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명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유자명은 1894년 1월 13일 충주군 이안면 삼주리에서 부친 유종근(柳種根)과 모친 이기로(李綺魯)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문화 류씨 소윤공파 13세손으로, 나름 명문 가문이었지만 유덕재(柳德栽, 1655~1686) 대에 충주로 이주한 후에는 부친 유종근이 1895년 평양부 주사로 부임하기 전까지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그나마도 유종근이 평양에서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단발령에 반발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버려서 별 의미가 없었다. 이렇듯 관직운이 없는 집안이었지만, 충주 일대에 상당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유자명은 유년 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유자명은 7살 때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교육받았고, 15살 때 충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혔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수원농림학교에 지원했지만 낙방하자 서울로 상경해 수학자 이명칠(李命七)이 운영하는 연정학원(硏精學院)에서 공부한 뒤 1913년 수원농림학교에 진학했다. 수원농림학교는 일제 농업정책 추진의 일환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일제 지배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 학비는 무료였고 기숙사와 매월 평균 일본돈 5원 가량의 생활비를 학생들에게 지급했다. 또한 졸업 후에는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어었고, 졸업생들은 주로 총독부 산하의 관청이나 간이농업학교와 보통학교의 교원으로 취직했다.
1916년 농림학교를 졸업한 유자명은 고향으로 내려와 충주간이농업학교와 공립보통학교 교원이 되었다. 그는 1918년 보통학교 훈도(訓導), 1918~1919년 간이농업학교 부훈도로 재직했다. 한편 그는 1910년에 11월 이난영(李蘭永)과 혼인했고 슬하에 유기용, 유기형 형제를 낳았다.
2.2.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당시 간이농업학교 교사였던 유자명은 학생들을 모아서 충주의 장날인 3월 15일에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그는 3월 10일경 범바위에서 열린 농업학교 졸업기념 야유회에서 오언영(吳彦泳), 장천석(張千石)[2] , 유석보(劉錫寶) 등 농업학교 학생들과 장날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정모 학생이 헌병보조원으로 채용되는 조건하에 모든 사실을 밀고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유자명은 경찰서에 근무하는 동창생 황인생이 일본 경찰이 이미 비밀활동을 알고 있으니 빨리 이곳을 떠나라는 귀띔을 해주자 급히 고향을 빠져나와 서울로 피신했다.
유자명은 서울에 도착한 뒤 동창 권석희(權石熙)가 일러준 정낙윤(鄭樂倫)을 찾아갔다. 정낙윤은 충주근 노은면 사람으로 유자명의 제자인 정태희와 정석희(鄭碩熙)의 숙부였다. 유자명은 정낙윤의 집에 머물면서 고향친구이자 3.1운동 당시 중앙기독청년회가 주도한 만세시위에 참여한 이병철(李秉澈)[3] 을 만났다. 유자명과 이병철은 상하이에서 지지기반을 구축하러 국내에 방문한 조용주(趙鏞周)[4] 와 의기투합하여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했다. 청년외교단은 결성 이후 서울에 중앙부를 설치하고 국내와 상하이 등지에 지부를 두고 조직을 확대했다. 유자명은 조용주, 연병호 등과 함께 중앙부의 외교원으로 활동했다.
청년외교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외교원의 해외 파견을 통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유자명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대하기 위해 1919년 6월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그는 상하이에 도착한 뒤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충청도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의회 비서로도 활동했다. 또한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이자 신한청년당 대표인 여운형의 소개로 신한청년단에 가입해 비서로 발탁되었다.
이무렵, 유자명은 신채호의 애국연설회에 참석해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에 관한 역사> 강연을 듣고 그를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임시정부가 갈수록 무기력해지고 있는 것에 깊이 실망하고 당시 임시정부 법무부 비서국장으로 있던 김한(金翰)을 만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다. 당시 김한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 중국 여관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조선혁명의 방향에 관한 글을 일본어로 쓰고 있었다. 유자명은 그 글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하고 김한과 함께 상하이의 일본 서점에서 일본의 신사상 잡지를 구입하여 읽고 사상토론을 하면서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해 주목했다.
