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부사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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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鏑馬
1년에 1번 신사에서 주최하는, 달리는 말 위에서 3개의 과녁을 맞추는 일본의 의식 내지 행사.
과거에는 말의 기동성을 살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되 화살을 계속해서 쏘는 형태를 강조했으나, 총포 기술이 발달해 기병이 도태된 후에는 화살을 빠르게 쏘는 것보다는 말을 타고 계속 이동하며 사격하는 것을 보다 강조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신토의 비호 아래 신사의 행사로 살아남아 있어서, 실전 무술로서는 사실상 명맥이 끊긴 셈이다. 이 외에도 카사가케(笠懸), 이누오모노(犬追物) 등의 전통 기마궁술이 있었으나 총포가 발달하면서 효용성이 급감해 모두 맥이 끊어졌다.
카사가케는 109m의 마장에서 진행하며 야부사메와 비슷하나 과녁 좌우로 대나무판을 달아 활을 쏘는 시간을 정확히 맞추지 않으면 명중할 수 없는 형태로서, 순간적으로 좁은 곳을 맞추는 데에 특화되어 있었다. 이누오모노는 마장에 개를 풀어 놓고 달리는 말 위에서 달리는 개를 쏘아 맞추는 궁술이었다.
문헌으로 남은 기록상 헤이안 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며 가마쿠라 시대에 정립되었는데, 이름을 떨치는 장수가 자신들의 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그 활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일종의 과시용 전술에 뿌리를 둔다. 하지만 병법이 발달하여 대규모 단위의 전술이 확립되고 총포가 보급됨에 따라 일기당천의 장수가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 봐야 멀리에서 총을 쏘면 허무하게 죽어 버리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또한 말 한 마리의 유지비와 장수 한 사람의 녹봉이 총포 두어 기의 운용비와 맞먹다 보니 이래저래 효율이 맞지 않았으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쇠퇴하여 맥이 끊어졌다.
도쿠가와 막부가 일본을 통일하면서 맥이 일시 끊어졌으나,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명령을 받은 자들이 신토의 요소를 혼용시켜 파마시를 사용하는 액막이용 제례 행사로 명맥을 유지하다 막부 지정 전문 천연두 액막이용 종교법인으로 인증을 받는 데에 성공한다. 검술이 살상력과 예의작법을 중시하며 검도로 살아 남은 것에 자극을 받은 야부사메의 사용자들은 자신들의 무술인 실전형 기마궁술이라 주장하며 말 위에서 자세를 바꾸며 쏘거나 연속해 쏘는 등의 퍼포먼스성 기술을 선보이며 대중에게 어필했고, 무녀들이 말을 타고 활을 쏘게 하는 등의 퍼포먼스를 강조,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인기 있는 무예로 자리잡으려는 찰나에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 후원자였던 막부가 해체되고, 그 뒤에 다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는 등의 일이 잇따라 액막이 행사 수준으로 돌아가, 지금은 신토의 행사로 정착했다.
신사에서 모시는 신의 종류나 신사가 내세우는 예의작법에 따라 다르지만 직선 거리로 2정(町)[1] 의 코스를 만들고 왼편에 세개의 목표를 세워 두며, 파마시를 가지고 있는 기수가 야부사메의 신토정복을 입고 말에 오른 후 신주가 신호를 하면 말을 타고 달리며 표적을 맞추어 길흉화복을 점치고 기원의 성공을 바란다.
항목 참조
남아있는 자료들을 보아도 실전 기마궁술이라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 맞추는 것보다 화살을 쏘아 적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린 뒤 말의 기동력을 살려 후퇴하는 것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전술했듯이 일기당천의 장수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로 발달한 만큼 전장을 휘젓는 형태로 발달하게 되었고 그 결과물이 계속 이동하며 사격한다는 것인데, 이건 어디까지나 총이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에나 통하던 방식인데다 카사가케나 이누오모노 등 보다 실전적인 기마궁술들이 있었기에 딱히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의 개입으로 재정립된 뒤에는 제례 의식과 예법이 강조되어, 실전용이라기보다 행사용으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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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도 '유적마(流鏑馬)'라는 같은 명칭의 기사훈련이 있었다. 연관성은 불명.
