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관빈 피살사건

 



1. 개요
2. 배경과 사건
3. 증언의 이상함
4. 원인
5. 친일밀정설에 대한 진상규명
6. 김구 옹호자들의 친일파 용어 혼동
7. 여담
8. 둘러보기


1. 개요


김립 피살 사건과 함께 김구가 한인(정확히는 조상이 화교인 한국계 출신의 중국인 애국자)을 대상으로 벌인 테러. 좀 더 정확하게는 김구, 안공근, 정화암안창호 계열인 옥관빈을 대상으로 벌인 암살행위를 말한다.

2. 배경과 사건


불자약창을 설립하여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

조상이 화교인 한국계 출신의 중국인 옥관빈에 대한 중국의 평가[1]

도산 안창호는 '독립전쟁'을 위해 매우 필요한 활동으로 재정 마련을 들었다. 독립운동은 참가자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재정을 뒷받침하지 않으면 지속할 수가 없다. 도산은 그걸 잘 알았고, 자금운동과 재정 마련을 매우 중요시했다.[2]
미주동포들에게는 "직접 독립운동하는 게 아니라도 재정을 감당하는 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했으며, "수입의 20분의 1을 독립군에게 보내서 지원해달라"고 호소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내가 며칠 후에는 피 흘리는 이에게 절하겠소만은, 오늘은 돈 바치는 이에게 절하겠소”[3]

도산은 "한국사람은 전통적으로 재정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고 주장했다. 그 원인을 유교의 원인이라 주장했다. 유교의 원인으로 재를 천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치열하게 하는데 자금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고 힘쓰는 자를 낮추어 보는 전통이 있다"고 주장했다.

“실상 돈이 안 나오는 이유는 우리 국민은 돈이 없어도 일이 되는 줄 아는 까닭… 그래서 독립도 글자나 말만으로 되는 줄로 아는 까닭”

그리고 모든 조직적 활동은 재정 지원에 따른 뒷받침이 중요하다고 수없이 강조하고 다녔다.[4]
그리고 도산은 독립 전쟁과 재정 문제와 관련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다녔다.

"전쟁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이요? 곧 무기와 전술이요. 또한 무기와 전술보다도 일층 필요한 것은 무기를 사용할 군자금이외다. 군비가 있고 군인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작전계획이 있나니, 군인 없는 무기를 누가 사용하며, 군자 없는 전술을 무엇으로 활용하리오."

“여러분, 독립전쟁을 하자 하자 하지만 말고, 독립전쟁에 필요한 금전을 준비하시오.”

“대한의 독립군은 먼저 돈을 많이 모으는 사업에 힘을 써야 하오"[5]

그리고 독립운동가 중에서 재정 마련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비판했다.

“나는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 소비자뿐이고 생산자가 일인도 없음을 볼 때 나의 가슴이 답답합니다."[6]

그리고 도산은 "무슨 일이든지 하고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돈을 바치는 일이 곧 독립운동"이라고 하였다.

“여러분은 다 일하시오. 여기서 할 일이 없거든 서북간도에 가서 농업을 하시오. 독립운동하노라 하면서 노는 자는 독립의 적이오."[7]

