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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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 Partito Comunista Italiano (PCI)
1921년부터 1991년까지 있었던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정당. 프랑스 공산당과 더불어 NATO권 국가에서 가장 성공한 공산당이었다. 냉전과 2차대전 이전에도 서유럽에서 가장 큰 공산당 중 하나이자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의 주역이며, 스페인 내전, 2차대전을 더불어 가장 오래됐고 성공적인 지하 투쟁 활동 경력을 자랑했던, 코민테른 내에서도 입지가 큰 세력이었다.
이탈리아 사회당 내부 계파갈등이 극에 달했던 1921년, 안토니오 그람시, 팔미로 톨리아티[1] , 아메데오 보르디가, 안젤로 타스카 등의 맑시스트들이 리보르노에서 열린 사회당 17차 전당대회 중 탈당을 선언하고 창당했다. 같은 해 5월에 치뤄진 총선에서 16명을 당선시키며 쾌조의 스타트를 끊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국 1당제 원칙에 의거, 사회당과의 재결합을 종용하는 소련과 알력을 빚고, 로마 진군으로 내각을 장악한 베니토 무솔리니의 국가 파시스트당에 맞서 강경 투쟁 노선을 걷다가 1926년 불법화되는 등 오랜 암흑기를 겪는다[2] . 이 후 팔미로 톨리아티가 서기장에 취임, 안티파 지하활동으로 명맥을 유지한다.
1943년 무솔리니가 연합국에 체포되고 국가 파시스트당이 몰락하면서 재합법화되었고, 1946년 미군정 치하의 과도내각에서 톨리아티 서기장이 법무부 장관으로 입각하여 국가 파시스트당 부역자들 및 독일 괴뢰정권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을 주도하고, 국민투표를 통해 당론인 입헌군주제 폐지와 공화제를 관철시키면서 지지율을 급속도로 높였고 이탈리아의 토지개혁에도 공산당의 입김이 거세게 들어가 우익들은 마피아와 연합하여 공산당을 견제했고 그 와중에 많은 폭력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냉전시대 내내 기독교민주당 다음 가는 원내 2당+교섭단체 위치를 고수한다.하지만 공산당의 집권을 두려워 한 이탈리아 내 기성정당들과 미국의 보이지 않는 견제로 인해 공화국 수립 이후 연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는다.[3]
이 뜨뜻미지근한 형편을 극복하기 위해 토지개혁, '''종교의 자유 인정'''을 통해 보수적 농민 계급을 포용하자는 '이탈리아의 사회주의로의 길' 강령을 채택하기도 하고(1956년), 프라하의 봄 이후 당권을 잡은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서기장, 조르조 아멘돌라 정책위원장 휘하에서 스탈린주의를 폐기하고 유럽공산주의를 강령으로 채택하는 국민정당으로의 변신을 선언하는 등[4]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정권교체의 호기라는 평이 많았던 1976년 총선에서 간발의 차로 2위에 머무르면서 끝내 좌절되었다. [5] 이 후 일본사회당처럼 어정쩡한 콩라인을 유지하다가 1991년 소련 해체와 마니 풀리테 운동의 여파로 당이 풍비박산날 위기에 처하자 전당대회를 열고 노선을 사회민주주의로 전환한 뒤 좌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사실상 해산된다.[6]
1996년, 좌파민주당이 과거 앙숙이었던 사회당과 선거연합인 '올리브 나무'를 결성해 같은 해 4월에 치뤄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둬 공산당 시절 이루지 못했던 수권정당의 꿈을 이뤘고, 1998년 9월 공산당 출신의 마시모 달레마가 로마노 프로디의 후임으로 총리에 취임, 전년도 프랑스 총선에서 사회당-공산당 연대가 승리해 좌우동거내각을 형성한 데 이어 전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2006년, 공산당 원내대표였던 조르조 나폴리타노가 상하원 합동투표에서 대통령 직에 올라 2015년까지 재임했다.
공산당 기관지 "우니타(L'Unità)"는 후신인 좌파민주당→이탈리아 민주당의 기관지로 2017년까지 발행되다 폐간되었다.
1921년 4.6% 15/535
1924년 3.7% 19/535
1946년 18.9% 104/556
1948년 31.0% 130/574
1953년 22.6% 143/590
1958년 22.7% 140/596
1963년 25.3% 166/630
1968년 26.9% 177/630
1972년 27.1% 179/630
1976년 34.4% 228/630[7]
1979년 30.4% 201/630
1983년 29.9% 198/630
1987년 26.6% 177/630
Il Partito Comunista Italiano (PCI)
1. 개요
1921년부터 1991년까지 있었던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정당. 프랑스 공산당과 더불어 NATO권 국가에서 가장 성공한 공산당이었다. 냉전과 2차대전 이전에도 서유럽에서 가장 큰 공산당 중 하나이자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의 주역이며, 스페인 내전, 2차대전을 더불어 가장 오래됐고 성공적인 지하 투쟁 활동 경력을 자랑했던, 코민테른 내에서도 입지가 큰 세력이었다.