1. 개요
流鏑馬
1년에 1번 신사에서 주최하는, 달리는 말 위에서 3개의 과녁을 맞추는 일본의 의식 내지 행사.
2. 상세
과거에는 말의 기동성을 살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되 화살을 계속해서 쏘는 형태를 강조했으나, 총포 기술이 발달해 기병이 도태된 후에는 화살을 빠르게 쏘는 것보다는 말을 타고 계속 이동하며 사격하는 것을 보다 강조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신토의 비호 아래 신사의 행사로 살아남아 있어서, 실전 무술로서는 사실상 명맥이 끊긴 셈이다. 이 외에도 카사가케(笠懸), 이누오모노(犬追物) 등의 전통 기마궁술이 있었으나 총포가 발달하면서 효용성이 급감해 모두 맥이 끊어졌다.
카사가케는 109m의 마장에서 진행하며 야부사메와 비슷하나 과녁 좌우로 대나무판을 달아 활을 쏘는 시간을 정확히 맞추지 않으면 명중할 수 없는 형태로서, 순간적으로 좁은 곳을 맞추는 데에 특화되어 있었다. 이누오모노는 마장에 개를 풀어 놓고 달리는 말 위에서 달리는 개를 쏘아 맞추는 궁술이었다.
3. 변천
문헌으로 남은 기록상 헤이안 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며 가마쿠라 시대에 정립되었는데, 이름을 떨치는 장수가 자신들의 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그 활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일종의 과시용 전술에 뿌리를 둔다. 하지만 병법이 발달하여 대규모 단위의 전술이 확립되고 총포가 보급됨에 따라 일기당천의 장수가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 봐야 멀리에서 총을 쏘면 허무하게 죽어 버리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또한 말 한 마리의 유지비와 장수 한 사람의 녹봉이 총포 두어 기의 운용비와 맞먹다 보니 이래저래 효율이 맞지 않았으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쇠퇴하여 맥이 끊어졌다.
도쿠가와 막부가 일본을 통일하면서 맥이 일시 끊어졌으나,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명령을 받은 자들이 신토의 요소를 혼용시켜 파마시를 사용하는 액막이용 제례 행사로 명맥을 유지하다 막부 지정 전문 천연두 액막이용 종교법인으로 인증을 받는 데에 성공한다. 검술이 살상력과 예의작법을 중시하며 검도로 살아 남은 것에 자극을 받은 야부사메의 사용자들은 자신들의 무술인 실전형 기마궁술이라 주장하며 말 위에서 자세를 바꾸며 쏘거나 연속해 쏘는 등의 퍼포먼스성 기술을 선보이며 대중에게 어필했고, 무녀들이 말을 타고 활을 쏘게 하는 등의 퍼포먼스를 강조,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인기 있는 무예로 자리잡으려는 찰나에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 후원자였던 막부가 해체되고, 그 뒤에 다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는 등의 일이 잇따라 액막이 행사 수준으로 돌아가, 지금은 신토의 행사로 정착했다.
신사에서 모시는 신의 종류나 신사가 내세우는 예의작법에 따라 다르지만 직선 거리로 2정(町)[1] 의 코스를 만들고 왼편에 세개의 목표를 세워 두며, 파마시를 가지고 있는 기수가 야부사메의 신토정복을 입고 말에 오른 후 신주가 신호를 하면 말을 타고 달리며 표적을 맞추어 길흉화복을 점치고 기원의 성공을 바란다.
4.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
항목 참조
5. 실전성
남아있는 자료들을 보아도 실전 기마궁술이라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 맞추는 것보다 화살을 쏘아 적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린 뒤 말의 기동력을 살려 후퇴하는 것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전술했듯이 일기당천의 장수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로 발달한 만큼 전장을 휘젓는 형태로 발달하게 되었고 그 결과물이 계속 이동하며 사격한다는 것인데, 이건 어디까지나 총이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에나 통하던 방식인데다 카사가케나 이누오모노 등 보다 실전적인 기마궁술들이 있었기에 딱히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의 개입으로 재정립된 뒤에는 제례 의식과 예법이 강조되어, 실전용이라기보다 행사용으로 변모했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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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도 '유적마(流鏑馬)'라는 같은 명칭의 기사훈련이 있었다. 연관성은 불명.
[1] 미터법으로 환원 시 약 218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