랐고 그 성과로 인류는 과거에 비해 대규모 총력전을 회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특히 바바라 터크먼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정을 연구한 저서인 "8월의 포성"은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핵전쟁을 막고 인류를 구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76]
9.4. 국가별
이 전쟁으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몰락한다. 러시아 제국과 독일 제국은 정부가 무너져 각각 소련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변했고, 독일은 단치히와 주변 지역을 폴란드에게 넘겨준다. "폴란드 회랑"으로 불리우는 이 지역은 내륙국 폴란드에게 해상로를 열어주었지만 훗날 나치 독일은 이를 빌미로 폴란드 침공을 일으킨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어 그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게 된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약간의 영토를 받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이탈리아의 범위에 속하는 영역을 다 받진 못했으며, '''이에 대한 불만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 이어진다.'''
영국과 프랑스는 승전국이었음에도 전쟁 이후 식민지와의 연결이 끊어지고 경제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어 제국 해체의 발단이 된다. 특히 프랑스는 인구 측면에서 국가 발전의 근간이 되는 성인 청년 인구들의 1/3(부상자 포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전쟁 후유증은 심대했다.[77] 근대 이전까지 프랑스의 인구는 영국과 독일을 압도했지만 19세기 무렵에 독일에게 크게 추월당했고, 이런 상황에서 두 번의 세계 대전 동안 인구 증가가 정체되면서 영국에게도 뒤쳐진다.[78][79] 1990년대까지는 영국보다 적은 인구를 유지했으며 이는 프랑스가 과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다시 찾지 못하게 된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때문에 독일의 세력과 자신감이 커져서 2차 대전이 거대하게 일어나는 데 일조하게 되면서,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은 더욱 거대한 전쟁의 전초전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원수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을 약체화 시키기에는 '''너무 허약한 조약'''이라는 이유로 베르사유 조약에 사인하면서 '''이 조약은 기껏해야 20년 휴전 협정에 불과하다'''고 평가했고,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영국 측 수석대표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페르디낭 포슈와 반대로 케인스는 독일에 대한 '''전쟁배상금이 과도해서''' '''독일이 복수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해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결국 남은 것은 더 큰 전쟁"'''이라고 했다. 어찌 보면 둘 다 일리 있는게, 독일이 완전히 무너질 만큼 가혹하지도, 독일이 복수심을 품지 않을 만큼 관대하지도 않은, 이도 저도 아니었던 조약이란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혹하게 했다고 쳐도 독일 통합국가와 인프라가 유지되고 있는 이상 결국 언젠가는 국가 재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80] 결국 20년 뒤 세계 3위의 경제력을 회복한 독일에 의해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
유럽의 쇠퇴와는 비교되게 미국, 일본 등의 성장은 더욱 가속화된다. 미국은 영국을 넘어서 제일의 무역국가가 되고, 일본은 15위에서 8위로 도약한다. 미국은 유럽에 당시 가치로 100조 달러를 원조하고 달러가 영국의 파운드 스털링을 대체해 세계 통화가 된다. 유일하게 일본만은 피해를 입지 않은 채 당시 주요 산업인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비중이 바뀌었고 매년 50~70%씩 성장하며, 광업, 해운업, 무역업에서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된다. 러일전쟁때 까먹은 돈은 이때 완전하게 회복이 됬고, 당시 조선업은 세계 3위 수준으로 올라갔으며, 태평양(남양청)과 중국에 식민지를 획득하였다.[81]
열강의 식민지들이 이 전쟁 이후 독립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종전 전에 국회에서 공표한 14개조 평화원칙, Fourteen Points에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되어 민족의 운명은 민족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사상이 널리퍼지게되면서 한반도를 포함한 식민지 내의 독립 운동에 큰 불을 지폈다. 또한 소련의 레닌은 이 전쟁을 극단적 자본주의인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규정하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여러 나라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게 되는데 이런 공산권의 지지 또한 혁명에 불씨를 당기는 데 일조하게 된다. 식민지를 전 세계에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 국가들도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해외 영토를 그나마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이마저도 유지시킬 힘이 남아 있지 않아 대부분 독립시키게 된다.
