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순봉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엄순봉은 1906년생이며 경상북도 영양군 대천하면 옥산리 출신이다. 그는 농촌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 농업 및 노동에 종사했다. 그러다가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면서 한인에 대한 중국인의 적대감이 고조되자 안주할 땅을 찾아 중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상하이 부근 남상의 입달학원(立達學院) 교사 유자명에게 포섭되어 남상에서 5리 떨어진 남당에서 농업에 종사했다. 그는 유자명으로부터 아나키즘을 전수받고 아나키스트로 변모했다.
1932년 12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의 복이리로정원방(福履理路亭元芳)에서 백정기, 원심창 등의 설득을 받아들여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1933년 5월 오면직, 주열(朱烈), 안경근 등과 함께 일제 영사관 밀정 이종홍(李鐘洪)을 처단했다. 그해 8월 1일엔 정화암과 함께 평소 아나키스트들과 적대 관계였고 일본 관헌과 내통하고 있다는 오해를 사고 있던 옥관빈(玉觀彬)을 권총으로 살해했다.(옥관빈 피살사건)
이후 상해남화한인청년연맹(上海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당원이 된 후, 일본공사인 아리요시(有吉明)가 아나키스트들을 탄압하고 중국 국민당 인사들을 4,000만원으로 매수하여 만주를 포기하게 만들고 열하에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려 하자 그를 암살하려 했다. 그러던 1934년 3월 17일 아리요시 공사가 일본인이 경영하던 고급음식점에서 송별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 등 3명으로 하여금 부근의 중국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살해하도록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1935년 3월 25일 이규호(李圭虎)와 함께 정화암·이달(李達)·전이방(田理芳) 등과 협의하여 상해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이자 일본 총영사와 내통하고 있던 이용로(李容魯)를 처단했다.
그 직후 중국 경찰서에 체포된 엄순봉은 일본공사관으로 인계된 뒤 경성 종로경찰서로 끌려가 갖은 고문과 옥고를 치르고, 1936년 3월 18일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후 그는 2년간 복역하다가 1938년 4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입회한 법무관이 유언을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엄순봉에게 건국훈장 건국장을 추서했다.“설령 전할 말이 있다 하더라도 적(敵)인 너희들을 통하여 유언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도 사람이요 너희들도 사람이니 공통(共通)된 인류애(人類愛)로서 너희들에게 일언(一言)한다. 내가 과거(過去)에 행한 바는 압박을 받고 허덕이는 민족을 구하기 위한 것이니, 원컨데 그대들은 가식(假飾)된 논변과 법리론(法理論)을 청산하고 참으로 인류를 정복, 피정복(피정복)이 없고 압박과 착취와 악행이 없는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 인류 만대의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