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요시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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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손손에게 검약(검소와 절약)하도록 가르쳐라. 그러나 상인과 농민에게 검약을 강요하지 마라.
1. 개요
에도 막부의 8대 쇼군이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증손자. 기슈 번의 번주였으나 1716년에 7대 쇼군 이에츠구가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직계가 끊기자 요시무네가 쇼군직을 이어받았다. 흔히 도쿠가와 막부 중흥의 선조(徳川幕府中興の祖)로 평가받는다. 조선의 왕으로 치면 영조 포지션쯤 되는데 같은 시대 인물이다.
2. 초기 생애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실의 자식들이 분가하여 도쿠가와 방계의 세 가문, 즉 고산케를 이루었다. 요시무네는 1684년에 고산케 중 기이번(紀州藩)의 2대 번주 도쿠가와 미츠사다(徳川光貞)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요시무네의 어머니는 정실도 측실도 아니라 목욕을 돕는 하녀였다. 아버지 미츠사다가 60살 때 목욕을 돕는 하녀와 정분이 난 바람에 늦둥이로 태어난 것이다.[2] 그래서 카쿠시코(숨겨논 자식)으로 취급받아 미츠사다의 측근 가신이 맡아서 키웠다. 유명(아명)은 겐로쿠(源六). 통칭은 신노스케(新之助)
1697년 4월(만14세), '개 쇼군'으로 유명한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가 기슈 번의 에도 저택을 방문했을 때 서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카즈라노번(현재의 후쿠이현의 한 지방)의 번주로 임명되고 정치를 배웠다. 번주가 되었지만 본인은 집에서 아버지와 형들과 생활하고, 실제 행정은 아버지의 가신이 파견되어 맡았다.
쇼군은 커녕 지방 번주가 될 가능성도 아예 없는 처지였는데, 우연인지 음모인지 모를 우여곡절 끝에 쇼군이 되었기 때문에 그 과정을 두고 후세에 여러 음모설이 생겼다.
아버지의 바람끼 때문에 하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탓에, 쇼군가 혈통으로 고산케의 일원이자 카즈라노 번의 번주라고는 해도 3만 석(실제로는 5천 석) 규모 다이묘로 체면치레만 할 정도일 뿐 그리 대단한 위치가 아니었다. (참고로 큰형 츠나노리는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장녀와 결혼하여 쇼군가와는 사돈지간 집안이었다.)
1705년, 요시무네의 큰형이자 기이 번의 3대 번주였으며, 쇼군 츠나요시의 사위로서 6대 쇼군 후보자기도 했던 츠나노리가 만39살에 후사도 없이 죽었다. 둘째 형은 어릴 때 요절했으므로 셋째 형 요리모토가 번주직을 이었다. 그런데 같은 해에 아버지와 셋째 형 요리모토(26살)가 연이어 사망하여 요시무네가 22살 나이로 기이 번의 5대 번주가 되었다. 이후 쇼군 츠나요시에게서 편휘(偏諱)를 하사받아 '요시무네'란 이름으로 바꾸었다.[3][4]
아버지와 형들의 잇따른 죽음이 석연치 않았기에[5] 요시무네와 그 측근들이 독살하지 않았는가 여기는 시각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시무네는 다이묘 시절부터 밀정들을 잘 활용하였으며, 쇼군 즉위 과정에서도 여러 음모의 흑막으로 간주되었다.
쇼군직의 라이벌이었던 오와리번의 번주와 그 아들도 한두 달 간격을 두고 식중독으로 죽었는데, 요시무네 측이 꾸민 음모라는 오와리번의 기록에 의하면 오와리 번주가 죽었을 때 오와리 번의 에도 저택 인근에 기슈 번의 밀정이 얼쩡거렸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요시무네의 친모가 약제사 가문 출신이라 약을 잘 알았으므로 친모가 식중독(?)을 주도했다는 음모설이 있다.
가문을 승계하여 요시무네가 기슈 번의 번주가 되었으나, 아버지와 형의 연달은 장례식과 재해 때문에 가분의 재정상태는 빈곤하기 그지없었다. 취임 시점에서 기슈 번은 빚이 약 10만 냥, 현재 시가로 약80억 엔에 달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요시무네는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하고 황무지를 개간해서 새로운 논을 만드는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번주가 되고 12년만에 번의 빚을 다 갚고, 금 12만 냥과 쌀 11만 석을 비축했다. 또한 백성들을 굽어살피기 위하여 직소를 허용했다.[6]
이대로라면, 한 지방 영주로 나름 휼륭한 행정가로 일생을 마칠 것 같아 보였는데...