10. 기타
10.1. 전쟁 관련
- 공식적으로 밝혀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최후의 사망자는 캐나다군인 조지 로렌스 프라이스(George Lawrence Price) 육군 포병 이병이다. 그는 1918년 11월 11일 종전을 단 2분 남기고 독일 육군 저격수에게 총을 맞아 전사했다. 다만 이날 그 한 명만 죽은 것은 아니고 종전까지 양측 도합 1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독일군이 예상보다 악착같이 저항했기 때문이다. 또 조지가 죽기 전에는 오전 10시 50분, 프랑스 참호의 오귀스트 트래비숑이라는 40세의 연락병이 11시에 따뜻한 음식이 나온다는 소식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몇분동안 뛰어다니던 오귀스트도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맞고 죽고 말았다.
- 이 시기에 국가들은 최신 무기뿐 아니라 구식 대포는 물론이고 군마, 군견, 전서구, 낙타 등 동원할 수 있는 건 다 동원해서 전쟁을 치렀다. 오죽하면 동물원의 코끼리를 징발해서 물자 수송에 쓸 정도였다. 그래서 1차 대전은 지금까지의 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많은 동물을 동원한 전쟁으로 기록을 세웠다.사진들
- 프랑스와 영국은 미 원정군 병력을 자신들의 지휘 아래 보충 병력으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미국이 거부했다. 하지만 당시 흑인으로만 이루어진 미 육군 제369보병연대만은 프랑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줬다. 이들은 프랑스 육군 장비를 지급받기도 했으며 프랑스 육군 16사단이나 161 사단에 배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들은 열심히 싸웠으며 백명 단위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을 받았다.
-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유색인종도 수백만명이 참여했던 전쟁이다. 아프리카 전선에서도 2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전했으며 독일과의 인구 차이[82] 와 인적 피해로 고심하던 프랑스는 세네갈 등지에서 시민권과 훈장을 미끼로 아프리카인 자원병들을 모아 유럽의 서부전선에 참전시켜 수만명이 사망하였다. 프랑스는 이들을 거칠고 야만적인 총알받이 전사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위험한 임무에 우선 투입했고, 부대의 사망률이 프랑스 백인들보다 월등히 높아 항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편 영국은 인도나 뉴질랜드 등에서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았었고, 이들은 영연방의 일원이란 자부심과 자치권, 돈 등 다양한 동기를 위해 참여했다. 그나마 이들의 사망률은 영국 백인들보단 절반 수준으로 낮았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프랑스처럼 인종 차별적인 전투민족론에 따른 편지 검열이나 부실한 장비 지급 등의 문제가 존재했다. 중국에서도 수십만명의 노무자를 보내 전쟁터에서 노동력을 제공했다. <세계 대전: 제국의 잊혀진 병사들(The World's War: Forgotten Soldiers of Empire)> 등의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러한 유색인종 병사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참고로 독일은 백인이 아닌 인종을 전쟁에 투입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강해 적극적으로 식민지의 병사들을 유럽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군의 세네갈인 부대는 라인란트 등에 주둔했고 라인란트인들은 아돌프 히틀러나 오이겐 피셔같은 우생학을 신봉하는 나치에게는 아리아인의 피를 더럽히려는 음모의 결과로 받아들여져 불임 수술 등을 당했다.