따로 일해야 돈을 벌 수 있고, 그렇게 돈을 벌어야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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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관빈
이런 활동에 충실한 안창호의 측근에는 옥관빈이 있다. 옥관빈은 도산이 실질적으로 교장으로 활동한 대성학교 학생이었으며, 신민회 회원이며, 도산을 숭배한 추종자였다.[8] 그리고 105인 사건 때 도산의 최측근 차이석과 함께 일본제국 경찰에게 잔인한 고문을 받아 끔찍한 폭력을 당했다. 차이석의 증언에 따르면 본인을 포함해 옥관빈, 곽림대 같은 여러 사람들이 "고문을 받아 거의 병신이 되었다"고 할만큼 잔인한 고문이었다.[9]
옥관빈은 풀려난 뒤 나중에는 중국 상하이에 갔으며, 거기서 중국인으로 귀화했고, 중국 여자와 결혼했으며, 장제스를 추종[10]하며 중국 국민당에서 중요당직을 맡아서 활동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활동에 충실하며 부자생활을 하고 다녔다.[11] 그리고 고려관련 불교문화재인 항주 고려사(杭州 高麗寺) 복원운동을 주도하며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12]
그런데 이런 모습을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좋지 않게 보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만 해도 돈이 부족해서 허덕이고 있는데, 옥관빈은 부자생활을 하면서 불교문화재 복원에 큰 돈을 쏟아부으면서 사교계에 두각을 나타냈던 게 고깝게 보였다.[13]
그러나 옥관빈은 그 당시에도 안창호 측과 가깝게 지냈다. 예로 안창호 측근이자 국민대표회의 때 안창호 측으로 같이 참여했던 송병조와도 지낸 모습을 확인가능하며, 송병조와 같이 있다 일본제국 경찰이 습격해오자 송병조는 빠져나가고 자기 혼자 남아서 일본제국 경찰의 협조 요구를 거부한 적도 있다.[14]
그리고 당시에도 옥관빈은 도산 측에게 재정 지원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옥관빈은 아무에게나 돈을 지원해주지는 않았다. 예로 아나키스트들은 믿지 못했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이 지원을 요구하면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도산 안창호만은 의심없이 믿는 걸 물론이며, 여전히 도산을 숭배했다. 그렇기에 정기적으로 재정을 지원해줬다. 옥관빈에게 자금을 받은 도산 안창호는 이 자금을 당연히 독립운동 지원금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 자금은 이봉창 의거가 일어날 수 있는 재정으로도 쓰였다.[15]
[16]
1928년, 옥관빈은 안창호를 통해 김두봉 같은 독립운동가가 운영하는 인성학교에 2,000원을 기부해주었다. 국내의 재외동포위문회가 보내온 자금은 1,000원이었는데, 옥관빈이 보낸 자금은 2,000원이었다. 옥관빈의 기부한 액수는 굉장히 높았다. 그런데 이 때 백범 김구는 옥관빈을 좋지 않게 봤던 듯하다.[17][18]
1932년, 안창호일본제국 경찰에게 불법체포를 당했다.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활동하지 못하자 김구 세력은 안창호 측근 세력(이유필, 송병조 세력)들과 대립을 하였다. 이유필과 송병조 측은 안창호 측근이자 흥사단원이자 국민대표회의에 안창호를 따라 개조파로 참여한 인사들이었다.[19]
사실 백범 김구는 당시에 도산 안창호를 좋지 않게 봤다. 기존 임시정부 문제로 옹호파, 개조파, 창조파로 갈등과 대립이 있었는데, 김구는 이승만 정부를 강력히 옹호하였다. 그러나 도산 안창호는 개조파로 활동하며 이동휘와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했다. 그 이후에 안창호 측과 대립하며 반대활동을 하였다. 예로 1926년 5월에 임시 의정원에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했는데, 김구는 안창호 국무령 선임 반대운동을 하였다.[20] 안창호는 선임 13일만, 임시정부에 당도한지는 당일만에 사퇴해야 했다.
이후에도 김구 측은 안창호 측과 갈등, 대립하였다.[21] 1933년 이후 백범 김구는 송병조 측 사이에서 "혁명자금" 문제로 대립을 벌였다. 결국 김구 측은 프랑스 조계에서 송병조 쪽을 무장 상태로 습격하는 테러를 벌였다. 이후 옥관빈도 김구 쪽에게 테러 대상이 되었고, 김구 세력에게 살해당했다.[22] 옥관빈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김구에게 협력했던 쪽이 정화암과 아나키스트 세력이었다. 두 세력은 안공근을 통하여 김구와 연결이 되어있었다.[23]

