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미 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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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 개발을 위해 판 갱도를 마부(間歩)라고 하는데 현재 약 700개가 남아있다. 그 중에서 일반에 공개된 유일한 마부인 류겐지마부(龍源寺間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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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시마네현 오다시에 있는 은광 유적. 전국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 초기까지 일본 최대 규모의 은광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은광의 전성기에는 전 세계의 연간 은 생산량의 '''1/15'''를 차지할 정도였다.[5] 참고로 이 당시 일본 전체 은 생산량은 150톤 정도로 추정되며 세계 생산량의 30%다.
비슷한 곳으로 볼리비아의 포토시(Potosí) 은광이 있으며 이쪽은 아예 도시 규모의 은광으로 16세기 한때 전 세계 은 생산량의 '''60%'''인 250톤의 은을 생산하여, 막대한 은의 유럽유입으로 인한 인플레, 이른바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이쪽도 이와미 은광처럼 초반엔 부진하다 수은아말감법의 도입으로 막대한 생산량을 달성했다.
2. 역사
긴잔큐키(銀山日記) 등에 나타난 기록상으로는 14세기 초반부터 이미 일대에서 노천 채굴이 이뤄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인 광산 개발은 하카타의 상인 가미야 주테이(神屋寿貞)가 스오우의 오우치 요시오키의 지원을 받아 1526년에 시작했다. 이후 조선에서 건너온 연은분리법이 제대로 성공해 은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자 막대한 부를 생산해내는 이와미 은광을 노리고 주변에서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장 1537년에 윗동네 이즈모의 아마고 츠네히사가 오우치 요시오키가 영지를 비운 틈을 노리고 쳐들어와 광산을 점령한다. 2년 후 오우치 가문이 다시 은광을 탈환했지만 다시 2년 후 아마고 가문은 은광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최종 승리자는 오우치 가와 아마고 가를 모두 이기고 1561년에 주고쿠의 패자가 된 모리 모토나리였다.
이와미 은광을 점령한 모리 가는 광산과 주변을 개발하며 약 20년간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모리 데루모토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비호하면서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미 은광 덕분이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죽고 전국의 패권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넘어가자 데루모토는 히데요시에게 복속하였고 은광은 모리, 도요토미 가문의 공동 소유가 된다. 이로 인해 예상할 수 있는 결과처럼 이와미 은광은 임진왜란에 들어가는 군자금을 충당하기도 했다.
히데요시 사후 전국을 장악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세우면서 전국에 있는 금광과 은광을 모두 몰수한다. 그리고 각 광산을 관리할 사람을 보내는데 이와미 은광에는 오쿠보 나가야스(大久保長安)를 파견한다. 나가야스는 다시 광산을 전문적으로 경영할 사람을 두고 막부를 위해 본격적으로 은광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17세기 초반에 이와미 은광은 최대 전성기를 맞아 매년 막부에 15톤 가량의 은을 공물로 바칠 수 있었다. 이렇게 일본에 은이 넘쳐나게 되자 이는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던 네덜란드와 영국, 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들을 동아시아로 유혹하는 아주 좋은 조건이 된다. 또한 무역 거래를 통해 조선에 흘러들어간 일본 은이 조선 후기 경제를 지탱하는 기축통화 역할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은이 무한대로 산출되는 것은 아니므로 이와미 은광도 17세기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다. 갱도를 더 깊이 파야했고 그럴수록 채굴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한 것이다. 생산량을 보충하기 위해 새로운 갱도를 팠지만 폐쇄되는 갱도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럼에도 생산량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줄어들었다. 이 여파로 무역을 통해 조선으로 유출되는 은을 막부가 통제한 것이 18세기 이후 조선 경제 파탄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866년에 일어난 조슈 정벌에서 막부군이 조슈 번에 패배한 여파로 은광은 막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이어 대정봉환을 거쳐 메이지 시대가 열리자 새 정부는 이와미 은광을 민간에 넘겨 민영화해버린다. 운영권을 넘겨받은 회사는 이름을 오모리 은광(大森銀山)으로 바꾸고 재개발을 시도했지만 예전 같지 않은 채굴량과 구리 개발에 나섰다가 입은 손실, 몇 번의 자연재해를 겪은 끝에 운영을 포기하여 이와미 은광은 1943년 폐광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이와미 은광 쥐잡이(石見銀山ねずみ捕り)'''라는 쥐약이 유명했다. 이것은 삼산화 비소 화합물로 만든 쥐약으로 약칭으로는 '''이와미 은광(石見銀山)''' 또는 '''고양이 불필요(猫いらず)'''라고도 불렸으며 에도 시대 가부키, 괴담, 라쿠고 등에서도 주요 소재로 다뤄졌을만큼 유명한 독극물이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서 길가를 지나다니는 상인이 이와미 은광을 외치거나, 독살당한 시체의 부검 수사를 담당한 난방 의사가 이건 이와미 은광이다라며 부교쇼(奉行所, 지방관청)의 도신(同心, 관청에 소속된 하타모토 출신 관원들)들에게 적들의 실체와 단서를 알려주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제시된 대사이다.