- 특히 인도인들은 민족 자결권과 정치적 지위 향상, 경제적 동기를 목표로 1차대전에 대규모로 참전하였다.[83] 영연방전쟁묘지위원회(CWGC) 자료에 따르면 전쟁 발발 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는 모두 110만5000명의 인도인들이 동원됐고, 프랑스 일대의 서부전선에 13만8000명, 메소포타미아 지역 중동전선에 65만7000명,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14만4000명이 동원됐다. 일부는 갈리폴리 전투와 동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되기도 했다. 특히 중동 지역에 투입된 영국군의 상당수는 인도인이었다. 1916년 4월 메소포타미아 쿠트 지방에서 오스만 제국에 붙잡힌 1만 1600명의 영국군 포로 중 대다수는 인도인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인도는 전쟁 물자 수송을 담당하고 간호사들을 전선에 투입시키는 등 비군사적 영역에서도 큰 공헌을 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7만 4000여명이 사망하고, 6만 9000여명이 부상당했다. 인도 뉴델리에는 1차대전 전몰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인디아 게이트’라는 추모비가 있다.#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전쟁을 직접 겪어 본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집안에 통조림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전쟁을 겪었던 젊은 시절에 하도 먹을 것이 없어서 가족들이 굶고 고생을 많이 해서 그렇다고...
- 장성 중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필리프 페탱,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각국에서 구국의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페탱과 힌덴부르크는 전쟁 후에 심각한 정치적 실책을 저지르게 되어 현대의 평가는 좋지 못하다.[84]
- 독일군은 파리 대포(Paris-Geschütz)라는 이름의 초대형 대포들로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영토 안에서 파리를 포격했다. 사거리 130km. 이때부터 제2차 세계 대전에 등장한 구스타프 열차포의 싹수가 보였다.
- 전쟁 초기 리에주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독일군은 신무기인 크룹사의 420mm 곡사포를 동원했다. 이는 곧 빅 베르타(Big Bertha)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사람들은 종종 다른 독일군의 대형 포도 그냥 빅 베르타라고 불렀다. SF RTS게임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에 등장하는 초장거리 방어탑인 빅 베르타는 여기에서 명칭을 따왔으며,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서 Big Bertha라는 치트키를 입력하면 말도 안되게 긴 사정거리와 데미지를 지닌 특수 투석기 하나가 소환된다.
- 최고의 에이스 파일럿은 붉은 남작(Der Rote Baron)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Manfred von Richthofen)이다.
- 안도라와 코스타리카도 협상국으로 참전했지만 종전 때 깜빡해서 조약 서명국이 아니었다. 이러면 국제법상 계속 전쟁하는 걸로 취급된다. 2차대전에도 역시 참전한 안도라와 코스타리카 중 코스타리카는 다행히 2차대전 종전 때 승전국으로 서명했지만 안도라는 이번에도 깜빡한다. 결국 1958년에 안도라가 일방적으로 종전을 선언해서 독일-안도라의 전쟁은 끝나게 된다. 국제법으로만 따지면 1차 대전은 1958년까지 이어진 셈이다.
10.2. 문화 관련
- 독일의 화가 오토 딕스(Otto Dix)는 전쟁에 참여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후에 강도높은 표현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반면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는 위장무늬를 그리다가 베르됭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에곤 실레는 1년간 징집을 피해다녔음에도 운 좋게 프라하에서 복무할 수 있었지만 종전 직전 독감으로 사망. 영국의 에릭 케닝턴(Eric Kennington)은 의병 제대를 하고도 재입대 하며 종군 화가로 일했다.
-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평화주의자로서 활동한 혐의로 1916년 100파운드의 벌금형을 받고 강사직에서 쫓겨났으며, 1918년에는 미국의 참전에 대해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한편 그의 제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탈장으로 면제를 받았으나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 때문에 오스트리아 군에 자원해서 입대했다. 게다가 거기서 더 나아가 최전선의 관측병으로 자원하는 등 만용에 가까운 행위를 하였으나 운 좋게 살아남았고,[85] 장교로까지 승급했으며 전쟁터에서 중요한 철학 논문인 <논리철학논고>까지 집필하는 업적을 이룬다. 그러나 러셀의 지인이었던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아들 에릭 화이트헤드는 전쟁에 자원해서 입대했다가 사망하였다.
