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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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4대 전·후반기·제5대 민의원의장
곽상훈
郭尙勳 | Kwak Sang-hoon
'''
[image]
제3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시절
<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출생'''
1896년 10월 21일
경상남도 동래군 읍내면 복천리
(現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산동)#
'''사망'''
1980년 1월 19일 (83세)
서울특별시 도봉구 우이동 118-7
(現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본관'''
현풍 곽씨
'''호'''
삼연(三然)
'''재임기간'''
제3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1954년 6월 9일 ~ 1954년 12월 2일
제4대 전반기 국회의장
1960년 5월 2일 ~ 1960년 6월 6일
제4대 후반기 국회의장[1]
1960년 6월 7일 ~ 1960년 6월 23일
제5대 민의원의장
1960년 8월 8일 ~ 1961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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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배우자''' 장혜경
'''자녀'''
아들 곽헌태, 곽원배, 곽성태, 곽용태
'''학력'''
동래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고등공업학교 (중퇴)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기)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
'''의원 선수'''
'''5'''
'''의원 대수'''
'''1''', '''2''', '''3''', '''4''', '''5'''
'''경력'''
신간회 중앙간부
인천사회사업협회회장
인천체육회회장
조선청년단 경기도연합회 위원장
반민특위 검찰관
탄핵재판소 심판관
제헌 국회의원(경기 인천부 갑 / 무소속)
제2대 국회의원(경기 인천시 을 / 무소속)
제3대 민의원의원(경기 인천시 을 / 무소속)
제4대 민의원의원(경기 인천시 을 / 민주당)
제5대 민의원의원(경기 인천시 을 / 민주당)
제4대 전·후반기 민의원의장
제5대 전반기 민의원의장
길의사기념사업회장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
매헌 윤봉길 기념사업회장
제1·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회 위원장
대통령 권한대행

1. 개요
2. 생애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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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가.

2. 생애


1896년 동래부에서 태어났다. 동래고보를 졸업하였고, 191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후반, 신간회(新幹會)에 들어가 검찰 위원으로 활약했다. 1927년부터 1940년까지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와 지국장을 지냈다. 일본의 관동 대지진 때는 한국인 학살 사건의 진상 기록을 수집하였으며, 그로 인해 상하이로 망명 생활을 하였다.
8.15 광복 후 바로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 때 공천 탈락되자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사사오입 개헌 당시엔 부결 이튿날 가결을 선포한 최순주 부의장 앞에서 자신도 부의장이라며 부결을 재선포하게 된다. 최순주는 정족수 '계산착오'를 빌미로 사임하였는데, 자유당은 곽상훈 부의장에 대해서 법률상 근거 없는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부의장 권리 행사를 4개월 이상 막는 등의 행패를 부렸다.
이후 제2대, 3대, 4대, 5대 국회의원(민주국민당-민주당)을 역임하였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이기붕의 뒤를 이어 민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3차 개헌으로 부통령 제도가 폐지되고 내각책임제가 도입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 순위에 변동이 생겼고 민의원 의장인 곽상훈이 개헌 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을 것으로 전망되었다. 곽상훈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국회에 의장직 사직서를 제출하겠다고 하였는데, 사직서가 헌법이 공포된 다음날인 6월 16일날 국회에 제출되면서 형식적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의 지위에 올랐다. 곽상훈이 민의원 의장 직을 사직하고자한 것은 대통령 권한대행 자격으로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법적 문제를 우려하였기 때문인데, 실제로 이에 대해서 민의원 의장이 권한을 대행하는 것 뿐 공무원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거나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는 이상 공무원의 성격을 띈다라는 등 의원들 간 갑론을박이 있기도 하였고, 법제사법위원회개헌기초위원회에 이에 대한 법해석을 위임하였다.# 그 결과 위원회에서는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17일 사표 수리에 대해 표결한 결과 가결 61, 부결 70으로 사표 수리가 부결되면서 곽상훈은 대통령 권한대행 직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19일에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 있어서 누가 대통령이라는 국가원수의 자격으로 미대통령을 영접하느냐는 것이었다. 원래 계획으로는 곽상훈이 민의원 의장직을 사직하기로 하면서 허정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격으로 미대통령을 영접하는 것이었는데, 곽상훈의 의장직 사직이 부결되면서 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허정 국무총리가 한국정부를 대표하여 모든 역할을 맡고, 곽상훈은 국회의장으로서만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을 맞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작은 소동이 일단락되었다.# 6월 22일 기존과 동일한 법적 문제를 이유로 재차 민의원 의장직에 대한 사표를 제출했는데, 이는 기존 선거법을 대신하여 새로 제정되는 국회의원 선거법에서 공무원의 선거 출마와 관련한 조항에 변동이 있었고, 권승렬 법무장관도 이를 지적하여 의장직을 사임해야 한다고 전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제4대 국회의 사실상 마지막 날 가결 101, 부결 13으로 사표가 수리되면서, 헌법이 개정된 6월 15일부터 6월 23일까지 8일간 이어졌던 대통령 권한대행 직도 내려놓게 되었다.# 대통령 권한대행은 다시 허정 국무총리에게 넘어갔고 제5대 국회의원 선거백낙준 참의원 의장이 선출될 때까지 직을 유지하였다.
곽상훈은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에 성공하였고 또다시 민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5.16 군사정변 직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여 1965년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2대 이사장,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 및 육영재단 초대 이사장, 1971년 한국장학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고, 1972년 10월 유신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장이 되었다. 해당 행보로 인하여 언론인 청암 송건호박순천과 싸잡아 '변절자'라고 그를 비난했다.

1969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1979년 대통령 선거 때 최규하 대통령 선출을 알렸고, 1980년 1월 19일에 85세로 사망하여 사회장으로 국립묘지에 묻혔다.

3. 관련 문서




4. 둘러보기



[1] 대통령 권한대행 수행 (1960년 6월 16일 ~ 1960년 6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