2. 역사
2.1. 창당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이탈리아 사회당 내부 계파갈등이 극에 달했던 1921년, 안토니오 그람시, 팔미로 톨리아티[1] , 아메데오 보르디가, 안젤로 타스카 등의 맑시스트들이 리보르노에서 열린 사회당 17차 전당대회 중 탈당을 선언하고 창당했다. 같은 해 5월에 치뤄진 총선에서 16명을 당선시키며 쾌조의 스타트를 끊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국 1당제 원칙에 의거, 사회당과의 재결합을 종용하는 소련과 알력을 빚고, 로마 진군으로 내각을 장악한 베니토 무솔리니의 국가 파시스트당에 맞서 강경 투쟁 노선을 걷다가 1926년 불법화되는 등 오랜 암흑기를 겪는다[2] . 이 후 팔미로 톨리아티가 서기장에 취임, 안티파 지하활동으로 명맥을 유지한다.
2.2.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당 해산까지
1943년 무솔리니가 연합국에 체포되고 국가 파시스트당이 몰락하면서 재합법화되었고, 1946년 미군정 치하의 과도내각에서 톨리아티 서기장이 법무부 장관으로 입각하여 국가 파시스트당 부역자들 및 독일 괴뢰정권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을 주도하고, 국민투표를 통해 당론인 입헌군주제 폐지와 공화제를 관철시키면서 지지율을 급속도로 높였고 이탈리아의 토지개혁에도 공산당의 입김이 거세게 들어가 우익들은 마피아와 연합하여 공산당을 견제했고 그 와중에 많은 폭력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냉전시대 내내 기독교민주당 다음 가는 원내 2당+교섭단체 위치를 고수한다.하지만 공산당의 집권을 두려워 한 이탈리아 내 기성정당들과 미국의 보이지 않는 견제로 인해 공화국 수립 이후 연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는다.[3]
이 뜨뜻미지근한 형편을 극복하기 위해 토지개혁, '''종교의 자유 인정'''을 통해 보수적 농민 계급을 포용하자는 '이탈리아의 사회주의로의 길' 강령을 채택하기도 하고(1956년), 프라하의 봄 이후 당권을 잡은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서기장, 조르조 아멘돌라 정책위원장 휘하에서 스탈린주의를 폐기하고 유럽공산주의를 강령으로 채택하는 국민정당으로의 변신을 선언하는 등[4]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정권교체의 호기라는 평이 많았던 1976년 총선에서 간발의 차로 2위에 머무르면서 끝내 좌절되었다. [5] 이 후 일본사회당처럼 어정쩡한 콩라인을 유지하다가 1991년 소련 해체와 마니 풀리테 운동의 여파로 당이 풍비박산날 위기에 처하자 전당대회를 열고 노선을 사회민주주의로 전환한 뒤 좌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사실상 해산된다.[6]
3. 이 후
1996년, 좌파민주당이 과거 앙숙이었던 사회당과 선거연합인 '올리브 나무'를 결성해 같은 해 4월에 치뤄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둬 공산당 시절 이루지 못했던 수권정당의 꿈을 이뤘고, 1998년 9월 공산당 출신의 마시모 달레마가 로마노 프로디의 후임으로 총리에 취임, 전년도 프랑스 총선에서 사회당-공산당 연대가 승리해 좌우동거내각을 형성한 데 이어 전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2006년, 공산당 원내대표였던 조르조 나폴리타노가 상하원 합동투표에서 대통령 직에 올라 2015년까지 재임했다.
공산당 기관지 "우니타(L'Unità)"는 후신인 좌파민주당→이탈리아 민주당의 기관지로 2017년까지 발행되다 폐간되었다.
4. 투표 결과
4.1. 이탈리아 하원
1921년 4.6% 15/535
1924년 3.7% 19/535
1946년 18.9% 104/556
1948년 31.0% 130/574
1953년 22.6% 143/590
1958년 22.7% 140/596
1963년 25.3% 166/630
1968년 26.9% 177/630
1972년 27.1% 179/630
1976년 34.4% 228/630[7]
1979년 30.4% 201/630
1983년 29.9% 198/630
1987년 26.6% 177/630
5. 관련 문서
[1] 나중에 소련이 피아트와의 제휴로 볼가 강 유역에 VAZ 자동차 공장을 짓자 도시 이름을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톨리야티로 지었다.[2] 안토니오 그람시가 구속 수감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3] 이때 이탈리아 사회당과 이탈리아 민주사회당같은 사민주의 정당들도 공산당을 견제했다.[4] 이 때 베를링구에르 서기장이 자신은 천주교 신자라고 커밍아웃하고, 집권 시 NATO 탈퇴 당론을 폐기하는 등 공산주의와 상당히 거리를 뒀다.[5] 그러나 역대 이래로 최대득표에 최다의석이자 독자적 개헌저지선인 228석을 확보했다. 기민당 내 리버럴파 수장이었던 알도 모로 총리가 언론 인터뷰를 통해 공산당과의 거국내각 결성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집권 후 첫 수권정당이 될 가능성이 있었으나, 붉은 여단에 의해 모로 총리가 암살당하면서 흐지부지된다.[6] 이 때 공산당 내 급진파들은 이에 반발해 재건공산당을 창당했으나, 2008년 선거에서 원외정당으로 전락한 뒤 지지율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7] 역대 최다 의석 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