이후 그는 1919년 12월 또는 1920년 1월 20일 이후 국내로 돌아갔고, 임시정부는 무단으로 이탈한 그의 의원직을 박탈했다. 그는 서울에서 김한과 함께 사회주의 연구모임을 조직하여 강태동, 강석린[5] , 김응룡, 신정균, 백신영, 김달현, 원정룡, 김성환, 이재성, 홍명호 등 청년들과 교류했고, 김한이 속한 조선청년연합회에 가담해 열렬히 활동했다. 그러던 1921년 4월, 조선청년연합회 상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안확(安廓)이 <자각론>과 <개조론>을 연합회 이름으로 간행한 것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이때 유자명은 안확이 개조론을 발표하는 자리에 참석했다가 그의 강연을 듣고 곧장 반박하는 내용의 <내적 개조론의 검토>를 발표했다.
안확은 세계적으로 개조론이 유행하니 조선도 이러한 문화적 전환기를 맞이하여 개조를 통해 새로운 이상을 실현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개조에는 내적 개조와 외적 개조가 있는데 내적 개조, 즉 심성의 개조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외적 개조의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금일 노동계급이 할 일 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은 자위(自衛)나 반항 등의 사업보다는 노동자의 심리와 습성을 관찰하여 노동문제를 해결할 힘을 먼저 일으키는 것이다. 자기를 존경하는 마음만 있으면 남의 감독이나 권면(勸勉)을 받지 않아도 자발적 행동으로 처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노동자가 자신의 심성과 행위는 돌이켜 보지 않고 자기의 경제적 요구만 애걸해서는 대중의 동정을 불러일으키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유자명은 내적 개조를 주장하는 자들은 현실 사회제도의 불완전함을 깨닫지 못하고 무비판적이며 현재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바탕에 횡일하는 인생 고통, 사회고통, 시대고통 등을 제도의 죄가 아니라 한갓 인심의 죄라고 주장한다고 봤다. 또한 그는 인심의 개조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유자명은 "인간의 의식이 제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제도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한다."라며 자본주의 제도 내에서 제도가 바뀌어야 의식이 변화한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자본주의 제도의 모순을 인식하고 사유재산제도로 이루어진 사회 제도가 무너지면 인간의 의식도 개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1920년 4월 서울에서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에도 가담해 <공제>와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사회주의와 멀어지기 시작한다.내적 개조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소위 인심의 개조라는 것이 재산으로 인해 권력까지 부여된 유산계급의 심리를 변화하게 하여 현 사회 제도의 결함을 깨닫게 하고 그들이 자진해서 사회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말이라면 그것은 도저히 성공할 날을 기약치 못할 것이다.
2.3. 아나키스트가 되다
유자명은 사회주의에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주장한 "모든 역사는 모두 계급투쟁의 산물"이라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에서의 혁명은 매국주의에 대한 애국주의의 일관된 투쟁이라고 인식했으며,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상황에서 내부 투쟁은 매국주의를 반대하는 애국주의이며 제국주의 노선과 맞선 식민지 민족전선의 투쟁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 <한 혁명가의 회억록>에서 사실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과 혁명 과도기에 나타난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동의하지도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적 모순은 인식했지만 그 해결책으로 반드시 공산주의를 택해야 한다는 것에는 회의적이었다.김원봉이 의열단의 실천가 였다면 유자명은 의열단의 이론가였다.
심산 김창숙
유자명은 모리토 타츠오(森戶辰男)가 발표한 <크로포트킨의 사회사상 연구> 논문을 읽고 아나키즘에 관심을 품고 크로포트킨의 저작 <상호부조론>, <윤리학>, <전원, 공장, 작업장>과 고리키, 푸쉬킨, 톨스토이 등이 쓴 러시아 실천문학을 탐독했다. 그는 곧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 맞서려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야말로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라고 파악했다. 크로포트킨은 인간은 상호부조로 발전했다고 주장하면서, 사적 소유제도를 부정하고 적은 시간의 필요노동으로 필요한 만큼의 무상분배를 주장했다. 유자명은 크로포트킨이 제시한 상호부조의 개념에 매료되었고, 정치권력이나 강제를 부정하고 개인이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꿈꿨다.