- 미국의 모더니즘 시를 대표하는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1차 대전에서 서구 문명에 환멸을 느끼고 관련된 시를 여럿 발표했다. 결국 그는 미국을 떠나 영국을 거쳐 이탈리아에 정착한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을 유대인 자본가들로 인한 전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고대 그리스, 로마를 질서와 존엄이 존재했던 문명으로 동경한 탓에 두 취향이 겹치는 파시즘과 나치즘을 찬양하며 미국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 두 세력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원흉이있고, 전후 에즈라는 미국에 의해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10년간 정신병원에 갇혔다가 동료 문학인들의 도움으로 나올 수 있었다. 1차 대전의 환멸로 인해 완전히 잘못된 길로 들어가버린 아이러니한 사례. 다만 미국에서 에즈라의 시는 여전히 부정할 수 없는 걸작들로 취급된다.
- 참호에서 오랜 시간을 버텨야 했던 병사들은 심심풀이로 탄피, 방탄모 등에 조각을 했다. 이는 후에 ‘참호 예술(trench art)'이라고 불리며 수집가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트렌치 아트는 1차 대전 병사가 만든 것 만이 아니라 전쟁 중의 민간인이 제작한 것, 전후에 만들어진 기념품, 나폴레옹 시절의 작품 등을 광범위하게 지칭하기도 한다. 만화가이자 디즈니 그룹의 창시자 월트 디즈니는 빈곤했던 젊은 시절, 철모를 모아 직접 조각을 하거나 그림을 그려 팔아 돈을 벌기도 했다.
- 긴 참호 생활에서 낙중 하나는 라디오를 듣는 것이었는데, 전선마다 라디오 전파가 잘 잡히는 정도가 매우 달랐다. 가령 서부 전선의 경우에는 북쪽은 파리 방송국의 전파가 잘 닿는가 하면, 남쪽 산악 지역은 오히려 라인강 변 독일도시들에서 쏘는 라디오 전파가 더 잘 닿는 식. 때문에 자국의 라디오보다 잘 잡히는 적국의 라디오를 듣는 경우도 많아서 대치하는 양측의 군대가 서로의 가요를 들으며 마음의 위로를 얻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유명해진 대표적인 노래가 티퍼레리까지는 길이 멀구나.
- 트렌치 코트(trench coat)는 연합군이 겨울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참호의 병사들에게 지급한 옷이 시초다. 버버리 사 창립자인 토머스 버버리가 영국 육군성의 요청을 받고 레인코트로 이 코트를 개발하였다 하여 버버리(Burberry) 코트라고도 한다. 전후 인기를 끌어서 토머스 버버리는 부자가 되었다.
- 판화가 케테 콜비츠는 아들이 1차대전에서 전사한 이후 반전주의와 평화주의의 메세지를 담은 판화와 조각들을 제작했다.
10.3. 여담
- 2차 대전에 비해 인지도나 관심이 떨어진다. 한국도 마찬가지. 전쟁 초기 1년 동안만 마른 전투, 탄넨베르크 전투 등 점령과 방어 등이 일어났지 나머지 3년간은 참호에서 밀고 당기고만 하는 소모전의 연속이었으며, 주 전장도 유럽으로 국한되었다는 평가가 대세다. 이는 1차 대전에 대해 주로 전쟁사적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을 뿐, 외교사와 정치사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그 배경과 전후 결과물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이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흥미의 차이일 뿐 딱히 비판받을만한 요소는 아니다.
- 2차 대전보다 수십 년 이른 시기에 일어난 전쟁이라서 연상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전쟁도 2차 대전처럼 당시 인물들의 육성이 남아 있다. '전쟁의 전개' 문단의 영상에도 나온다.
- 잘 알려져있지 않은데, 2차 대전과는 달리, 네덜란드는 전쟁 끝까지 중립국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이는 1830년 벨기에 분리 이후에 네덜란드는 국제 분쟁에서 중립을 철칙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 이웃 나라인 벨기에는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독일군의 침공을 받아 협상국의 대열에 섰지만, 독일군은 네덜란드는 딱히 건드리지 않았다. 네덜란드 내부에서는 친독파, 친불파들이 각각 상당한 세력을 보유했지만, 전통적인 국가 정책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중립정책은 1940년까지 지켜졌지만, 네덜란드도 2차대전때는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고 연합국의 대열에 서게 된다.
