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사와 모토마사
柳沢元政
(1536 ~ 1613)
전국시대와 에도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아시카가 가문, 모리 가문, 도요토미 가문 등을 섬기다가 모리 가문을 섬긴 인물로 통칭은 신우에몬노이(新右衛門尉). 야나기하라 신우에몬의 아들로 자식으로는 야나기사와 케이스케, 야나기사와 모토키치 등이 있다.
아시카가 요시하루, 아시카가 요시테루,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섬겼으며, 요시테루에게 이름을 받아 야나기하라에서 야나기사와로 성을 바꿨다고 한다. 1569년에 혼코쿠지의 변으로 혼코쿠지에서 미요시 3인중의 습격을 받자 요시아키를 지켰으며, 7곳에 상처를 입어 요시아키로부터 말을 포상으로 받았다.
1573년에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의 대립으로 추방되자 우에노 히데마사, 마키시마 아키미츠, 다케다 노부카게, 롯가쿠 후지타카 등과 함께 빈고국 토모로 옮겨 토모 성에 입성하면서 모리 테루모토의 비호를 받았다. 요시아키를 비호하는 조건으로 모리 가문을 섬겨 스오 국의 중요 거점인 야마구치 코우노미네 성을 지켰으며, 1584년에는 막부의 가신이라는 입장을 이용하여 1584년에 히젠 국의 류조지 마사이에, 1585년에 사츠마 국의 시마즈 요시히사 등과 교섭하였다.
1592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분로쿠의 역)을 일으킬 때 히데요시가 가신으로 삼으려고 하자 모리 가문의 은혜를 다년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사퇴하겠다고 하자 이에 감동한 히데요시로부터 빈고 국과 이즈모 국에 영지를 받아 1만 석을 소유하면서 서쪽 지방의 대관과 이와미 은광의 광산 봉행(광산 부교)를 맡았다. 1600년에는 모리 가문의 가신으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모리 가문이 이봉되는 것에 동행하였으며, 1613년에 야마구치에서 사망하였다.
야마구치의 준류사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시카가 요시테루, 아시카가 요시아키, 케이쥬인[1] 의 공양탑을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