유자명은 자본주의가 점점 발전함에 따라 인간의 사상과 감정 등도 발달하였기 때문에 제도의 개조가 먼저 이루어져야 인간의 사상과 의식도 개조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자본주의의 발달이 최고조에 이르면 자기모순에 의해 무너질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계급이 아닌 민중을 역사주체로 인식하여 아나키즘을 수용하면서 민중직접혁명의 이론적 근거를 구축했다. 그는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핍박하는 상황에서 국가권력을 반대하는 것은 곧 일제를 반대하는 것이고, 일제의 통치기관을 폭파하는 것은 곧 항일 애국운동이라고 인식했다. 국가권력을 반대하고 통치기관을 폭파하는 것은 아나키스트로서 직접행동이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이것은 곧바로 항일 애국행동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공산주의가 아닌 아나키즘을 선택한 유자명은 1921년 봄 베이징으로 건너가 신채호, 이회영 등을 중심으로 베이징 아나키스트 그룹을 형성했다. 이후 1922년에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톈진으로 갔다가 자신을 찾아온 김원봉의 요청을 수락하고 의열단에 가입했고 의열단의 통신, 연락과 선전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김성숙은 "김원봉은 앞에 내세운 사람이고 실제 일을 한 사람은 그 사람(유자명)이었다."고 회고했다. 또한 김원봉과 수십년 간 독립 투쟁을 함께한 정화암은 "이 무렵 의열단에서 발표한 문건은 대부분 유자명이 작성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로 볼 때 유자명의 의열단에서의 입지는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1922년 3월, 의열단은 상하이 황포탄에서 일본 육간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자신들은 과격단체와 무관하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공산주의자들은 의열단의 폭력운동에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에 의열단은 자신들이 무차별적인 테러단체가 아니라 명확한 이념과 목표를 가진 혁명단체임을 대내외에 천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유자명은 평소에 존경하던 신채호를 김원봉에게 추천했고, 자신이 직접 베이징으로 가서 신채호를 상하이로 모시고 와서 의열단의 주의, 주장을 담은 선언문 작성을 요청했다. 이후 그는 상하이에 있는 의열단 비밀숙소에서 한달 동안 합숙하면서 <조선혁명선언> 집필을 지원했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 그의 의사가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자명 본인이 자신의 수기에 선언문에 포함되어야 할 원칙 6가지를 직접 기술한 만큼 상당히 공을 들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가 수기에서 적어놓은 여섯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1923년 <조선혁명선언> 발표 후, 유자명은 지속적으로 의열단이 추구하는 목표와 투쟁정신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여러 문건을 작성했다. 1924년 1월,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의열단 격문을 발표했다.1. 5천년의 력사를 가지고 잇든 문명한 조선민족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하여 망하게 된 원인과 경과를 력사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2. 나라가 망한 결과는 3천만 인민이 일본의 노예로 되었고 3천리 화려강산이 인간지옥으로 된 것이다.
3. 조선인민이 일본 침략에 대하여 영용하게 투쟁해 온 과정을 력사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4. 일본 군국주의에 대하여 폭력 혁명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5.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서는 민중을 覺悟시켜야 한다. 우리의 폭력 혁명운동은 우리의 민중을 각오시키기 위한 것이다.
6. 우리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투쟁은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이룩할 때까지 굳세게 싸워야한다.