3. 증언의 이상함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옥관반을 살해하고 발표한 옥관빈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
①국내에서 이미 귀순하여 일제의 밀정으로 상해에 옴, ②무역상을 개설하고 중한 양국 사정을 정탐, ③중국인으로부 터 만여금을 편취, ④신문 및 전단을 활용하여 한국의 혁명자를 이간, ⑤유림대표 김창숙 등 혁명자를 체포케 함, ⑥1932년 제1차 상해사변 때 중국 군정을 정탐하여 일본군에 넘김, ⑦참호용 목재 등을 일본군에 헌납, ⑧폭력단을 조직 하여 혁명운동자 암살을 기도, ⑨신변 보호를 위해 일본영사관이 지급한 권총을 과시.
하지만 이중 대다수가 근거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데다가, ⑤의 경우 정작 김창숙은 자신을 밀고한 사람으로 유세백, 박겸을 지목하고 있어 사실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1차 상해사변때 일본군에 의해 옥관빈의 공장이 파괴되는 등 ⑥과 다소 모순되는 실례가 있어 그 근거가 의심스럽다. [24]
또한 총독부 문서 어디에도 옥관빈에 대해 ‘배일선인’·‘불령선인’ 이라는 언급은 있을지언정 그가 총독부의 밀정이라는 증거는 없다.
옥관빈 살해 상황에 대한 정화암의 증언 또한 이상하다. 정화암의 주장에 따르면 "옥관빈이 흥사단원의 아내와 불륜하고 나오다가 살해를 당했다"고 증언했다가[25] 다른 회고에선 "옥관빈은 굳게 닫힌 뒷문(철문)의 사잇문을 조용히 열면서 밖으로 몸을 내밀었"으며, "옥관빈은 정사에서 느꼈던 쾌감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잔인하리만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사잇문을 조용히 닫고 발길을 옮겼"다가 가슴에 총탄을 명중당해 살해당했으며 "엄형순은 구둣발로 옥관빈의 몸뚱이를 제치고 절명한 것을 확인한 다음 유유히 걸어나와서 인파 속에 묻혔다"고 증언했다.[26]
그러나 상하이 프랑스 영사관 경무국 정무과에서 조사한 내용을 보면 정화암의 증언과 다른데 당시 옥관빈은 사촌인 옥성빈을 방문하려고 그 집에 들른 것이었는데 공공조계 경찰면허 11424번을 소지한 운전사 팅킹당이 운전하는 3572번 자가용을 타고서 옥성빈 집에 도착했던 것이었고, 옥관빈은 사촌 집을 나와서 차쪽으로 걸어오다가 등 뒤에서 여러 총탄을 맞았으며 옥관빈은 차쪽으로 몇 걸음 걸아가다 보도에 쓰러졌다. 옥관빈 바로 근처있던 운전사는 암살자를 보지도 못했다. 암살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옥관빈을 사살하고 사라진 것이다.[27]

4. 원인


원인 중 하나는 위에서 설명했듯 김구와 안창호 계열의 갈등과 대립이었다. 또 다른 원인은 아나키스트들의 원인이었다. 옥관빈은 도산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보내줬으나 아나키스트들에게는 아니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옥관빈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으나 “내가 목숨을 내더라도 이건 너한테 못주겠다”고 강경하게 거부하며 아나키스트들을 야단치고 욕을 하며 내쫒았다.[28]
당시 아나키스트들은 허무주의를 띄었다. 정화암은 만주에서 민족해방운동 기지건설을 시도했으나 실패해서 중국 관내로 철수했고, 일제가 승승장구하니 희망도 잃었으며 생활난도 심해 괴로워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나키스트들은 허무주의 성향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가진 자를 향해 테러를 하였다. 이것은 가진 자들한테 자산을 빼았는 건 정당하다는 '약탈론'에 근거한 활동이었다. 당시 아나키스트들은 가진 자들한테 돈을 빼앗는 행위를 거리낌없이 하였다. 당시 아나키스트 인식에 따르면 이것은 가진 자들에게 강탈당한 것을 되찾는 행위일 뿐이며, 그러니 도덕적 결함이 없는 정당한 행위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나키스트들은 "략"이라 칭했다.[29] 그런데 옥관빈은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나키스트들의 요구를 강하게 거부했다. 이것은 아나키스트들이 옥관빈에게 원한을 갖는 이유였다.[30]
프랑스 문서에 의하면 김구 측 인물들이 송병조 측 인물을 테러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탓에 옥관빈이 중국 국민당 장군에게 테러범 당사자들을 신고하려고 했다. 김구 측 인물들이 그런 이유 때문에 옥관빈을 살해했다고 나온다. 시간이 흐른 후 김구와 송병조 측은 화해하는데 그 이유는 내부끼리 유혈 충돌을 그만하자는 것이 이유라고 나온다. [31]
개인적으로는 다소 오만했던 성품도 불행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안창호는 그를 두고 “才가 德보다 뛰어나다(才勝德)”라고 지적했다고 한다.[32]

