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트 아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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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red W. Adler'''
1870년 2월 7일 ~ 1937년 5월 28일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의 의사, 정신의학자, 사회주의자이자 심리학자이다.
어렸을 때는 병약했으며 수레에 2번이나 치인 적이 있었고 홍역으로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1] 빈 대학교 의학부 선배이기도 한 프로이트의 강연에 매료되어, 그의 문하에서 '''빈 정신분석학회'''(WPV = Wiener Psychoanalytische Vereinigung = Vienna Psychoanalytic Society)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프로이트의 저서인 '''꿈의 해석'''을 서평했으나, 1912년 분파하여 '''개인심리학회'''을 창시했다. 프로이트의 범성욕설에 반대한 것인데, 덕분에 성에 대해 보수적인 교육자, 종교인들에게 그의 정신분석은 환영을 받았다.[2]
프로이트의 원인론적 분석에서 탈피하여 목적론적 분석을 기반으로 자신의 학설을 세웠다. 대표적인 것이 개인심리학이며, 이것은 신프로이트 학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들러와 입장을 같이하는 흐름을 "아들리안 학파" 라고도 부른다.[3]
1차 세계 대전 이후 빈에서 정신병원을 시작했으나 나치당이 아들러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 폐쇄시켰다.[4] 결국 그는 1934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1937년 5월, 강연차 스코틀랜드의 애버딘 대학교를 3주일 예정으로 찾았었는데 강연 뒤 심근경색으로 길거리에서 돌연사 했다.
아들러의 주된 관심은 우월함의 추구, 육체적 허약함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권력의 추구, 출생순위에 따른 성격의 형성 등이었으며 프로이트의 환원적인 관점과도 거리를 두었다. 아들러의 관점은 이후 의미치료의 창시자인 빅토르 프랑클에 의해 비판받기도 했다.
그리고, 과학의 기준으로써 반증주의를 제시한 칼 포퍼의 첫번째 비판거리가 되기도 했다. 칼 포퍼는 비엔나 대학 사회주의 서클에서 활동했으며 아들러 심리학에도 빠져 관련 사회사업까지 함께할 정도였으나, 마르크스주의와 아들러 심리학의 도그마성에 질려 둘 다 포기하게 되고, 비엔나 대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강의를 듣고 과학의 방법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결국 자신이 내놓은 반증주의에 대한 최초의 문헌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아들러 심리학을 반증불가능한 대표적 비과학이라고 비판하게 된다.
무의식을 정립하여 사상계를 뒤흔든 프로이트나 종교학, 문화인류학 분야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 융에 비해 아들러는 교육학, 교육심리,사회복지 분야에서 간간이 언급되거나 프로이트나 융을 언급할 때 묻어가는 식으로 언급될 뿐 그다지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들러의 목적론을 기반으로 일본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와 작가 고가 후미타케가 쓴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면서 최근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아들러와 그의 목적론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질투라는 관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는데 부러움은 적당할 경우 아주 정상적이고 유익한 사고방식이라고 한 반면 질투는 어렵고 위험한 정신자세라고 말하면서 질투심에 불탄 사람은 유익한 경우가 절대로 없다고 못을 박았다.
페미니즘에 대해선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지만 여성이 남성성을 추구하는 현상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지 이에 대한 서술을 길게 했는데 이 현상을 부러움의 특이한 유형으로 해석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가 1800년대 말~1900년대 초라는 걸 감안했을 때 그 당시 유럽사회에 퍼진 서프러제트 운동을 관찰하고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러 본인도 문화권에서 남자들이 우선적으로 선택되는 사실이 맞다면서 남자가 되기를 원하는 소녀들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도덕적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견해를 밝혔다. 그래서 소녀들이 남자같은 옷을 입고 다니거나 짧고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고 다니고 남자들이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유익하고 도덕적이나 소녀들이 남자의 이름으로 불리길 바라는 태도는 매우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당시 그렇게 안 부르면 화내는 소녀들도 몇몇 있었다고 하는데 그 태도가 단순한 장난이 아닌 좀 더 깊은 심리적 의미일 경우 미래에 성역할에 대한 불만과 결혼에 대한 혐오, 그리고 결혼 후 여자의 역할에 대한 혐오로 나타나서 남자들의 악덕을 택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쉽게 말하면 남자들 중에서 범죄나 트롤링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걸 남자들의 특권이라고 착각하면서 배울 거라는 의미. 아이러니한 점은 우리나라에선 아들을 바라던 베이비붐 세대가 딸을 낳으면 실패의 의미로 남자의 이름으로 지어서 딸의 존재를 부정하는 용도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간혹 남자 이름을 가진 할머니들이 이런 예시에 속한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1. 개요
'''Alfred W. Adler'''
1870년 2월 7일 ~ 1937년 5월 28일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의 의사, 정신의학자, 사회주의자이자 심리학자이다.