한편 윤자영, 현정근, 조덕진 등 여러 단원들이 의열단을 탈퇴하고 상하이청년동맹회를 창립한 뒤 의열단의 암살, 파괴운동은 공포만 불러올 뿐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다고 비난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의열단에 남아서 상하이, 베이징, 톈진을 왕래하며 아나키스트들과의 교류를 확대하는 한편 그들을 규합해 아나키즘 계열의 단결을 도모했다.아! 우리는 자살하지 않으면 곳 학살을 당할 것이다. 만일 여긔에서 벗어나랴면 다만 급격한 혁명의 길 밖에는 없다. 우리가 노예, 아사, 악형, 감옥, 교수대, 학살의 연속 순환 중에서 후자는 전자에 속하고 자녀는 부모를 따라하여 영구 멸망의 함정으로 향하는 (중략) 맛치 도살장으로 몰히어 가는 양의 무리와 같은 (중략) 운명에서 해방되랴면 오즉 폭력적 혁명밖에는 다시 길이 없다. 우리는 자유를 찾지 못하면 영구히 멸망될 것을 알엇다. 그러면 자유를 위하야 몸바칠 뿐이다. 자유의 값은 오즉 피와 눈물 이다. 자유는 은혜로써 받을 것이 아니오 힘으로써 싸와서 얻을 것이다. 우리의게 얽매인 쇠줄 은 우리의 손으로 끊어바려야 된다. 우리의 생활은 오즉 자유를 위하는 싸홈뿐이다. 용감한 형제자매여! 자유의 전우. 오라! 왼갓 수단과 모든 무기로 싸호자! 완전한 독립과 자유가 올 때까지 싸호자! 싸호는 날에 자유는 온다!
2.4. 베이징에서의 의열투쟁
이무렵, 베이징에서는 아나키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있었다. 베이징대학 총장으로 취임한 차이위안페이는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을 주도하던 리스청, 우즈후이(吳稚暉) 등을 베이징대학 교수로 초빙해 청년들에게 아나키즘을 가르치게 했으며, 천두슈, 리다자오, 루쉰, 저우쭤런(周作人), 저우젠런(周建人) 형제 등도 초빙해 공산주의를 가르치게 했다. 이리하여 베이징 대학은 새로운 학문연구와 신문화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 베이징 한인 유학생은 약 300명에 달했는데, 주로 베이징대학에 다녔다. 특히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 이후 일제의 학살을 피해 중국으로 달아난 한인 유학생들은 사상이 다양하고 언론도 비교적 자유로운 베이징으로 대거 이동했다.
유자명은 이러한 흐름에 주목하고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담했다. 하지만 이 단체는 <정의공보>를 한글로 발행한 걸 제외하면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고, 유자명은 별도로 아나키즘에 경도된 한인 청년들을 규합해 다물단을 결성하여 의열투쟁을 이끌었다. 다물단은 독립운동의 장애물인 일제의 정탐 제거를 목표로 삼았다. 당시 일제는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조직에 대해 철저한 감시와 파괴를 진행했고 베이징에서도 밀정을 파견해 감시를 강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밀정을 처단하는 것은 독립운동조직을 보존하고 조직원의 생명과 활동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1925년 3월 30일, 다물단은 유자명의 감독하에 일제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했다. 당시 베이징에서 발행되던 중국 일간신문 <경보(京報)>는 김달하 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유자명은 또 1926년 12월 28일 서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 의거를 기획, 지도했다. 유자명은 신채호와 함께 베이징에 있을 때 나석주를 만났다. 나석주는 의열투쟁에 대한 결의를 보이며 “폭탄과 권총을 가지고 서울에 가서 일본 원수 놈들과 싸우다가 최후의 탄환으로 자결하려 하니 누구든 나를 도와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유자명은 그를 의열단에 가입시키고 폭탄 한 개와 권총을 구입한 뒤 톈진에서 나석주와 만나 작전 계획을 설명하고, 그가 서울로 떠날 때 마지막까지 그를 전송했다. 이후 그는 의거 직후 순국한 나석주를 기념하는 글을 의열단 간행물에 발표하고 추모회를 조직하고 나석주의 약력과 의열투쟁을 소개한 소책자 100부를 인쇄해 배포했다.김달하란 자는 한국인인데 일본의 사냥개 노릇을 한다고 이름이 났다. 그는 베이징에 몇 년 동안 있으면서 전적으로 한국독립군의 비밀을 정탐하여 일본인에게 보고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한국독립군은 그 사람의 행실이 이렇다는 것을 알고 일찌감치 이런 사냥개를 죽여 후환을 없애려고 하였다.
