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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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1월 19일 전북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현재 부안읍 신운리)에서 아버지 백남일(白南一)과 어머니 윤문옥(尹文玉) 부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2년 7세때 정읍군 영원면 갈선리(현재 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했다. 한문을 공부, 19세 때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왔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 선언문과 전단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항일 운동을 이끌었다. 그 후 동지들과 일본 군사 시설 파괴를 공작하다가 일본제국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본적지와 행적을 속여 나올 수 있었다.
그 후 각지를 몰래 다니며 독립 운동 자금을 마련하여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 일본 군사 시설 파괴에 전력하였으며, 1924년 천황을 암살하려고 도쿄에 갔으나 실패하였다. 같은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했다. 1924년 상하이로 가서 우당 이회영, 화암 정현섭, 우근 유자명, 회관 이을규, 우관 이정규 등과 함께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는 데 참가하여, 조선 대표로 출석하였다고 우관문존년보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기관지인 정의공보를 비밀리에 발행하였는데, 그 잡지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었으나 유자명 등 여러 아나키스트 동지로부터 후원을 받아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약 1년간 공동 병실에서 요양 생활을 하여 완치되었다.
1932년 상하이에서 자유 혁명자 연맹을 조직하여 흑색 공포단으로 개칭하고, 조직을 강화하여 대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 당시에 구파 의사도 동일한 시도를 준비했었으나 중국인 조력자인 왕야차오가 권총은 전달했으나 약속했던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실패하였다.
1933년 3월 상하이 훙커우에서 정현섭, 원심창, 이강훈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하려고 모의한 육삼정 사건으로 잘 알려진 아리요시 아키라 공사 암살 미수 사건을 도모했다가 육삼정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상해 일본 총영사 보고문에서 일본제국 경찰의 세밀한 사전 체포 계획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컨대 아마 의거가 사전에 누군가에게 누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나가사키 법원에서 백정기 의사와 원심창은 무기 징역을,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았다. 백정기 의사는 이사하야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옥사하였다.
1946년 박열, 이강훈 등 아나키스트계 독립 운동가들이 3 의사의 유골 수습을 촉구하여 '3의사 국민장 봉장 위원회'를 발족하고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골을 일본으로부터 회수하여 7월 6일 국민장을 실시하였고, 현재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를 제외한 삼의사중에선 가장 최연장자다. 그다음이 이봉창, 윤봉길순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그의 고향인 전라북도 정읍에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위치는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영원로 1049.
얼굴이 매우 하얗고 잘생겼다고 한다. 정현섭 선생의 말에 따르면 남자인 본인이 봐도 정말 잘생겼다고. 게다가 깨끗한 성품과 곧은 의지, 선비같은 인자함을 지녔다고. 실제로 위사진을 보면 꽤 미남이다.
폐결핵으로 상하이의 병원에 입원했던 시절, 역시 폐병으로 입원한 일본 갑부의 딸과 서로 연정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백정기 의사는 본인이 독립운동가이며 소녀가 일본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매우 고민했다고 한다. 결국은 소녀가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그대 옆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라며 눈물로 애원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연인으로 발전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1년 뒤, 치료가 끝나자 "사랑하는 여자도 조국 앞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야" 라며 뒤도 보지않고 곧바로 병원을 나갔다.
그러나 후에 가끔씩 우울할 때면 동료 정현섭에게 소녀의 눈망울과 눈물이 생각난다며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얘기하곤 했다고 한다. 백정기 의사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순수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자유인 이회영에서 권오중이 연기했다. 여기서는 일본인 여성이 아닌, 같은 조선인 여성으로 독립 운동 후배인 홍정화(이아이 분)를 좋아하는 것으로 나온다.
1. 소개
백정기(白貞基, 1896년 1월 19일 ∼ 1934년 6월 5일)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아나키스트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수원(水原)[1] , 자는 용선(溶善), 호는 구파(鷗波)이다."나는 몇 달 더 못 살 것 같소.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마오.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오. 형들은 자중자애하며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라오. 평생 죄송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 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라오."
