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진영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엄진영은 1899년 3월 30일 경상도 동래도호부에서 의관(議官)을 맡고 있던 엄석찬(嚴錫贊)의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대표였다. 3월 7일 부산상업학교(釜山商業學校) 학생 대표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한 그는 김귀룡 등 대표들과 함께 구체적으로 계획을 진행시키던 중, 3월 10일 동래고보 선배로서 경성고등공업학교(京城高等工業學校)에 다니던 곽상훈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수학교사 이환(李環)과 만나 독립만세시위에 대해 상의했다.
이후 주동 학생들과 함께 하숙방을 전전하며 협의한 끝에 동래읍 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를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 태극기, 독립만세기를 제작하기로 했다. 엄진영과 주동 학생들은 3월 11일부터 13일까지 고영건의 하숙집에서 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5백여매의 독립선언서와 대형 독립기 그리고 수백매의 태극기와 고종의 독살을 폭로하는 ‘오왕약살(吾王藥殺)’이라는 격문도 준비했다. 이윽고 3월 13일 오후 2시, 그는 김귀룡 등과 함께 동래군청 앞 시위군중에게 인쇄물을 살포하고 동래군청 정문(망미루)에 올라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점차 장꾼들까지도 가담하여 읍내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과 기마경찰이 출동하여 발포하며 시위 군중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였고, 이때 엄진영도 체포되었다.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2년 경성예술학원을 졸업하고, 무대예술연구회를 창설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 항일 운동을 지속하였다. 1924년 배일 사건 및 일본인 경찰관 습격 상해 사건으로 벌금 20엔을 선고받았는가 하면, 1927년 민족 해방 비밀 결사 사건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았다. 1928년 8월 12일 지역 통합 노동조합으로 창립된 동래노동조합의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6월 5일에는 일본 경찰의 만행을 보고 격분해 그를 구타했다가 다시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고, 1931년에는 제국주의 반전사상 출판 사건으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8.15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에서 선전 조직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46년 2월 20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남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우익 진영에서 활동했지만 좌익 계열과의 격렬한 대립으로 심신의 고통을 겪은 끝에 1947년 6월 26일에 부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엄진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