2.5. 교육활동과 남화한인청년연맹
1926년 의열단 개조회의 이후 광저우 중산대학에 머물고 있던 유자명은 1927년 4월 15일 중국 국민당이 광저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산당원들을 대거 숙청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에 유자명은 1927년 5월 14일 <조선일보>에 '적색의 비통' 기사를 게재해 장제스를 비판했다.
이후 그는 김원봉과 함께 광저우를 탈출해 상하이로 가다가 해적을 만나 총상을 입기도 했지만 어렵사리 우한에 도착했다. 그는 1927년 6월 우한에서 개최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에 김규식, 이검운(李劍運)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가했다. 이듬해 2월 한커우로 이동한 유자명은 김병태, 최원, 최승년 등 1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준비를 하다가 인도 회원 나란신(那蘭辛)의 밀고로 2월 28일 우한공안국에 구속되었다. 우한위수사령부 간수소에 구속된 그와 동지들은 조소연(趙素昻)과 박건웅(朴健雄)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공문을 발송하고 우한공악국과 교섭을 벌인 덕분에 6개월 만인 8월 28일에 석방되었다.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까지도 혁명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고, 민중을 위하고 혁명을 위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실제로는 민중과 혁명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희생시키려는 자가 있다.
유자명은 석방 직후 난징으로 이동하여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사무실에 거주하면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쑨원의 저서 <쑨원학설>을 한글로 번역한 그는 국민당 선전부장 예추창(叶楚傖)을 소개받았고, 이때부터 난징에서 중국 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29년 봄, 그는 중앙통신사를 경영하는 위안샤오셴(袁紹先)으로부터 한푸옌(韓㚆炎) 열사 기념 합작농장에서 농업 생산을 지도하는 농업기술자로 일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그는 생계가 어려웠기에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이때부터 농장에서 기술자로 일하면서 점차 교육계로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유자명은 수원농림학교 출신으로 전문적인 농업지식과 기술을 지녔으며, 중국어 회화와 문장이 능숙해 중국 인사들과 원활하게 교류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푸젠성 취안저우에 있는 리밍 중학교에서 생물학을 가르치게 되어 난징을 떠나 푸젠으로 갔고, 그곳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1930년, 그는 다시 상하이 리다학원 농촌교육과로 이직했다. 중국의 저명한 교육가 쾅후성(匡互生)이 세운 리다학원은 교육과 생산노동을 서로 결합하는 방법으로 학생들을 교육했다. 그는 이곳에 부임한 후 학생들을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유자명은 상하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참가했다. 유자명은 훗날 이 단체가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공개단체라고 회고했고, 정화암도 기존에 있는 비밀조직 산하에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고 회고했다. 이는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이 남화한인청년연맹을 표면에 내세워 비밀을 유지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자유연합을 기본 원리로 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종교와 가족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독립을 쟁취한 이후 조선에 세워질 절대 자유 평등의 새로운 사회를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 단체는 민중의 직접적인 불굴의 행동으로 봉기를 일으켜서 일거에 일본 제국주의를 조선에서 축출하자고 주장하면서 민중직접혁명을 주장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의 구성원은 대략 30여명 정도로 추측되며, 유자명과 이회영, 류기석이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만주사변으로 상하이로 돌아온 만주 한족총연합회의 정화암, 백정기, 김지강, 오면직 등이 합세했다. 여기에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들어온 원심창, 박기성, 나월환 등도 가입했으며,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서 활동하던 이강훈, 이달, 엄순봉 등도 합세했다. 유자명은 이회영의 추천으로 의장 겸 대외 책임자로 선출되었으며, 리다학원을 근거지로 삼아 그곳을 아나키스트들의 집회 장소 겸 연락지점으로 삼고 항일의열투쟁을 전개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중국 동지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1931년 11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간부인 왕야차오(王亞樵)와 화쥔시(華均實)의 제안으로 일본인 동지 전화민(田華民)과 오수민(吳秀民) 등을 포함해 한, 중, 일 3국의 항일구국연맹이 결성되었다. 항일구국연맹은 적의 기관파괴와 요인암살 · 친일분자 숙청 등을 목표로 삼아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유자명은 항일구국연맹의 선전부를 책임지고 기관지 <자유>를 발행해 아나키즘을 선전했다. 그러나 항일구국연맹을 주도하던 왕야차오가 국민정부의 탄압으로 1932년 5월 홍콩으로 도피하게 되면서 항일구국연맹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이회영은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재건설하기로 마음먹고 국민당 지도인사 우즈후이와 리스청을 만나 앞으로의 방향을 논의한 뒤 창충에 있는 사위 장기준(張基俊)에게 연락해 지하조직을 건설하고 주변정보를 수집하게 했다. 유자명은 이회영이 70세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만주로 가려는 것을 만류했지만 그의 결심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 그는 난징으로 가서 리스청, 우즈후이 등을 만나 이회영이 동북 만주의 군벌과 서로 연락하여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비밀연락망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회영은 단신으로 만주로 갔다가 1932년 11월 다롄항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다 옥사했다.