1716년 3월, 에도 막부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구(8살)가 감기가 악화되어 위독해졌다. 이에츠구는 나이가 어려 후사가 없었고[7] ,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동생 (다테바야시 번주) 마츠다이라 키요타케(松平清武)는 고령이고 남자 후손이 없으며 쇼군 자리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차기 쇼군 후보자가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기 전에 남긴 후계자 선정방식에 따라 방계가문 고산케에서 처음으로 차기 쇼군을 뽑기로 하고 후보 3명을 골랐는데, 요시무네도 그 안에 들었다.
쇼군직을 두고 고산케의 후계자 서열 1위인 오와리번의 번주 츠구토모(25살)와 요시무네가 경쟁하였다. 6대 쇼군 이에노부의 측실이자 이에츠구의 생모인 겟코인(月光院) 오키요(32세)와 이에노부의 측근으로 권력을 누리던 마나베 아키후사(間部詮房)는 츠구토모를 지지하였고, 가신들 다수과 이에노부의 정실 텐에이인(天英院) 히로코(57세)는 요시무네를 지지했다. 아직 어린 츠구토모보다는 행정실적이 있고 유능한 요시무네가 막부를 잘 이끌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1714년에 일어난 에지마-이쿠시마 사건(江島生島事件)으로 겟코인파는 권력을 잃고 텐에이인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 결과, 1716년 6월에 8살 나이로 요절한 도쿠가와 이에츠구의 뒤를 이어, 요시무네(당시 33세)가 에도 막부의 제8대 쇼군이 되었다.
3. 치세
쇼군이 된 후로는 그 때까지의 정치경험을 살려서 정치형태를 쇼군의 친정으로 전환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 본인이 검약함[8] 은 물론, 가신들의 녹봉을 줄이는 등, 겐로쿠 시대의 버블경제가 꺼진 후 심각한 재정악화로 빚더미에 오른 에도 막부의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돈 먹는 하마 오오쿠에 대한 대대적 개혁을 펼쳐서 3천 명이 기거하는 오오쿠에서 350명을 내치기까지 했다.
요시무네는 오오쿠에서 젊고 예쁜 미녀 50명을 뽑으라는 명을 내렸다. 누구나 다음 측실 후보를 뽑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선발된 미녀들 앞에서 요시무네가 말하길, '''"너희들은 아직 젊고 예쁘니, 좋은 혼례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거라."'''
이 일로 덴에이인이 분노하여, 요시무네와 덴에이인은 덴에이인이 오오쿠에서 퇴거할 때까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9] 관료제도를 재구축하고[10]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여 등용했으며[11] 무료진료소를 건설하여 서민들의 공중위생을 돌보았으며 쇼군가의 권력약화의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지켜지던 쇄국을 부분적으로 완화시켜 해외의학을 받아들이기를 허락했다. 또한 국력의 약화를 우려하여 무예를 장려하였고 기근 문제를 해결하고 연공미를 증대시킨 것을 보충시키고자 고구마나 감자를 심게 하였다. 그밖에도 1728년 조선 인삼을 이식하는 데 성공하여 유출되는 금은을 줄였다. 민생에서도 당시 유행하던 동반자살을 줄이기 위해서 동반자살을 하다가 실패하거나 붙잡힌 자들을 끌어내어 수치심을 주도록 하였다. 그 밖에도 오니와반슈을 설치하여 역심을 품거나 부패한 관리들을 색출했고 민초들의 삶을 살폈다. 네덜란드에서 들어온 과학기술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실용적인 성격이었다.
쇼군 취임 전에 빚 48만 냥(384억 엔)에 허덕이던 막부의 재정을 취임 후 15년 만에 100만 냥(800억 엔)의 흑자재정으로 만들었다.
그 업적은 '도쿠가와 막부 중흥의 선조'라는 평가에 걸맞지만 일련의 개혁은 막대한 비용을 요구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다이묘들에게서 쌀을 걷는 대신 참근교대[12] 를 단축하게 하여 막부의 재정이 결국에는 다이묘와 각번에 의존한다는 것을 다이묘들에게 깨닫게 했고, 세금을 오공오민으로 하여 백성들을 가난하게 만들었으며 사치를 금지하여 문화와 예술이 정체되도록 했다.
