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건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고영건은 1897년 12월 12일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면 평강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던 1919년 3월 3.1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이 동래에 전해졌다. 이어서 3월 7일에 서울에서 온 학생 대표와 부산상업학교 학생 대표가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와서 만세 시위를 협의했다. 고영건은 엄진영·김귀룡 등과 만나 독립 선언서를 전해 받고 동래 지역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3월 10일 동래고등보통학교 선배이며 경성고등공업학교에 다니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곽상훈은 수학 교사 이환(李環)과 만나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하여 상의하고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만세 시위의 배후에서 참모 역할을 담당했다.
고영건 등은 협의를 거쳐 동래 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를 거사일로 정했다. 고영건은 3월 11일부터 13일까지 자신의 하숙집에서 학교 등사판을 가지고 와서 500매의 독립 선언서와 대형 독립기, 수백 매의 태극기를 제작하고 고종의 독살을 폭로하는 오왕약살(吾王藥殺)이라는 격문도 준비했다. 이후 3월 13일 오후 2시, 엄진영이 군청 앞 망미루(望美樓)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를 신호로 고영건은 학생들과 같이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고 주위의 장꾼들도 호응하여 장터는 독립의 의기로 가득 찼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 50여 명의 수비대와 기마경찰들이 출동하여 군중과 학생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고영건도 체포되어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했지만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 도쿄로 유학해 메이지대학 학부를 졸업했으며, 중국 둥베이로 망명하여 민족 해방 운동에 자금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1941년 8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고영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