5. 친일밀정설에 대한 진상규명


옥관빈이 친일밀정인지 정부와 학계에서 진상규명에 나섰고 결론은 증거없는 무혐의라 결론났다. 친일파가 아니란 악마의 증명은 없지만 혐의는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에 의하면 분명 한인애국단의 활동이므로 김구가 모를 수가 없다.2020년 10월 26일 검색 그러나 백범일지에는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이 주장되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33] 김립이나 치하포 사건과 달리 김구가 완전히 침묵한 사례다. 달리말하면 옥관빈 친일밀정설은 김구가 공식발표한 주장도 아닌 것이다.
  • 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소속으로서 위원장 1명, 상임위원 1명, 위원 9명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는데[34]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규명결과에서 옥관빈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35]
  •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36]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37] 편찬결과물에 옥관빈이 제외되었다.[38] 친일파란 증거가 없어 예비후보에도 제외되었다.[39]
  • 옥관빈을 친일밀정이라 주장한 정화암의 증언도 검토되었다. 친일인명사전 "주요전거" 중 정화암의 증언이 포함되었다.[40] 증거가 아니라 전거로 검토되었다. 150여명의 학자들이 편찬위원을 맡은 친일인명사전 편찬 측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 [41] 옥관빈은 무혐의였고 친일인명사전 수록명단에서 제외되었다.
  • 옥관빈은 조상이 화교출신인 한국계 중국인이다.(조선족과 정체성이 다음) "옥관빈은 다른 상해의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28년 그는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국적 회복을 인정받았다. 그는 그 과정에서 새로이 중국 국적을 얻는다는 ‘입적’이 아니고 원래의 중국 국적을 되찾는다는 의미의 '복적'이라는 방법을 취하였다. 즉 자신은 조부 때 중국 윈난에서 평양으로 이거한 화교라는 것이다."[42] 중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실업가의 행적을 한간(매국노, 반역자, 무역자)으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중국에서 "그는 불자약창을 설립하여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서 평가되고 있다."[43] 한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한국계 중국인 실업가를 친일반역자/부역자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

6. 김구 옹호자들의 친일파 용어 혼동


일부 넷 유사역사학은 친일파란 용어를 혼동하기도 한다. 옥관빈이 "친일"이니 한국에서 통용되는 친일파라는 것이다.루리웹1루리웹2
그러나 한국에서 통용되는 "친일", "친일파"는 한국 내 용어지 프랑스나 일본의 "친일", "친일파"가 아니다.

친일파의 사전적 의미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일본 제국이 동아시아 각국을 침탈할 무렵에 일본 제국에 가담하여 그들의 침략과 약탈 정책을 지지하거나 옹호하여 추종한 무리’ 이다. 하지만 '''본래 친일(親日)이라는 단어 자체는 ‘일본과 친하다’ 라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1966년 출간된 친일문학론에서 임종국이 ‘친일파’ 라는 용어를 당시 기득권을 쥐고 있었던 사회지도층 세력을 일컬었던 ‘부일배’ 라는 표현을 대신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부일(附日)은 ‘일 본 제국주의에 부역하다’ 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의도를 적극적으로 도운다는 의미이며 현재로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 다루는 친일파의 의미는 단순히 일본을 좋아하거나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부일 협력자를 뜻하는 것이다.

