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 맥코이스트
1. 개요
레인저스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공격수. 레인저스의 득점에 관한 기록은 죄다 이 양반이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레인저스 FC 역대 최고의 공격수'''
2. 클럽 경력
맥코이스트의 첫 프로 클럽은 세인트 존스턴 FC였다. 맥코이스트는 알렉스 퍼거슨이 이끌던 세인트 미렌에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키가 작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1979년 4월 맥코이스트는 존스턴에서 데뷔전을 가졌다. 맥코이스트의 데뷔골은 데뷔 3년차가 돼서야 터졌는데, 1980년 덤버튼을 상대로 넣은 것이다. 마수걸이 득점을 기록한 시즌인 1980-81 시즌, 맥코이스트는 시즌 23골을 넣으며 울버햄튼, 미들즈브러 등의 잉글랜드 클럽으로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1981년 맥코이스트는 잉글랜드의 선덜랜드 AFC로 구단 최고 이적료를 경신하며 영입되었다. 그러나 선덜랜드에서 맥코이스트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65경기에 나서 9골만을 기록했고, 멀티골은 단 1차례 뿐이었다.
1982-83 시즌이 끝나고 맥코이스트는 잉글랜드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레인저스 FC로 이적했다. 세인트 미렌을 상대로 멀티골을 폭격하며 인상적인 데뷔전을 가진 맥코이스트는 첫 시즌 20골을 넘겼고 리그컵 결승전에서 셀틱 FC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작렬하기도 했다. 레인저스에서의 15년간, 맥코이스트는 리그 9연패에 일조했고 총 10차례의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또한 1992, 1993년에는 유럽 최다 득점 선수가 되었고 1992년 스코틀랜드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당한 부상은 맥코이스트의 출전을 힘들게 만들었고 1994-95 시즌을 거의 통으로 날리다시피 했다. 그러나 클래스는 어디가지 않아서 꾸준히 레인저스를 떠날 때까지 10골 이상을 넣어주었다. 30대 중반이 된 맥코이스트는 레인저스를 떠나 킬마녹으로 이적했고 3시즌을 더 뛴 뒤 은퇴를 선언했다.
1994년 6월자 서훈명단(1994 Birthday Honours)에 올라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을 받았다.관보링크
3. 국가대표
1986년 네덜란드를 상대로 데뷔전을 가졌고 1998년까지 61경기에 나서 19골을 득점했다. 1990년 월드컵에 참가한 경력이 있으며 주장으로도 한차례 출전한 경력도 있다. 역대 스코틀랜드 대표팀에서 5번째로 많은 득점을 기록한 선수이다.
4. 지도자 경력
4.1. 수석코치
2004년 레인저스 시절 은사였던 월터 스미스를 따라 스코틀랜드 대표팀의 코치로 부임했다. 2006년 인버네스에게 감독직 제의를 받았으나 본인이 글래스고 근처에서 일을 하고 싶다며 거절했다. 2007년 월터 스미스를 따라 친정팀인 레인저스의 수석코치로 부임했다.
4.2. 레인저스 FC
2011년 2월에는 은퇴하는 스미스의 뒤를 이어 다음 시즌부터 레인저스의 정식 감독이 될 것임이 발표되었다. 레인저스에서 첫 시즌인 11-12 시즌 첫 상대인 하츠와의 경기에서 1-1로 비기며 시즌을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셀틱과 우승 경쟁을 했으나 셀틱에서 재정 문제로 10점이 삭감되었고 승점 20점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1]
레인저스는 파산을 선언했고 12-13 시즌 4부리그로 강등당했다. 맥코이스트는 어려운 상황에서 팀을 떠나지 않았고 압도적인 실력차로 4부리그를 간단히 우승했다. 13-14 시즌 레인저스는 3부리그에서 무패 우승을 차지했고 하부리그 클럽들이 참가하는 챌린지 컵에도 결승전에 올랐다. 그러나 챌린지 컵에서는 준우승에 그쳤다. 14-15 시즌 2부리그에서도 독주가 예상되었으나 고전했고 맥코이스트는 시즌의 반만 보낸채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5. 여담
개신교 성향으로 유명한 레인저스 FC에서 주로 활약했으나 가톨릭교 신자이다.
BBC에서 오랜 기간 방송 활동을 했으며 피파 시리즈의 해설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1] 26승 5무 7패로 83점이나 10점 삭감되어 73점. 참고로 3위인 마더웰과의 승점차는 그래도 9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