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해대교
押海大橋 / Aphae 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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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와 신안군을 잇는 교량. 압해로(2번 국도)의 일부이다. 무안반도 내륙과 압해도를 연결하는 첫 연륙교로 국내 최장 닐센아치교이다.
2000년 6월 공사를 시작해 2005년에 완공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전라남도와 건설교통부의 예산지원이 적기에 이뤄지지 않아 완공이 3년 더 미뤄졌다.# 늦춰진 공사 기간동안 상판과 안전시설을 설치해 4회에 걸쳐 임시 개통해왔으며, 공식 개통 전인 2008년 2월에도 설 연휴 귀성객들을 위해 임시 개통했다.#
과거에는 목포 북항이나 여객선터미널에서 출항하는 철부선에 의지해야 했었다. 연륙교 개통으로 주민들의 통행편의와 도선운임 비용 절감 효과를 보이고 있으며 2011년에는 목포시 북교동에 있었던 신안군청을 압해도로 이전하는 성과를 보였다. 다만 개통 후 압해도 인구 수는 관내 다른 지역에 비해 빠른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공사를 시작할 때부터 마칠 때까지 '압해대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가 개통을 앞두고 뜬금없이 전라남도측에서 이름을 '김대중대교'로 결정하면서 주민들의 갈등을 일으켰다. 관계자는 신안군에 공문을 보내 명칭 공모 홍보를 요청하고 인터넷 공모와 자문회의를 거쳐 결정했다고 답변했지만 정작 다리를 이용할 주민들은 대부분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모르기에 인터넷으로 여론조사 등을 한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항의했다.
압해읍이나 목포시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출신지도 아니었고 생뚱맞기도 하였으며 특정인의 본명으로 이름을 짓는 것은 전례가 없었다. 하물며 당시 도지사였던 박준영 지사는 전남도청 김대중강당, 김대중기념관 등 여러 시설물에 김대중이란 이름을 마구 사용하고 있어 주민들은 혹시 모를 정치적 의도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냈다.
2008년 5월 1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 자신의 실명을 사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입장을 밝혀 결국 재선정 절차에 들어갔다. 이후 22일 '이름 없는 다리'로 개통했다가 다음 6월에서야 주민의 뜻대로 '압해대교'로 명칭이 확정되었다.
이후 '김대중대교'라는 이름은 이대로 폐기되지 않고, 2013년 지자체간 갈등이 끊이질 않았던 무안 운남과 신안 압해를 잇는 연륙교에 부여되었다.
압해 방면 진입구 통행금지알림판
개통 당시 목포 시내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없었기에 목포 방면에서는 다리와 이어지는 고하대로의 자동차전용도로를 이용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현행법에 따라 이륜차, 농기계, 보행자는 출입할 수 없는데다가 연륙교 신설로 배편이 끊기면서 자동차가 없는 주민들에게선 급한 일이 있어도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구 도선장 인근 마을은 목포로 나가는 버스 노선에서 제외되어 어떤 방법도 없는 실정이다.
2016년 4월 25일에 접속도로인 대양산단진입도로가 개통돼 고하대로를 경유하지 않아도 바로 시내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주민들은 자동차전용도로 지정을 풀 것을 요구하지만 경찰 측에서 바람 등 기상 악화때 이륜차의 안전이 취약하다는 도로교통공단의 의견을 토대로 반대하고 있다.#
경관 조망을 위해 목포시 연산동에 세운 압해대교 전망대가 준공하기 전부터 곳곳에 비가 새고 녹이 스는 등 심각한 부실 상태를 보였다. 그리고 전망대가 위치한 곳은 고압전선이 바로 위로 지나가 위치 선정에도 빈축을 샀다.# 준공 5년 후에는 관리기관 하나 없이 방치되어 있으며 목포시 관광부서조차 전망대 존재를 모른다고 한다.# 2015년에는 입구 앞까지 주변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등 더 흉물스럽게 남아 버려져 있는 꼴이 되었다.##
2012년 8월에 내습한 태풍 덴빈과 볼라벤의 영향으로 압해대교의 일부 가로등이 조명 방향이 틀어지거나 조명갓이 떨어지는 등 훼손된 채로 몇 달간 그대로 방치되어 운전자들의 이용에 불편을 주었다.#
2011년 6월 27일 오후 10시 7분께 20대 남성이 압해대교 중간 지점에 차량과 유서, 휴대전화를 남기고 사라졌다.# 해경은 시신을 찾기 위해 종일 수색했지만, 실종 3일 후 30일에 형에게 전화한 사실이 해경의 행적 수사 중 확인되면서 수색 작업은 중단되었다. 2년간 사귀었던 애인으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아 죽기로 마음먹고 바다로 뛰어내렸지만 순간 죽기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교각을 붙잡다고 있다가 헤엄쳐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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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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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와 신안군을 잇는 교량. 압해로(2번 국도)의 일부이다. 무안반도 내륙과 압해도를 연결하는 첫 연륙교로 국내 최장 닐센아치교이다.