유자명과 남화한인청년연맹 동지들은 이회영이 체포된 경위를 추적하다가 그의 조카 이규서(李圭瑞)와 연충렬(延忠烈)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자 두 사람을 상하이 리다학원으로 유인한 뒤 밀고 사실을 확인하고 처단했다. 또, 이규서, 연충렬의 배후에 상하이 거류민단 회장 이용로(李容魯)가 있다는 것도 밝혀지자, 유자명은 엄순봉과 이규창을 시켜 1935년 3월 25일 이용로를 자택에서 쏴 죽이게 했다. 이때 체포된 엄순봉은 사형에 처해졌고 이규창은 징역 13년에 처해졌다.
유자명은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계획 수립과 거사 준비에도 참여했다. 아리오시 아키라는 일본 육군대신 아라키 사디오가 건네준 4천만 엔을 가지고 중국 국민당 요인들을 매수해 만주 지역을 포기하게 만들려 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1933년 3월 17일 일본 고급 음식점 육삼정에서 아리오시 아키라 공사와 국민당 요인의 밀회가 성사되고 밀약을 자축하는 연회가 개최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유자명은 백정기와 이강훈을 암살 실행자로 선정했고, 원심창에겐 현장안내를 맡겼다. 그는 정화암에게 거사준비자금으로 200불을 지급했으며, 거사 직후에 각 신문사에 보낼 선언문을 작성했다.
유자명은 매일 아침 백정기와 이강훈을 찾아가 아침식사를 같이하며 격려했고, 거사 당일인 3월 17일 전세택시를 빌려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 오면직과 같이 타고 육삼정 부근에서 세 사람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나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은 사전에 잠복해 있던 일본 경찰에게 모두 체포되었다. 하지만 상하이, 베이징, 난징, 톈진 등의 신문들이 아리요시 아키라 공사 암살미수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그의 음모가 세상에 폭로되었다. 유자명은 체포된 세 사람을 돕기 위해 리다학원의 중국인 제자 챵어강(常爾康)으로 하여금 그들을 뒷바라지하게 하고 필요한 책도 반입시켜 주었다.
2.6. 중일전쟁 시기 경력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세력은 민족전선을 결성할 필요성을 확실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에 유자명은 조선혁명자연맹을 결성해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청년전위동맹과 통일전선을 이루고 그해 10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다. 그리고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그는 그곳에 가담하면서 그동안 주도적으로 전개했던 의열투쟁을 그만두고 일본군과의 교전에 참여했다.
