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트 뭉크

 

'''노르웨이의 화가'''
'''이름'''
'''에드바르크 뭉크
Edvard Munch'''
'''출생'''
1863년 12월 12일 /
스웨덴-노르웨이
'''사망'''
1944년 1월 23일 (향년 80세) /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 오슬로
'''국적'''
노르웨이 [image]
1. 개요
2. 상세
3. 작품


1. 개요


[image]
대표작은 절규.[1]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겸 판화 작가. 노르웨이에선 위인 대접을 받는 인물로, 그의 초상이 1000 크로네 지폐에 들어가 있다.
어릴적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 그리고 연속된 사랑의 실패를 겪은 뭉크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존재의 근원에 존재하는 고독, 질투, 불안 등을 인물화로 표현하는 성향을 갖게되었다. 또한 본인의 몸이 태어날때부터 약해서 이런 방면으로 많이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들[2]은 전반적으로 우울하거나 신경증/불안의 느낌이 나는 우중충한 작품들이 많다. 그는 당대 유행하던 풍경화를 위시한 자연주의의 경향에서 벗어나 이후 융성하게 되는 표현주의 양식을 주로 채택하였다. [3]
지금도 무척 유명한 화가지만 생전에도 돈을 잘 번 화가이기도 했다. 생전에 두 지역의 넓은 땅을 구매해서 거기서 살며 그림을 그렸을 정도(...).

2. 상세


뭉크는 군의관 아버지와 예술적 소양을 갖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삶에는 어린 시절부터 불운이 몰아쳤다. 그는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고, 몇 년 후에는 어머니를 대신해줬던 큰누이마저 세상을 떠났다. 비슷한 시기에 어린 여동생은 정신병 진단을 받았고, 점점 종교에 집착하게 된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순종을 강요하며 광신도처럼 변해갔다. 게다가 뭉크는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해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가 찾은 유일한 탈출구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캔버스에 담아내며 어두운 현실을 잊고 견뎌내는 것이었다.
뭉크의 연애사는 그의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만큼 우중충했으며, 뭉크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에게도 여자들과의 관계가 아예 전무했던 건 아니었으며, 밀로 탈로, 다그니 유엘, 툴라 라르센이라는 세 여자와 나름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다만 셋 중 어느 누구와도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끊겼다(...)
뭉크의 첫사랑은 헤이베르그라는 크로아티아 사교계 유명인사였다. 그녀는 해군 장교의 아내 였으며 그녀는 당시 신여성의 상징과도 존재였으며 팜므파탈의 기질이 다분했다. 뭉크는 헤이베르그를 사랑하며 중독과도 같은 강렬한 경험을 하게되지만 여기저기서 인기가 많았던 밀리는 뭉크에게 상처를 주고 떠난다.[4] 뭉크는 크게 상처를 입고 여자에 대한 혐오증 비슷한 감정을 품게된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흡혈귀이다.[5] 이후 뭉크는 베를린에서 살면서 스타니스와프 프쉬비셰프스키(Stanislaw Przybyszewski) 등의 예술가들과 교류하였는데, 이 프쉬비셰프스키에게 자신의 소꿉친구이자 연인이었던 다그니 유을(Dagny Juel)를 빼앗긴다.[6] 뭉크는 '질투'나 '이별'등의 그림을 통해 다그니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는데 결국 다그니는 1893년 프쉬비셰프스키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고 이에 분노한 뭉크는 배신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마돈나'를 그리게 된다. 그 후 한동안 좌절에 빠졌던 뭉크는 그 후 툴라 라르센(Tulla Larsen)이란 여자와 교제하게 된다. 그동안 뭉크를 떠나 상처를 주었던 여자들과 달리 툴라의 경우 그보다 4살 더 연상인 연상녀로써 예술 방면에 해박하고 성격도 적극적이어서 뭉크와 깊은 관계를 지녔지만 그 사랑이 너무 지나친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녀는 뭉크에게 집착하기 시작했고 결혼을 요구했다. 점점 툴라를 멀리하는 뭉크에게[7] 툴라는 자살하겠다고 협박한다.
뭉크는 결국 툴라에게로 돌아와 툴라를 말렸는데, 하필이면 이 때 총이 발사되면서 뭉크의 왼쪽 세 번째 손가락(중지)이 관통당하는 사태가 생기고, 뭉크는 결국 영영 왼손의 중지를 잃고 만다.이 일을 겪은 후 뭉크가 그린 그림이 '마라의 죽음'이다.[8][9]
툴라와의 결별 이후 뭉크는 과도한 음주, 싸움 등을 하다보니 불안증세가 더욱 심해졌고 거기에 더해 환각 증세까지 얻게 된다. 결국 뭉크는 야콥슨이란 의사의 병원에 가서 8개월 동안 요양치료를 받았는데, 이 때의 경험 덕분인지 요양치료 시기 이후의 뭉크의 그림에서는 특유의 신경증 + 비관적인 느낌이 줄어들고 색채가 좀 더 밝고 다양해졌다고 한다.
이후 뭉크는 그림을 그려 번 돈으로 두 지역[10]의 넓은 땅을 사서 그곳에서 풍경화나 자화상 등을 주로 그리며 20년을 살았다고 한다. 또 대량의 판화 작품도 제작했다고 하며, 한 작품을 팔고 나면 같은 소재로 작품을 또 그리는 일을 반복해서 작품의 숫자가 많아졌고, 현재의 뭉크 미술관이 그의 전 작품을 소장할 수 있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는 1944년 1월 23일에 사망했는데, 유언으로 자기의 전 작품을 시에 기증했다고 한다.
엄청난 다작왕이기도 하다. 그가 기증한 작품들만 해도
유화 : 약 1100여점
판화 : 약 18000여점
드로잉 + 수채화 : 약 4500점
조각 : 6점
그 외 : 92권의 스케치북과 편지, 다량의 석판 등
이 정도(...) 아마도 그가 80세라는 긴 세월을 살면서 계속 화가 일을 해온 것도 있어서 그의 손에 제작된 작품도 많아진듯하다.

3. 작품



[1] 뭉크는 몰라도 《절규》 그림은 어디서 한 번 봤다고 할 정도로 매우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 중의 대표작이다. 그래서인지 저 그림은 유독 패러디도 많다.[2] 특히 그 중에서도 잘 알려진 그의 그림들.[3] 다만 평생 우중충한 그림들만 그리고 산 것은 아니며, 《태양》이라는 작품처럼 밝고 화사한 작품도 그린 바 있다.[4] 애초에 유부녀에 사교계 유명인사인 그녀에게 어머니 없이 누나의 손에 자란 경험없는 서투른 청년이 눈에 찰리 없었다.[5] 여자가 남자의 피를 흡혈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6] 뭉크에게는 함께 어울리던 친구 둘이 있었는데 뭉크를 포함한 세명 모두 유을에게 반했다고 한다.[7] 이는 그가 어릴 적 불우한 가정환경을 지녔기에 결혼과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8] 당대 유명한 프랑스 혁명가 마라의 이름을 빌린 그림으로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침대에 쓰러져있는 뭉크와 전라로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툴라가 그려진 그림이다.[9] 《살인녀》, 《마라의 죽음》 등이 결별 이후의 툴라에 대한 뭉크의 감정을 표현한 그림이라고 한다.[10] 스퀘옌과 에킬리라는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