2000년 6월 공사를 시작해 2005년에 완공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전라남도와 건설교통부의 예산지원이 적기에 이뤄지지 않아 완공이 3년 더 미뤄졌다.# 늦춰진 공사 기간동안 상판과 안전시설을 설치해 4회에 걸쳐 임시 개통해왔으며, 공식 개통 전인 2008년 2월에도 설 연휴 귀성객들을 위해 임시 개통했다.#
과거에는 목포 북항이나 여객선터미널에서 출항하는 철부선에 의지해야 했었다. 연륙교 개통으로 주민들의 통행편의와 도선운임 비용 절감 효과를 보이고 있으며 2011년에는 목포시 북교동에 있었던 신안군청을 압해도로 이전하는 성과를 보였다. 다만 개통 후 압해도 인구 수는 관내 다른 지역에 비해 빠른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2. 논란
2.1. 교량 명칭 논란
공사를 시작할 때부터 마칠 때까지 '압해대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가 개통을 앞두고 뜬금없이 전라남도측에서 이름을 '김대중대교'로 결정하면서 주민들의 갈등을 일으켰다. 관계자는 신안군에 공문을 보내 명칭 공모 홍보를 요청하고 인터넷 공모와 자문회의를 거쳐 결정했다고 답변했지만 정작 다리를 이용할 주민들은 대부분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모르기에 인터넷으로 여론조사 등을 한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항의했다.
압해읍이나 목포시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출신지도 아니었고 생뚱맞기도 하였으며 특정인의 본명으로 이름을 짓는 것은 전례가 없었다. 하물며 당시 도지사였던 박준영 지사는 전남도청 김대중강당, 김대중기념관 등 여러 시설물에 김대중이란 이름을 마구 사용하고 있어 주민들은 혹시 모를 정치적 의도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냈다.
2008년 5월 1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 자신의 실명을 사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입장을 밝혀 결국 재선정 절차에 들어갔다. 이후 22일 '이름 없는 다리'로 개통했다가 다음 6월에서야 주민의 뜻대로 '압해대교'로 명칭이 확정되었다.
이후 '김대중대교'라는 이름은 이대로 폐기되지 않고, 2013년 지자체간 갈등이 끊이질 않았던 무안 운남과 신안 압해를 잇는 연륙교에 부여되었다.
2.2. 자동차전용도로 논란
압해 방면 진입구 통행금지알림판
개통 당시 목포 시내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없었기에 목포 방면에서는 다리와 이어지는 고하대로의 자동차전용도로를 이용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현행법에 따라 이륜차, 농기계, 보행자는 출입할 수 없는데다가 연륙교 신설로 배편이 끊기면서 자동차가 없는 주민들에게선 급한 일이 있어도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구 도선장 인근 마을은 목포로 나가는 버스 노선에서 제외되어 어떤 방법도 없는 실정이다.
2016년 4월 25일에 접속도로인 대양산단진입도로가 개통돼 고하대로를 경유하지 않아도 바로 시내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주민들은 자동차전용도로 지정을 풀 것을 요구하지만 경찰 측에서 바람 등 기상 악화때 이륜차의 안전이 취약하다는 도로교통공단의 의견을 토대로 반대하고 있다.#
2.3. 시설 관리 소홀
경관 조망을 위해 목포시 연산동에 세운 압해대교 전망대가 준공하기 전부터 곳곳에 비가 새고 녹이 스는 등 심각한 부실 상태를 보였다. 그리고 전망대가 위치한 곳은 고압전선이 바로 위로 지나가 위치 선정에도 빈축을 샀다.# 준공 5년 후에는 관리기관 하나 없이 방치되어 있으며 목포시 관광부서조차 전망대 존재를 모른다고 한다.# 2015년에는 입구 앞까지 주변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등 더 흉물스럽게 남아 버려져 있는 꼴이 되었다.##
2012년 8월에 내습한 태풍 덴빈과 볼라벤의 영향으로 압해대교의 일부 가로등이 조명 방향이 틀어지거나 조명갓이 떨어지는 등 훼손된 채로 몇 달간 그대로 방치되어 운전자들의 이용에 불편을 주었다.#
3. 사건사고
2011년 6월 27일 오후 10시 7분께 20대 남성이 압해대교 중간 지점에 차량과 유서, 휴대전화를 남기고 사라졌다.# 해경은 시신을 찾기 위해 종일 수색했지만, 실종 3일 후 30일에 형에게 전화한 사실이 해경의 행적 수사 중 확인되면서 수색 작업은 중단되었다. 2년간 사귀었던 애인으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아 죽기로 마음먹고 바다로 뛰어내렸지만 순간 죽기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교각을 붙잡다고 있다가 헤엄쳐 나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