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에이센베이세르
1. 소개
루마니아의 전직 축구 선수이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
2. 선수 경력
2.1. 축구
1923년부터 얀 체르나우치[3] 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고, 1928년부터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했다. 그 당시의 활약으로 지방 리그에서 팀을 6위에 올려놓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조금 나은 성적인 5위의 성적표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1930년. 지역 라이벌 팀인 드라고슈 보다 체르나우치로 이적하였다. 이 무렵 그는 루마니아 대표팀에도 선발이 되어 초대 월드컵에도 출전하였다. 그 곳에서도 팀 성적은 이전 소속팀 얀과 큰 차이가 없었고, 1932년 드디어 루마니아의 빅 팀 중 하나인 베누스 부쿠레슈티로 이적하였다.
당시 베누스 부쿠레슈티는 이미 10번의 시즌 중 4회나 루마니아 챔피언을 차지한 경력이 있었던 팀이었고, 에이센베이세르는 1932년 10월 23일 데뷔전을 치렀다. 이듬해인 1933-34 시즌에 베누스 부쿠레슈티는 새로이 조직된 디비전에 참가했고, 상위 그룹에 속했다. 그 시즌에 그는 총 15경기에 출전하였고 그 와중에 프로에서 첫 득점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시즌 최종전에서 2연승을 이끌어 프로통산 첫 챔피언에 등극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조금 더 공격적인 롤을 주문받았고, 21경기에 출전하면서 3골을 득점하는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팀은 3위에 성적에 그쳤고, 다음해에는 포지션이 더 올라가고 8골을 넣었지만 팀의 성적은 더 떨어졌다.
하지만 1936-37 시즌에 다시 한 번 우승의 기쁨을 맛보았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도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트로파 컵에서는 헝가리의 위페스트 부다페스트에게 패하여 2라운드에서 탈락하였다.
1937-38 시즌에는 +46이라는 놀라운 골득실로 리그를 지배하는 듯 했지만 리펜시아 티미쇼아라에 밀려 2위에 그치는 불운을 맛보기도 했다. 이 시즌에 그는 11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득점하였다.
이듬해인 1938-39 시즌, 베누스 부쿠레슈티의 리더격이 된 에이센베이세르는 동료들과 함께 팀을 디비자 1의 지배자로 만들었다. 리펜시아 티미쇼아라를 승점 9점 차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팀의 7번째 디비자 챔피언, 그의 3번째 우승이었다. 하지만 그 시즌부터 에이센베이세르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다. 이 시즌에서 그는 단 8경기 출전에 그쳤던 것이다.
1940-41 시즌, 에이센베이세르는 14경기에 출전 3골을 기록하였다.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나름 만족할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다음 시즌이 중단되었고, 그의 리그 출전 기록은 1941년 8월 31일로 끝을 맺었다.[4]
1930년에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에 출전하였다. 그는 우루과이와 페루를 상대로 두 번 모두 경기에 출전하였지만 루마니아는 1위를 차지하지 못하였고, 4강 진출에 실패하였다. 그 이후에 그는 1939년까지 7회 더 경기를 소화하면서 총 9회의 대표팀 출장 기록을 남겼다.
2.2. 피겨 스케이팅
축구 선수로 활동하는 동시에 피겨 스케이터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이리나 팀시치와 페어로 활동하였고 루마니아 국가대표로 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도 출전하여 13위를 기록하였다. 그 밖에도 유럽선수권에도 2번[5] 출전하여 모두 7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3. 수상 기록
- 디비자 A 우승 3회:1933-34, 1936-37, 1938-39, 1939-40(베누스 부쿠레슈티)
- 쿠파 로므니에이 준우승 1회:1939-40(베누스 부쿠레슈티)
[1] 루마니아에서는 알프레드 피에라루(Alfred Fieraru)라는 이름으로 불렸다.[2] 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영토이다.[3] 체르니브치의 루마니아식 발음[4] 이후에는 컵 대회만 열렸다.[5] 1934년에는 이리나 팀시치와, 1939년에는 일리아나 몰도반과 페어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