- 2011년 현지 시각으로 5월 5일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자 중 전투를 경험한 최후의 생존자였던 영국인 클로드 스탠리 슐스(14살 때 해군으로 참전)가 호주에서 사망하였다. 기사 친지들의 증언에 의하면 슐스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 모두 참전했기에 평생 동안 전쟁을 혐오했다고 한다. 전투를 경험하지 않은 최후의 생존자 플로렌스 베아트리스 그린(영국 공군 여성 항공대)도 2012년 2월 4일자로 사망했다. 이것으로 "누군가의 경험인 1차 세계대전"은 21세기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1918년생 이전의 사람들까지 모두 사망한다면 1차 세계대전기의 사람은 모두 사라지게 된다.
- 2차 세계 대전과의 시간 차이가 얼마 안나는 만큼 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인물들이 이를 기반으로 후일 2차 세계 대전에서 각국의 중요 인물이 되어 다시 충돌하게 되었다. 우선 영국의 경우 윈스턴 처칠이 있는데, 명성을 떨친 제2차 세계 대전 때와 다르게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선 실책을 연발로 했었다.[86] 전쟁 전에 해군장관이었던 그는 오스만이 영국과의 동맹을 제안했을 때 반대한 관료 중 한 명이었으며, 영국에서 건조되던 오스만의 전함을 압류해 오스만을 적으로 돌렸던 장본인이다. 처칠은 전쟁 중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입안했지만 이 작전의 거대한 실패로 정치적 인생이 끝나 의전직에나 있다가 퇴임해 전방의 육군 중령이 되어 활로를 모색해야 했었다. 그나마 금수저라 곧 군수장관으로 임명되어 당시 막 개발되던 전차의 개발을 지지해 주는 등의 공적으로 그나마 만회를 할 수 있었다.
- 훗날 터키의 국부가 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위의 갈리폴리 상륙작전에서 오스만의 대령으로 큰 전공을 세워 장군으로 승진되었으며 큰 명성을 얻고 대전 직후에 터키 독립전쟁에서 활약했다. 어떻게 보면 처칠이 터키와 아타튀르크를 살린 셈.
-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군에 자원입대하여 연락병이라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며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에게 이 훈장이 수여되어야 한다고 추천한 사람은 유대인 장교였다.
- 의외로 영상 자료도 꽤 남아있는 편이지만 당대 기술의 한계로 무성필름으로 남아있다.
- 해군 관련 사진들 이글루
- 독일의 물리학자 카를 슈바르츠실트는 전쟁이 발발하자 4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일 육군 포병장교로 임관하여 전선으로 나가서도 물리학 연구를 멈추지 않고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일부 해석해를 내놓는 업적을 세웠지만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던 1915년에 천포창[87] 이라는 피부병에 걸려서 1916년에 포츠담에서 사망했다.
-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 1차 세계대전으로 고구려-수 전쟁에서 수양제가 세운 300만 대군[88] 이라는 정신나간 "단일 전쟁 동원 병력 최고기록"이 1,300년 만에 갱신(...)되었다.
- 2018년 11월 11일 프랑스에서 종년 100주년의 성대한 기념식이 열렸다.기사
11. 연표
11.1. 연도별 주요 전투
- 아프리카 전선은 워낙 따로 놀았던 고로, 별도 항목에서 기술한다. 제1차 세계 대전/아프리카 전선 참조.
12. 사용 장비
13. 관련 문서
13.1. 관련 용어
- 국제 연맹
- 파리 강화 회의
- 내부로부터의 중상
- 뇌이 조약
- 민족자결주의
- 러시아 혁명
- 로잔 조약
- 베르사유 조약
- 생제르맹 조약
- 세브르 조약
- 슐리펜 계획
- 치머만 전보
- 트리아농 조약
- 무제한 잠수함 작전
13.2. 관련 인물
기껏해야 20년 정도의 전간기 이후 다시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기 때문에 상당수의 인물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인물들과 겹친다. 제2차 세계 대전기의 지도자나 군인들이 이 시기에는 어떤 위치였는지도 보면 흥미로운 부분.