1940년 3월, 유자명은 중국인 아내 유칙충(劉則忠)과 두 아들 득로(得櫓, 1939년생), 전휘(展輝, 1942년생)를 데리고 푸젠성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푸젠성 정부농업개진처의 원예시험장 원예과 주임으로 근무했다. 1941년 12월, 유자명은 충칭의 복단대학 교수 마종롱(馬宗融)으로부터, 회교구국협회(回敎救國協會)에서 농업기술원을 양성하기 위해 궤이린(桂林)의 산지를 개간하여 영조농장(靈棗農場)을 만들려 하는데, 이를 지도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궤이린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영조농장 건설사업에 참여했고, 1942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복직했으며, 임시정부의 헌법 개정을 위한 약헌수개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유자명이 이끄는 조선무정부주의자 동맹은 임시의정원 내에서 12석의 의석이 배분됐고, 그는 광복 때까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직을 가졌다.
1944년 가을, 유자명은 푸젠성 정부의 초청을 받고 가족을 데리고 다시 푸젠성 영안으로 가서 복안현 계병농장(溪柄農場) 준비처 주임으로 부임했다. 이후 그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성실히 근무하며 지역 주민들의 신망을 얻었다.
2.7. 해방 후 경력
1945년 8.15 광복이 찾아왔지만, 그는 귀국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푸젠성에 있어서 별도로 귀국 노선을 찾지 못했고 국민정부가 농업 분야에서 매우 유능한 인재인 그를 한국에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부득불 동지들과 함께 타이완으로 떠나야 했다. 이후 그는 1946년부터 1950년 6월까지 대만성 농림처 기술실주임, 합작농장관리소 주임 등으로 근무하면서 대만의 농업개혁 방안을 모색했다. 그는 <농업건설과 합작농장의 사명>, <합작농장과 농업합작의 여러가지 형식>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조국이 그리웠던 그는 1950년 1월 정화암과 함께 귀국 신청을 했고, 반년 후에야 비자를 발급받고 대만을 떠났다.
그러나 유자명은 비자를 발급받은 후에도 한국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그는 대만으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 홍콩 등 각지를 전전하다가 후난성 부성장으로 있던 청싱링의 도움으로 창사로 가서 호남농학원 교수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농학자로서 활동했고, 1972년 농학부와 원예학부 교수들과 함께 창사 마왕퇴한묘(馬王堆漢墓)에서 출토한 벼의 종자를 고증하는 한편, 중국 벼 재배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측면에서 분석했다.
유자명은 또 1964년에 <중국의 장미와 세계의 장미>를 발표해 중국 장미의 유럽 전파, 중국 장미와 유럽 장미의 교잡 과정 등에 대해 논술했다. 또한 그는 중국의 남방은 포도를 재배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극복하고자 노력했고, 몇년 간의 시행착오 끝에 남방에서 재배되는 포도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재배한 포도는 베이징박람회에서 호평을 받고 우수한 품종으로 뽑혔으며, 이후 중국 남방의 여러 지역에 포도가 보급되었다. 특히 후난성 지역에서는 대단위 재배를 시작해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다.
이렇듯 중국에서 농학자 및 원예학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조국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갈수록 커졌다. 유자명은 1977년 10월 심극추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1983년 2월 25일 유자명의 90세 생일날 호남농학원에서 성대한 축하잔치가 열렸다. 이 잔치엔 후난성 인민정부 부성장, 제5기 인민대의원, 호남성정치협상회의 주석 등이 참석했다. 특히 유자명의 절친한 벗인 청싱링은 유자명을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3·1운동 그 해에 나라를 떠나서 이젠 60년이 됩니다. 집이 남조선에 있기에 줄곧 고향에 편지를 못해 봅니다. 만일에 남북이 민족 대단결 회의를 열게 되면 나도 돌아가서 참가하고 싶습니다.
이때 중국 중앙국제방송국에서 그의 생일잔치 소식을 뉴스로 방송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한국의 후손들이 중앙국제방송국에 그의 연락처를 문의했다. 유자명의 딸 유득로의 증언에 따르면, 이 사실을 알게 된 유자명은 안절부절하며 한국에 가야겠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1985년 4월 17일 창사시에서 생을 마감했다. 향년 92세.유자명의 숭고한 애국주의 정신과 국제주의 정신은 영원토록 우리의 훌륭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해방 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귀한 대접을 받는 유자명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다가 그가 죽고 6년 후인 1991년에 비로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