요시무네가 '쌀 쇼군'이라고 불리는 것은 쌀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심했기 때문이다. 기슈 번에서 대대적인 개간사업으로 쌀 수확량을 늘렸던 경험을 바탕으로 쇼군 취임 후 전국적인 개간사업을 시행했는데, 일본 전체에서 쌀 수확량이 폭증하자 쌀의 가치가 떨어져 월급을 쌀 기준으로 받던 사무라이 공무원들은 심각한 타격을 받고 불경기가 찾아왔다. 요시무네는 막부 차원에서 쌀을 엄청나게 사들였지만 어찌나 개간사업이 잘 되었는지 이것으로는 역부족이었고, 새로운 화폐를 유통시킨 뒤에야 쌀값이 안정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물가도 안정되었으니 메데타시 메데타시.
손자 도쿠가와 이에하루를 후계자로 점찍었기 때문에 후계자 자리를 (병약하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에하루의 아버지 이에시게에게 징검다리 격으로 물려주었으며[13] 쇼군직을 승계한 뒤로도 자신이 오고쇼(大御所), 즉 은퇴한 쇼군으로서 권력을 휘둘렀다.
그의 재임기는 조선의 숙종 재위기 후반, 경종 재위 전체, 영조 재위기 중반과 일치한다.
4. 가계
이 곳 참조.
5. 일화
무예를 좋아하고, 가노 츠네노부의 사사를 해서 그림을 좋아했다.
코끼리를 좋아해서 코끼리를 수입해 나가사키에서 에도까지 육로로 옮기게 했다. 그 때문에 에도에 코끼리 붐이 일어났다.
아라비아 종의 말을 수입해 품종 개량을 시도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에도 말 편자는 보급되지 않았다. (일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말 편자 기술을 메이지 유신 때에야 도입하게 되어서 그 이전까지는 말 짚신(...)만을 사용했었다.)
6. 서브컬쳐
시대극 망나니 장군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이 시대극은 30년 가까이 계속되었으며 방송이 종료된 후로도 가끔씩 다시 기획되는 인기 시리즈이다. 또한 망나니 장군말고도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 중에도 1995년작 "8대 쇼군 요시무네(八代将軍吉宗)"[14] 처럼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대하 사극이 여럿 있을 정도로 인기있는 인물로 일본인들은 이 사람에서 망나니 장군의 주역배우인 마츠다이라 켄을 떠올린다.
이 망나니 장군의 인기는 대단해서 다른 매체에서 패러디 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같은 시기를 다룬 또 다른 작품인 오오오카 에치젠[15] 에서는 '''성깔 더러운 희대의 다혈질 쇼군이지만 호탕하고 만민의 안정된 생활을 바라는 인물'''로 묘사된다. 통치능력과는 별개로 극도로 신경질적이고 완고한데다 대놓고 혹은 은근히 사람 속을 긁어대는 말을 하는 유아독존형 인물로 에치젠을 방해하거나 괴롭히다가도 결국에는 도와주는 츤데레이자 공대 내부의 적 포지션. 똘기가 장난아닌 냉혈한이지만 한편으로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버린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도 가지고 있다.[16] 그리고 의외로 입맛이 소박한 편인데다 '''중증 꽁치 덕후'''로 조카마치에 암행을 나올 적이나 타다스케의 집에 들르면 항상 식사로 꽁치구이 백반을 즐긴다. 여러 사건에 휘말리다보니 타다스케를 골치아프게 한 일도 더러 있으나, 요시무네 덕분에 사건을 해결한 적도 상당히 많다. 초창기에는 워낙 성격이 안 좋았지만, 후기에는 나이를 먹어서인지 유순하고 유머러스한 성격이 더 강조되었다.
코이케 카즈오作 코지마 고세키畵의 만화 냉혈한[17] 은 요시무네의 뭔가 미심쩍은 즉위과정과 오오쿠와의 대립 등이 주요 에피소드 중 하나고 그의 숨겨둔 자식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인피니티에 등장하는 유징 제국의 오니와반은 요시무네가 설치한 실존기구인 오니와반이 모티브가 되었다. 이 오니와반은 암행어사같은 존재였지만 후대에서는 그들의 은밀함만을 때어놓고 닌자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도 전부 서브컬쳐의 영향.
바람의 검심에 등장하는 어정번중[18] 도 오니와반을 약간 틀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것도 사극같은 것의 영향.
모 출판사의 코믹판 일본의 역사 시리즈는 헤이안 시대, 전국시대, 에도 시대, 막부 말기를 넘나들며 수많은 인물들(때로는 역사적 사건들)을 출간해오고 있으며 도쿠가와 쇼군 중에서 이에야스, 이에미츠, 요시노부가 출간되었으나 이 요시무네는 현재까지도 도통 출간을 하지 않고 있다.