13.2.1. 협상국
- 대영제국
- 조지 5세
- 더글러스 헤이그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 윈스턴 처칠
- 버나드 로 몽고메리
-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 J. R. R. 톨킨 - 우리가 잘아는 반지의 제왕의 소설가 맞다. 솜 전투에 참전했다가 자신은 병에 걸려 죽을 뻔 하고 나머지 같이 참전한 친구들은 모두 전사했다.
- 키스 파크 - 안작군 소속으로 갈리폴리 상륙작전에 참전하고 이후 영국 육군으로 솜 전투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이후 항공부대로 전입한다. 이후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영국 본토 항공전과 몰타 항공전등을 지휘했다.
- 러시아 제국(~1917)-러시아 연방 임시정부(1917)-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1917~)
- 이탈리아 왕국
13.2.2. 동맹국
- 독일 제국
- 오스만 제국
- 메흐메트 5세 - 오스만 제국 술탄
- 이스마일 엔베르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 이스메트 이뇌뉘
- 탈라트 파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프란츠 요제프 1세 - 오스트리아 제국 카이저
- 카를 1세 - 오스트리아 제국 카이저
-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 당시 오헝제국군 원수[99]
-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 황위 계승자로 이 사람의 암살로 1차대전의 서막이 열린다.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호르티 미클로시[100]
-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
-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13.3. 창작물
1차 대전 자체가 소재로선 2차 대전에 비해 인지도, 인기면에서 저조한 소재인지라 세계적으로 1차대전 소재 창작물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그 얼마 없는 창작물들조차도 몇몇 매니아들을 빼면 대중적인 흥행은 장담하기 어려워 중소기업에서 저자본으로 만든 B급 작품들은 있어도 대형 회사에서 소재로 삼은 경우는 거의 없다. 그나마 배틀필드 1과 1917 이후로 1차대전 덕후들이 많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당장 배틀필드 1조차 국내에서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다고 하자 이에 대한 거센 반발과 이번 신작은 구입하지 않겠다는 유저들도 있었을 정도.
13.3.1. 소설・영상물
- 갈리폴리
- 거인들의 몰락 - 켄 폴릿 지음. 1차 대전 직전의 유럽과 미국의 상황을 그린 대하 소설이며 2차 대전과 냉전을 다룬 후속작도 있다.
- 고독의 우물 - 래드클리프 홀 지음. 1차 대전 당시 앰뷸런스 부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공주와 개구리 - 티아나의 아버지가 이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 라파예트(원제 Flyboys)
- 무기여 잘 있거라
- 빨강머리 앤 잉글사이드의 릴라편 - 앤의 아들들이 1차 대전에 참전하는 내용이 나온다.
- 서부전선 이상없다
- 강철 폭풍 속에서
- 데이 쉘 낫 그로우 올드(2018) - 제국 전쟁 박물관이 종전 100주년을 맞이해 제작한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반지의 제왕의 감독으로 유명한 인물이자, 제1차 세계 대전 덕후로 유명한 피터 잭슨이 미칠듯한 자료 수집을 통해 당시의 영상들을 올 컬러&3D로 복원한 영화다. 어느 정도냐면 작품에 등장하는 무기들의 소리나 색상은 기본이요, 당시 주요 전장들이 있던 곳을 직접 답사를 가 일일이 사진을 찍고 대조해 가며 색깔을 맞췄다. 또한 영상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입모양을 맞춘 후, 그 사람의 출신 지역을 알아내서 그 지역 성우를 통해 더빙했다. 그야말로 장인정신의 결정체. 영화관 상영은 미국과 영국에서 단 하루만 이루어 졌으며 스트리밍 사이트를 통해서 제공되고 있다.