2. 생애
어렸을 때는 병약했으며 수레에 2번이나 치인 적이 있었고 홍역으로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1] 빈 대학교 의학부 선배이기도 한 프로이트의 강연에 매료되어, 그의 문하에서 '''빈 정신분석학회'''(WPV = Wiener Psychoanalytische Vereinigung = Vienna Psychoanalytic Society)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프로이트의 저서인 '''꿈의 해석'''을 서평했으나, 1912년 분파하여 '''개인심리학회'''을 창시했다. 프로이트의 범성욕설에 반대한 것인데, 덕분에 성에 대해 보수적인 교육자, 종교인들에게 그의 정신분석은 환영을 받았다.[2]
프로이트의 원인론적 분석에서 탈피하여 목적론적 분석을 기반으로 자신의 학설을 세웠다. 대표적인 것이 개인심리학이며, 이것은 신프로이트 학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들러와 입장을 같이하는 흐름을 "아들리안 학파" 라고도 부른다.[3]
1차 세계 대전 이후 빈에서 정신병원을 시작했으나 나치당이 아들러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 폐쇄시켰다.[4] 결국 그는 1934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1937년 5월, 강연차 스코틀랜드의 애버딘 대학교를 3주일 예정으로 찾았었는데 강연 뒤 심근경색으로 길거리에서 돌연사 했다.
3. 학문적 특징
아들러의 주된 관심은 우월함의 추구, 육체적 허약함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권력의 추구, 출생순위에 따른 성격의 형성 등이었으며 프로이트의 환원적인 관점과도 거리를 두었다. 아들러의 관점은 이후 의미치료의 창시자인 빅토르 프랑클에 의해 비판받기도 했다.
그리고, 과학의 기준으로써 반증주의를 제시한 칼 포퍼의 첫번째 비판거리가 되기도 했다. 칼 포퍼는 비엔나 대학 사회주의 서클에서 활동했으며 아들러 심리학에도 빠져 관련 사회사업까지 함께할 정도였으나, 마르크스주의와 아들러 심리학의 도그마성에 질려 둘 다 포기하게 되고, 비엔나 대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강의를 듣고 과학의 방법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결국 자신이 내놓은 반증주의에 대한 최초의 문헌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아들러 심리학을 반증불가능한 대표적 비과학이라고 비판하게 된다.
무의식을 정립하여 사상계를 뒤흔든 프로이트나 종교학, 문화인류학 분야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 융에 비해 아들러는 교육학, 교육심리,사회복지 분야에서 간간이 언급되거나 프로이트나 융을 언급할 때 묻어가는 식으로 언급될 뿐 그다지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들러의 목적론을 기반으로 일본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와 작가 고가 후미타케가 쓴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면서 최근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아들러와 그의 목적론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질투라는 관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는데 부러움은 적당할 경우 아주 정상적이고 유익한 사고방식이라고 한 반면 질투는 어렵고 위험한 정신자세라고 말하면서 질투심에 불탄 사람은 유익한 경우가 절대로 없다고 못을 박았다.
페미니즘에 대해선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지만 여성이 남성성을 추구하는 현상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지 이에 대한 서술을 길게 했는데 이 현상을 부러움의 특이한 유형으로 해석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가 1800년대 말~1900년대 초라는 걸 감안했을 때 그 당시 유럽사회에 퍼진 서프러제트 운동을 관찰하고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러 본인도 문화권에서 남자들이 우선적으로 선택되는 사실이 맞다면서 남자가 되기를 원하는 소녀들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도덕적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견해를 밝혔다. 그래서 소녀들이 남자같은 옷을 입고 다니거나 짧고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고 다니고 남자들이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유익하고 도덕적이나 소녀들이 남자의 이름으로 불리길 바라는 태도는 매우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당시 그렇게 안 부르면 화내는 소녀들도 몇몇 있었다고 하는데 그 태도가 단순한 장난이 아닌 좀 더 깊은 심리적 의미일 경우 미래에 성역할에 대한 불만과 결혼에 대한 혐오, 그리고 결혼 후 여자의 역할에 대한 혐오로 나타나서 남자들의 악덕을 택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쉽게 말하면 남자들 중에서 범죄나 트롤링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걸 남자들의 특권이라고 착각하면서 배울 거라는 의미. 아이러니한 점은 우리나라에선 아들을 바라던 베이비붐 세대가 딸을 낳으면 실패의 의미로 남자의 이름으로 지어서 딸의 존재를 부정하는 용도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간혹 남자 이름을 가진 할머니들이 이런 예시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