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네스트 르낭

 


1. 개요
2. 초기활동
3. 초기저작
4. 종교 논쟁
5. 정치에 대한 관심
6. 후기 저작
7. 에르네스트 르낭 사상의 특징


1. 개요


'''Joseph Ernest Renan'''
1823.02.28 ~ 1892.10.02
에르네스트 르낭 혹은 조제프 르낭으로 불린다.
프랑스 실증주의 대표자의 한 사람. 주요 저서인 《그리스도교 기원사》(7권, 1863∼1883)는 예수의 인간화, 그리스도교의 문화사적 연구, 성서세계의 심리적 ·문학적 재현에 의의가 있다.
르낭은 방대한 글을 저술하였고 당대 수많은 학자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현재 국내에서는 《예수의 생애》와 《민족이란 무엇인가》 두 권만 만나볼 수 있다.

2. 초기활동


고향 트레기에의 교회부속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1838년 생니콜라뒤샤르도네 신학교 장학생이 되었다. 그뒤, 생쉴피스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신앙의 위기를 겪고 1845년 어쩔 수 없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떠났다.
교회의 가르침이 역사비판주의가 발견한 사실들과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으나 어느 정도는 신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

3. 초기저작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과 유럽 여러 지역의 혁명적 분위기는 르낭이 보기에 완성과정에 있는 하나의 종교였다. 혁명을 구세주로 생각하면서 그는 때로는 정열적으로 때로는 비판적으로 혁명에 참가했고 이러한 자신의 모호한 태도를 《학문의 미래》(L'Avenir de la science, 1890)에 옮겨놓았다.
이 책의 주제는 그가 자연과학과 동등한 가치를 가진 인문과학이라고 생각한 종교 기원사의 중요성이었다.
당시 르낭은 교권에 반대하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프랑스 정부는 1849년 교황권이 여전히 정치적 중요성을 갖고 있던 이탈리아로 그를 파견해, 전에는 프랑스 학자가 접근할 수 없던 필사본의 분류를 돕게 했다.
1850년 파리로 돌아와 여동생 앙리에트와 살면서 그녀가 저축해둔 돈과 자신이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버는 얼마 안 되는 급여로 생활했다. 중세 이슬람 철학자의 사상에 관한 박사학위논문 《아베로에스와 아베로에스주의》(Averroes et l'Averroisme, 1852)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정기간행물 《르뷔 데 되 몽드》, 《주르날 데 데바》지에 실었던 글을 모은 2권의 평론집 《종교사 연구》(Etudes d'histoire religieuse, 1857), 《도덕 비판 평론》(Essais de morale et de critique,1859)를 내면서 학문적 저술활동을 계속했다.
《종교사 연구》는 중간계층의 대중에게 종교에 대한 역사적, 인문주의적 접근의 통찰력과 감수성을 가르치고 있으며, 《도덕 비판 평론》의 글 대부분은 프랑스 제2제정(1852~1870)의 물질주의와 불관용을 르낭 자신의 귀족주의적 이상에 비추어 비난하고 있다. 즉 '정신의 보루'로서 행동하는 지식인은 지적, 정신적 순화를 통해 전제정치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56년 화가 아리 셰페르의 조카 코르넬리 셰페르와 결혼했고, 1860년 10월 고고학에 관련된 일을 맡아 레바논으로 갔다. 그가 발견한 페니키아어 비문은 《페니키아 탐험》(Mission de Phenicie,1864~1874)에 실려있다. 뒷날 이 비문은 《셈족 비문 전집》(Corpus Inscriptionum Semiticarum)에도 실렸는데, 그는 '금석학, 문학 아카데미'를 통해 이 책의 출판을 도왔다. 그러나 고고학은 그의 주된 관심분야가 아니었다.
1861년 4월, 예수의 생에에 관한 자료와 영감을 얻기 위해 아내와 여동생과 함께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다. 레바논에서 첫번째 초고를 완성하긴 했으나, 그 자신은 지독한 병에 시달리고 1861년 92월 24일 암시트에서 여동생 앙리에트가 말라리아로 죽는 결과를 낳았다.

4. 종교 논쟁


르낭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글을 써서 콜레주 드 프랑스의 히브리어 교수직을 얻으려고 했으나 이 책을 집필하기 전인 1862년 1월 11일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2월 21일 취임강연에서 그는 17,18세기 프랑스 주교이자 역사가 자크 보쉬에의 말을 빌려 예수를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지칭했다. 그는 이표현이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했으나, 성직자들은 이 말의 무신론적 함축을 문제 삼았고, 결국 르낭의 교수 자격은 정지되었다.
르낭은 프랑스 제정 도서관의 직책 제의를 거절하고 몇 년 간 문필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복직한 것은 1870년에 이르러서였다. 이런 사정 때문에 그는 교회에 더욱 반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그는 나폴레옹의 조카 마틸드 공녀의 살롱 같은 반정부 모임에 자주 참석했고 귀스타브 플로베르, 샤를 오귀스탱 생트 뵈브, 이폴리트 텐, 공쿠르 형제 등 유명 문필가나 역사학자들과 교제하였다.
1863년 《예수의 생애》(Vie de Jesus)가 출판되었을 때 교회는 적의에 찬 비난을 르낭에게 퍼부었다. 이 책은 역사에 관한 르낭의 저작 중 최고는 아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성립을 대중적 상상력을 통해 '신화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다가 그의 다른 역사저술처럼 메시아주의 문학에 속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책은 도서출판창과 동서문화사에서 번역되어 국내 판매 중에 있다.
1864년 아내와 함께 소아시아를 여행한 후 연속물인 《그리스도교 기원사》의 일부로 《예수의 생애》를 뒤이은 《사도들》(Les Apotres, 1866)과 《사도 바울로》(Saint Paul, 1869)를 펴냈다. 이 2권의 책은 소아시아 도시들의 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어떻게 그리스도교가 퍼질 수 있었는지를 탁월하게 묘사한 것으로서 그가 '19세기 지식인은 대중을 새롭게 계몽시킬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문제에 골몰했음을 보여준다.