7. 참고 자료
- # 일어 위키백과 요시무네 항목
- 그 때 역사가 움직였다 その時歴史が動いた 徳川吉宗、執念の財政再建 - 米将軍・最後の決断
[1] 키는 위패의 키로 추정한거고 혈액형은 도쿠가와 이에츠나처럼 O형이었다고 보고되어 있다.[2] 무수리 출신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조선 영조와 비슷하다.[3] 편휘란 윗사람의 이름자 중 하나를 아랫사람이 하사받아 자신의 이름으로 삼는 것이다. 보통은 이름의 앞 글자로 하고, 다른 글자를 붙여 이름을 만들었다. 요시무네(吉宗)의 요시(吉)가 츠나요시(綱吉)에서 따온 것이다.[4] 요시무네의 묘비는 츠나요시의 묘비가 있는 절 안에 있다. 새로 절을 세우지 말고 그 돈을 절약하라고 유언했다.[5] 셋째 형은 향어를 먹고 식중독으로 피를 토하고 죽었다.[6] 원래 에도 시대에 농민이 다이묘와 쇼군에게 직소하면 행차를 방해한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7] 8살 때 혼약은 했지만 약혼자의 나이가 3살(...)[8] 쇼군 스스로 하루 두 끼만 먹고 반찬은 3가지로 단촐. 검약했던 점도 영조와 흡사한데, 영조도 왕의 하루 다섯 끼 식사를 세 끼로 줄였고 채소 반찬 서너 가지로만 끼니를 떼웠다.[9] 일설에는 후계자인 도쿠가와 이에시게가 실은 '''여자였고''' 오와리 도쿠가와 번주가 먼저 아들을 낳아버린 탓에 차기 후계자 자리에서 밀리지 않을까 염려한 요시무네가 이에시게를 남자로 키웠다고 한다. 이를 숨기기 위해서 오오쿠에 이에시게를 맡겨 키웠는데 덴에이인이 이를 알아낼까 염려해 자신이 키슈번에서 거느리던 오오쿠를 중심으로 에도 오오쿠를 재편하기 위해 350명을 내쳤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즉 자신이 신뢰하는 자들로 오오쿠를 장악하기 위해 벌인 행보라는 것.[10] 로쥬(老中) 제도를 해체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로쥬 중 한 명에게 재정 분야의 전권을 위임하는 등, 분야별로 로쥬의 업무를 할당했다. 이전까지 막부 내의 상급 의사결정 구조가 전문화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11] 가장 유명한 것이 오오오카 타다스케(大岡忠相). 최하급 고케닌에서 에도 부교(奉行)와 사찰 부교를 거쳐서 1만 석 다이묘로 출세했다. 에도 부교 근무 기간이 20년으로 이 기간 동안 오오오카가 판결한 사건들을 소재로 한 이야기책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에도 부교였지만, 정작 오오오카 자신은 재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재판 이야기책은 순전히 소설이다.[12] 산킨코타이. 다이묘가 에도에서 일정기간 출사하는 것. 사실상 다이묘를 인질로 잡아서 쇼군의 위세를 널리 알리고 각 다이묘들의 세력을 견제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한, 에도와 영지를 주기적으로 오가게 하여 다이묘 본인은 물론 수행원들의 여행 경비를 주기적으로 소모시켜 영지의 부를 축적하는 것을 막아 다이묘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목적도 있었다.[13] 중국에서 똑똑한 손자 홍력을 보고 후계자를 선정한 강희제의 사례도 있다.[14] 이 작품에서는 당시 일본 사정과 맞물려 요시무네의 정치 개혁에 촛점을 맞췄다. 덧붙여 이 사극에서 요시무네를 맡은 배우 니시다 토시유키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아오이 도쿠가와 3대) 역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공명의 갈림길, 카게무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맡는 등 도쿠가와 막부 쇼군 전문배우로 유명하다. 그 외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도 연기한 적 있어서 현재 일본 배우 중 전국 3영걸을 두 명 이상 연기한 유일한 배우라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문 배우 타케나카 나오토와 비슷한 케이스.[15] 상기한 요시무네 시대의 미나미마치 봉행 오오오카 에치젠노카미 타다스케을 모티브로 제작한 작품. 카토 고 주연으로 70~99년까지 '''일본의 판관 포청천'''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사극으로 2005-06년은 키타오오지 킨야가, 2013년에는 소년대의 히가시야마 노리유키가 연기하면서 리메이크 되었다.[16] 대표적인 것이 바로 텐이치보 사건(天一坊事件)이다.[17] 원재 乾いて候[18] 御庭番衆. 오니와반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