- 아라비아의 로렌스
- 에덴의 동쪽 - 전쟁영화는 아니지만 이 시기를 배경으로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그리고 있으며 극중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 영 인디아나존스 - 인디아나 존스가 벨기에군으로 참전한다. 전쟁의 참상에 대해 잘 표현한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 정무문 100대1의 전설
- 인게이지먼트(A very long engagement)
- 자니는 총을 들었다(Johnny Got His Gun) - 스파르타쿠스 각본가로 유명한 달턴 트럼보가 쓴 소설이자 직접 만든 영화. 반전 작품으로 사지가 절단되어 귀국한 참전병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8월의 포성(원제 The Guns of August)
- 파스샹달
- 60고지 전투
- 워호스
- 워터 디바이너
- 로스트 바탈리온
- 레드바론
- 대야망(The blue max)
- 메리 크리스마스
- 데스워치(영화)
- 영광의 길
- 버드송(Bird song, 2012)
- 37 데이즈(37 Days, 2014, BBC 3부작)
- 더 크림슨 필드(The Crimson Field, 2014, BBC 6부작)
- 아워 월드 워(Our World War, 2013, BBC 3부작)
- 더 패싱 벨스(The Passing Bells, 2014, BBC 5부작)
- 앤잭 걸스(Anzac Girls, 2014, 호주 ABC)
- 사라예보 1914(Das Attentat - Sarajevo 1914, 2014, ZDF 2부작)
- 원더우먼(Wonder Woman, 2017)
- 바탈리온
- 저니스 엔드(Journey's end)
- 1917: 샘 멘데스의 연출작
-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 퍼레이드의 끝
- 캔디캔디 - 극중 1차대전이 발발해 간호사 프라니가 파견되고, 아리스테아 콘웰이 공군으로 참전했다가 격추당해 전사한다.
- 그래픽 노블 제 1차세계대전(원제: Putain de guerre! - 이 망할 전쟁!) - 자크 타르디(Jacques Tardi) 작품
-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1918(원제: C'était la guerre des tranchées) - 자크 타르디(Jacques Tardi) 작품
- 브리타닉(영화)
13.3.2. 게임
- 11-11 memories retold [101]
- 1916
- Beyond The Wire
- 네크로비전[102]
- 다크스트 오브 데이즈[103]
- 더 그레이트 마션 워[104]
- 라스트 익스프레스
- 라이즈 오브 플라이트
- 레드콘
- 발리언트 하츠 : 더 그레이트 워 [105]
- 배틀필드 1[106]
- 베르됭[107]
- 탄넨베르크[108]
- 빅토리아[109]
- 아이언 스톰 [110]
- 암네시아: 어 머신 포 피그스[111]
-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112]
-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대체역사물MOD)[113]
- 토이 솔져스[114]
- 플레임즈 오브 워 - Great War 확장
- A&A 1914 (보드게임)
- european war 3
- Warfare 1917
- 영광의 길(보드 게임)
- 월드 오브 워쉽[115]
- 워 썬더
- Strategic Command: World War I
13.3.3. 대체역사물
- 레비아탄, 베헤모스, 골리앗 - 스콧 웨스터펠드 지음. 기계 병기로 싸우는 동맹국과 생체 병기로 싸우는 협상국 사이에서 오스트리아의 숨겨진 어린 황태자가 주인공인 대체역사소설. 아쉽게도 국내엔 미번역된 작품이다.