김다혜, 친일파 및 친일 행위 내용에 관한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 서술 분석, 서울교육대학교 교육전문대학원, 2018, 10~11

김다혜의 설명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확언할 수 없으나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친일"을 "1.일본과 친하게 지냄.",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함."으로 구분하고 있다. 2020년 10월 26일 검색친일친일파용어도 의미가 동일하지 않으며 전혀 다른 2가지 의미로 구분된다. 논리적 오류/비형식적 오류에서도 "애매성 (Equivocation)" 으로 논리적 오류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 한국 외에서 "친일"은 현대 한국의 "친일"과 다른 의미이다. 그런데 위의 루리웹 이용자는 황당하게도 프랑스에서 사용하는 "친일파"를 현대 한국어의 친일파와 혼동하고 있다.
그리고 루리웹에선 "실제로 일본 경찰에 2만원을 주고 밀정 노릇도 했음"이라는 주장을 하나 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에서 무혐의로 결정나 제외되었다. 친일파가 아니란 악마의 증명은 없지만 혐의는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옥관빈은 '''조상이 화교출신인 한국계 중국인이다'''.(조선족과 정체성이 다음) "옥관빈은 다른 상해의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28년 그는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국적 회복을 인정받았다. 그는 그 과정에서 '''새로이 중국 국적을 얻는다는 ‘입적’이 아니고 원래의 중국 국적을 되찾는다는 의미의 '복적'이라는 방법을 취하였다. 즉 자신은 조부 때 중국 윈난에서 평양으로 이거한 화교라는 것이다'''."[44] 중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실업가의 행적을 한간(매국노, 반역자, 무역자)으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중국에서 "그는 불자약창을 설립하여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서 평가되고 있다."'''[45] 한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한국계 중국인을 친일반역자/부역자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 조선 내 친일자본가를 부역자로 규정한다고 가정해도 옥관빈을 적용대상이 아니다.

7. 여담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옥관빈을 독립운동 관련인물로만 소개하고, 옥관빈 피살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옥관빈이 친일파라는 글이 보이는데, 출처를 추적해보니 그런 사이트 중 일부가 루리웹으로 추정. ### 하지만 2009년에 출간된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선 옥관빈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가 없다. 상인이니 조선총독부와 경제적 교류를 했을 수는 있겠지만[46]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갈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47] 또한 옥관빈의 사촌형 옥성빈도 친일인명사전에 찾아볼 수 없다. 그 외 설사 사전적인 의미의 '친일'이라 판단할만한 교류활동을 했어도 역시 그 정도는 친일인명사전 선정 기준 미달이다.

KBS에서 시사기획 창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집 - 밀정 2부작을 방송하며 밀정명단을 공개했는데 거기에도 옥관빈과 옥성빈이 없다.1부, 2부
위키백과 또한 옥관빈이 친일파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105인 사건을 함께 겪었던 윤치호가 그를 일본의 밀정으로 지목했다는 서술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되려 윤치호는 그가 밀정이라는 소문에 대해,

(1921년 4월 15일 요일) 양주삼 씨 말로는, 옥관빈이 일본인들의 밀정으로 변신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다. 옥씨는 내가 본 조선인 청년들 중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 중의 하나다. 그는 1911년부터 1915년 까지 음모사건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때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비범하게 잘 견뎌냈다. 이런 유형의 인물이 반역자가 되었다는 걸, 난 도히 믿을 수가 없다.[48]