백정기 의사의 유언
2. 생애
1896년 1월 19일 전북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현재 부안읍 신운리)에서 아버지 백남일(白南一)과 어머니 윤문옥(尹文玉) 부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2년 7세때 정읍군 영원면 갈선리(현재 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했다. 한문을 공부, 19세 때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왔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 선언문과 전단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항일 운동을 이끌었다. 그 후 동지들과 일본 군사 시설 파괴를 공작하다가 일본제국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본적지와 행적을 속여 나올 수 있었다.
그 후 각지를 몰래 다니며 독립 운동 자금을 마련하여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 일본 군사 시설 파괴에 전력하였으며, 1924년 천황을 암살하려고 도쿄에 갔으나 실패하였다. 같은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했다. 1924년 상하이로 가서 우당 이회영, 화암 정현섭, 우근 유자명, 회관 이을규, 우관 이정규 등과 함께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는 데 참가하여, 조선 대표로 출석하였다고 우관문존년보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기관지인 정의공보를 비밀리에 발행하였는데, 그 잡지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었으나 유자명 등 여러 아나키스트 동지로부터 후원을 받아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약 1년간 공동 병실에서 요양 생활을 하여 완치되었다.
1932년 상하이에서 자유 혁명자 연맹을 조직하여 흑색 공포단으로 개칭하고, 조직을 강화하여 대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 당시에 구파 의사도 동일한 시도를 준비했었으나 중국인 조력자인 왕야차오가 권총은 전달했으나 약속했던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실패하였다.
1933년 3월 상하이 훙커우에서 정현섭, 원심창, 이강훈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하려고 모의한 육삼정 사건으로 잘 알려진 아리요시 아키라 공사 암살 미수 사건을 도모했다가 육삼정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상해 일본 총영사 보고문에서 일본제국 경찰의 세밀한 사전 체포 계획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컨대 아마 의거가 사전에 누군가에게 누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나가사키 법원에서 백정기 의사와 원심창은 무기 징역을,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았다. 백정기 의사는 이사하야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옥사하였다.
3. 사후
1946년 박열, 이강훈 등 아나키스트계 독립 운동가들이 3 의사의 유골 수습을 촉구하여 '3의사 국민장 봉장 위원회'를 발족하고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골을 일본으로부터 회수하여 7월 6일 국민장을 실시하였고, 현재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를 제외한 삼의사중에선 가장 최연장자다. 그다음이 이봉창, 윤봉길순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그의 고향인 전라북도 정읍에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위치는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영원로 1049.
4. 여담
얼굴이 매우 하얗고 잘생겼다고 한다. 정현섭 선생의 말에 따르면 남자인 본인이 봐도 정말 잘생겼다고. 게다가 깨끗한 성품과 곧은 의지, 선비같은 인자함을 지녔다고. 실제로 위사진을 보면 꽤 미남이다.
폐결핵으로 상하이의 병원에 입원했던 시절, 역시 폐병으로 입원한 일본 갑부의 딸과 서로 연정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백정기 의사는 본인이 독립운동가이며 소녀가 일본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매우 고민했다고 한다. 결국은 소녀가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그대 옆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라며 눈물로 애원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연인으로 발전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1년 뒤, 치료가 끝나자 "사랑하는 여자도 조국 앞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야" 라며 뒤도 보지않고 곧바로 병원을 나갔다.
그러나 후에 가끔씩 우울할 때면 동료 정현섭에게 소녀의 눈망울과 눈물이 생각난다며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얘기하곤 했다고 한다. 백정기 의사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순수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자유인 이회영에서 권오중이 연기했다. 여기서는 일본인 여성이 아닌, 같은 조선인 여성으로 독립 운동 후배인 홍정화(이아이 분)를 좋아하는 것으로 나온다.
5. 관련 문서
[1] 29세손 '기(基)'자 항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