5. 정치에 대한 관심


르낭은 점차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1869년 제2제정의 '자유주의' 국면이 시작될 때 의회선거에 나갔으나 낙선했다. 같은 해 <프랑스의 입헌군주제>라는 글을 써 입헌군주제를 옹호했다. 이처럼 그는 당시까지 자유주의자였다.
1870 ~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때는 이러한 자유주의 사상을 가지고 국경을 오가면서 독일의 신학자 다피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와 서신을 교환했고 프로이센 황태자이자 이후 독일의 황제가 된 프리드리히 3세에게 전쟁을 중지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비참한 패배와 민주주의에 대한 분노로 말미암아 그는 자유주의자에서 권위주의자로 전향하였다.
그는 《지적, 도덕적 개혁》(La Reforme intellectuelle et morale, 1871)에서 프랑스의 국가재건을 위해서는 1806년 예나 전투 이후의 프로이센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조언에 따라 프랑스는 교권주의 군주국이 되어갔고, 르낭은 곧 이것이 자신이 원하던 바가 아님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이 제3공화국(1870~1940)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공직생활에서 물러나 어떤 관여도 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정치사회 현장에서 멀어져 저술 활동에 힘을 쏟기 시작했고, 1878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6. 후기 저작


르낭은 '우주의 향연'이라는 상상적이고 역설적인 이상을 펼쳐보였다. 이 이상은 네로에 대한 풍자적 묘사와 역사의 대변동적 종말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찬 묵시론적 분위기와 함께 《적 그리스도》(L'Antechrist, 1973), 《그리스도교 기원사》 4권에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의 역사서술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으로 꼽힌다.
'우주의 향연'은 《철학적 대화와 단편들》(Dialogues et fragments philosophiques, 1876)에도 가상의 결말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그는 오히려 《적 그리스도》에서 이전보다 더 숨은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사실 그가 말년에 택한 에피쿠로스 철학은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을 감추고 있다. 르낭의 피상적인 측면을 더 잘 볼 수 있는 글은 그가 공화정을 받아들인 과정을 담은 《철학 드라마》(1888)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캘러밴》(Caliban, 1877)과 《젊음의 물》(L'Eau de jouvence, 1879)에서 찾아볼 수 있다.
《캘러밴》에서 귀족정치는 민주정치에 패배하는데, 이는 전통적인 제재수단인 마법주문이 실증주의에 물든 사람들에게는 효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과학1적 권력장치가 효율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사실상 교권주의적 군주정을 뜻하게 될 것이므로 르낭의 관심 밖이었다.
르낭의 에피쿠로스주의는 《복음》(Les Evangiles, 1877)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리스도교 기원사》의 나머지 책들 가운데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를 그린 《그리스도교 교회》(L'Eglise chretienne, 1879)에ㅔ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연구이자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882)는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1876년 이후 르낭은 회고록 《젊은 날의 추억》(Souvenirs d'enfance et de jeunesse, 1883)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은 실패한 성직자가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는데, 숨은 신에게 운명을 건 것이 행복을 낳았다고 자신의 생애를 재조명하고 있다.
《젊은 날의 추억》에서 르낭은 아이러니를 사용하여 자기만족에 제동을 걸고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차분한 느낌으로 서술하였다.
이후 저술에서도 르낭은 아이러니, 회의, 고뇌의 특징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렇듯 르낭은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특성을 보였다.
《네미의 성직자》(Le Pretre de Nemi, 1885)와 《이스라엘 민족사》(Histoire du peuple d'Israel, 1887~1893)에서는 인간의 도덕적 심성에 관한 그의 견해를 표현했다. 르낭은 유대 메시아주의 역사는 인간이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믿음을 지닐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증거를 제공해주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유대주의가 사라진다 해도 예언자의 꿈은 언젠가 실현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고 "죄를 보상하는 하나님 없이도 정의는 진정으로 세상에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펼쳐보였다.
그는 이 책을 완성하기 위해 너무 힘쓴 나머지 1892년 책이 완성된 직후 사망하였다.

7. 에르네스트 르낭 사상의 특징


르낭은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와 권위주의를 오갔으며, 종교적으로는 굳은 신앙과 회의주의 사이에서 고뇌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당시 프랑스 중간계층의 모순과 고뇌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상의 대표자이자 사상가로 꼽혔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영향력은 모리스 바레스, 샤를 모라스와 같은 민족주의자에서부터 아나톨 프랑스, 조르주 클레망소 같은 공화주의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정치적 영감을 불어넣었고, 귀스타브 르 봉과 같은 다양한 분야의 학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당시의 큰 문제였던 과학과 종교 사이의 적대감을 완화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러한 완화 국면에 기여한 행보와 달리 르낭 스스로는 이 갈등에 평생토록 깊이 빠져서 고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