라고 일기에 적었다.
아마 옥관빈이 피살된 이후 여운형에게 그 소식을 듣고

(1933년 8월 21일 월요일) 여운형 군이 강산 외금강에 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 그는 옥관빈 씨가 1주일쯤 전에 상해에서 암살되었다고 말했다. 옥씨는 약을 특허 내고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 돈을 번 후, 다년간 원한을 품은 이들의 표적이 되어왔다고 한다. 그는 공적인 대의명분을 위해 봉사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는 도와줄 법한 학생조차 도와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잘 보여 자기의 신변을 보호해왔다고 한다.[49]

라고 들은 바를 그대로 받아 적은 것을 과대해석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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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47[2] 장석흥, 안창호 - 한국 독립운동의 혁명 영수, 역사공간, 2016, 112[3]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0~261[4]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1[5]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 2, 1993, 261[6]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2[7] 박명규, 도산의 민주적 조직론, 도산사상연구 2, 1993, 262[8]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 근현대사 연구 63, 2012 , 64[9] 차이석, 안창호 선생 피포 정형 및 그 약력, 장석흥, 2005, 237[10] 상해 옥관빈, 버드나무 그늘(8월의 수필), 異域의 孤影, 동광 제24호, 1931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6&itemId=ma&synonym=off&chinessChar=on&position=0&levelId=ma_014_0230_0330)[11]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 근현대사 연구 63, 2012 , 58~59쪽[12] 조영록, 일제강점기 杭州 高麗寺의 재발견과 重建籌備會, 한국 근현대사 연구 53, 2010, 54~58쪽[13] 조영록, 일제 강점기 杭州 高麗寺의 재발견과 重建籌備會, 한국 근현대사 연구 53, 2010, 67~68[14] 국가보훈처, 프랑스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장 한국독립운동 사료 3, 2016, 해제 11, 23~24[15]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 근현대사 연구 63, 2012 , 63~64[16] 윤봉길 거사도 일어날 수 있는 재정으로도 쓰였다. : 김구가 도산 안창호 선생 에게 윤봉길 거사를 알려주지 않았다의 요주를 바탕으로 다소 동떨어진 견해로 보이는 즉 여기 문단인용에서 삭제한다[17]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 근현대사 연구 63, 2012, 64[18] 그당시 화폐가치를 환산하면 2,000원은 1,800만원에 해당하는 큰돈이다.[19] 조철행, 국민대표회 개최과정과 참가대표, 50~51[20] 오영섭, 안공근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 숭실사학회 35, 2015, 244쪽[21] 이만열, 도산 안창호와 백범 검구, 도산사상연구 8, 2002, 184~188[22] 국가보훈처,한국독립운동 사료 : 프랑스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장 3, 2016, 323~324[23] 이정식,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399~409쪽;정운현, 정창현, 안중근가 사람들, 역사인, 2017, 200[24]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 근현대사 연구 63, 2012 , 58~61[25] 이정식,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8~409[26] 정화암,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157[27] 국가보훈처, 한국독립운동 사료 : 프랑스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장 . 3 2016, 77~79[28]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근현대사 연구 63, 2012, 65쪽[29]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 : 운동편, 2015, 284~286[30]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근현대사 연구 63, 2012, 65~66쪽[31] 국가보훈처,한국독립운동 사료 : 프랑스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장 3, 2016, 323~324[32]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근현대사 연구 63, 2012, 51쪽[33] 김구,도진순, 《백범일지》,돌베개,2002[34]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418[35]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ⅱ,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1,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2,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3,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4, 2009[3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420[37] 《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 1038~1042[38] 《친일인명사전 1》;《친일인명사전 2》;《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39]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89220&PAGE_CD=S0200[40] 《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 1035~1037[41] 《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 1038~1042[42] 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66[43] 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47[44] 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66[45] 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47[46] 친일인명사전에서도 이런 점을 친일파의 기준으로 세우지 않는다. 수록 기준과 선정 기준을 참고하자.[47] 물론 민족문제연구소도 인지를 못 해서 넣는 경우는 있을 수 있으나 김구의 인지도를 볼 때 인지를 못 했을 리 없다.[48] 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 역사 비평사, 2001, 593쪽.[49] 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 6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