물론 이와미 은광 쥐잡이는 이와미 은광에서 만들지 않았다. 실제로 이와미 은광에서는 비소가 산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시기 이와미노쿠니(石見国) 서남부에 소재했던 사사가타니 광산(笹ヶ谷鉱山)에서 산출된 비소화합물로 만든 것이다. 원래 사사가타니 광산은 동과 아연의 채굴장으로 유명했으나, 별도로 생산되던 비소를 이용해 쥐약을 만들었고, 상품화 과정에서 이와미 은광의 인지도를 빌려 팔아먹은 것이다. 그만큼 이와미 은광의 인지도가 높았던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로 인해 비소가 전혀 생산되지 않던 이와미 은광에서는 은 산출량 감소에 따라 은광보다는 쥐약으로 전국적인 인지도를 쌓게 되면서 쥐약 생산지라는 오해가 생겨나게 되었다.
2007년 '''이와미 은광과 문화 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이와미 은광과 광산촌, 항구까지 은을 반출하기 위해 만든 가도(街道), 항구마을, 은광 개발 초기 쟁탈전 당시 축조했던 산성의 성터, 사원 등 14곳의 유적을 묶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3. 등재 현황
3.1. 은광 유적과 광산 마을
- 긴잔사쿠노우치(銀山柵内)
은광 개발 당시 주변에 두른 목책과 내부의 각종 유물들.
- 다이칸쇼 터(代官所跡)
은광을 지원하기 위한 대기소, 간이 감옥 용도의 건물.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 라칸지 오백나한(羅漢寺五百羅漢)
암반 3곳에 굴을 파서 각각 불상과 오백나한을 안치했다.
- 미야노마에 지구(宮ノ前地区)
다이칸쇼 터 근처에 있는 은 제련공방 유적.
- 오모리 은광 중요 전통 건조물군 보존지구(大森銀山伝統的重要建造物群保存地区)
오모리 마을은 은광 근처에 있는 광산촌으로 에도 시대의 무사들과 상인들의 옛 저택과 사원, 신사 등 150채 가량의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있다.
- 야타키 성터(矢滝城跡)
은광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했던 산성 유적으로 은광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유노쓰오키도마리도를 두고 야하즈 성터와 마주하고 있다.
- 야하즈 성터(矢筈城跡)
은광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했던 산성 유적으로 유노쓰오키도마리도를 사이에 두고 야타키 성터와 마주하고 있다.
- 이와미 성터(石見城跡)
은광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했던 산성 유적으로 은광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 쿠마가이가 주택(熊谷家住宅)
광산촌에서 가장 큰 건물로 당시 유력했던 상인의 저택.
3.2. 이와미 은광 가도
- 유노쓰오키도마리도(温泉津沖泊道)
은광에서 온천마을 유노쓰와 오키도마리 항구까지 이은 12km의 도로.
- 도모가우라도(鞆ヶ浦道)
은광에서 도모가우라 항구까지 은과 은광석을 반출하기 위해 만든 7km의 도로.
3.3. 항구와 항구 마을
- 도모가우라(鞆ヶ浦)
- 오키도마리(沖泊)
16세기 후반에 주로 사용된 항구로 은의 수송과 물자 보급, 군사 시기 역할을 담당한 항구.
- 유노쓰 중요 전통 건조물군 보존지구(温泉津伝統的重要建造物群保存地区)
오키도마리의 배후에 있는 마을로 고풍스러운 온천마을로 유명하다. 오모리 마을만큼 이곳도 에도 시대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