- The Great Martian War - 히스토리 채널에서 만든 제1차 세계대전과 H.G.웰즈의 우주전쟁을 크로스오버 한 페이크 다큐맨터리. 1913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화성인 군대가 독일을 공격해 독일 본토는 쑥대밭이 되고 영국 및 프랑스, 그리고 프랑스로 피신한 독일군과 이후 참전하게 되는 미군이 화성인을 상대로 서유럽에서 격전을 벌인다는 내용. 여기선 슐리펜 계획이 프랑스를 공격하는게 아니라, 화성인 군대를 피해 모든 독일군 및 독일 민간인들을 프랑스로 대피시키는 작전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영상은 아니지만 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의 전개와 원작 소설의 전개를 훌륭하게 섞은 작품이다.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훨씬 일찍 개전하는 등 여러모로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해당 항목
14. 관련 어록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 中.[117] }}}이봐, 전우여, 난 자넬 죽이고 싶지 않았어. 자네가 참호에 또 다시 뛰어들더라도 얌전히만 있으면 죽이지 않을 거야. 난 자네가 뛰어들 때 자네의 수류탄을, 자네의 총검을, 자네의 무기만을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난 자네의 얼굴을 보고 자네의 아내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공통점을 발견했어, 전우여! 부디 나를 용서해다오! 우리는 이러한 공통점을 너무 늦게 깨닫고 말지. 자네들 어머니들도 우리의 어머니들처럼 근심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죽음과 고통을 똑같이 두려워하며 똑같이 죽어 간다는 사실을 말이야. '''전우여! 어째서 그대가 나의 적이 되었던가. 우리가 무기와 군복을 벗어 던지면 자네도 나의 벗이 될 수 있을 텐데...'''
{{{#!wiki style="text-align:right"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참호에 있는 군인들에게 왜 전쟁을 하는지 물었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굴복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왔다. '''독일이 왜 우리와 전쟁을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wiki style="text-align:right"
'''허버트 조지 웰즈[118][119] '''}}}'''모든 전쟁을 끝내는 전쟁이 될 것.'''
{{{#!wiki style="text-align:right"
'''1877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언젠가 유럽에서 다시 전쟁이 터진다면 그것은 발칸 반도에서 일어난 한 멍청한 짓 때문일 것이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알프레드 주베르'''[120] }}}인간은 미쳤다! 현 사태를 지속한다는 것은 미친 것임에 틀림없다. 이 지독한 살육전이라니! 이 끔찍한 공포와 즐비한 시체를 보라! 내가 받은 인상을 전달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지옥도 이렇게 끔찍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미쳤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에드워드 그레이(Sir Edward Grey)'''.[121] }}}The lamps are going out all over Europe, we shall not see them lit again in our life-time
온 유럽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다. 우리 생전에 다시 켜지는 일은 없겠지.
{{{#!wiki style="text-align:right"
'''아돌프 히틀러'''.}}}{{{#!wiki style="text-align:right"
'''배틀필드 1 캠페인 인트로'''}}}More than 60 million soldiers fought in The War to End All Wars.
6천만 명 이상의 병사들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에 참전했다.
'''It ended nothing.'''
'''하지만 아무것도 끝내지 못했다.'''
'''Yet it changed the world forever.'''
'''다만, 세계를 영원히 바꿔 놓았다.'''
{{{#!wiki style="text-align:right"
'''발리언트 하츠: 더 그레이트 워 엔딩'''}}}너무도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시신조차 이제는 덧없는 먼지가 되었지만,
그 희생만큼은 아직도 살아숨쉬고 있다.
'''우리는 그 기억을 항상 간직하며 절대 잊어서는 안되리라...'''
{{{#!wiki style="text-align:right"
'''그래픽 노블 제 1차세계대전(Putain de Guerre!)''' 中.}}}대포는 정확한 시각에 포효했다. 독일군도 대응사격을 했다. 때로는 독일군이 예고도 없이 살육전을 시작했다. 병사들의 살점이 형체를 알 수 없는 파편으로 사방에 흩어졌다. 부러진 뼈, 벌거벗겨진 몸, 절단된 사지, 바라보기 힘든 살덩어리... 끔찍해! 끔찍해! 끔찍해!
바로 저 화염속으로 나쁜 놈들이 들어가버렸으면! 조프르, 프랑스 대통령, 독일 황제, 장관들, 사제들, 장군들, '''그리고 나를 세상에 내놓은 내 어머니도!'''
{{{#!wiki style="text-align:right"
'''로베르 조르주 니벨 신임 총사령관, 1916년 12월 15일'''}}}'''경험이 증명했습니다. 승리는 확실합니다. 제가 약속합니다. 적군은 수업료를 톡톡히 치를 것입니다.'''
{{{#!wiki style="text-align: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