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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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체는 항상 무한한 쾌락을 요구하지만, 지성은 뒤따르는 불편을 고려하여 욕망을 제한한다.'''
쾌락주의의 시조격 철학자.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인이다. 그리스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창시자로, 32세의 나이에 아테네에서 '정원'이라는 학교를 열었다.… 에피쿠로스는 이미 이런 종류의 선행 형식과 싸운 적이 있었다. 에피쿠로스가 무엇과 싸웠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루크레티우스를 읽어보라. 그는 이교도와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교'에 맞서 싸웠다. 말하자면 죄 개념에 의한, 벌과 불멸 개념에 의한 영혼의 타락에 맞서 싸웠다. ㅡ 그는 지하적 제의들, 잠복하고 있던 그리스도교 전체와 맞서 싸웠다 ㅡ 불멸을 부정한다는 것은 당시에 이미 진정한 구원이었다. ㅡ 그리고 에피쿠로스가 이겼을 수도 있다. '''로마 제국의 존경할 만한 사람은 전부 에피쿠로스주의자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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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2. 사상
당대에 에피쿠로스가 남긴 저서는 300편이 넘으나(물론 당시의 책이니 만큼 양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전하는 것은 오직 편지 몇 장과 다른 책에 인용된 단편적인 내용뿐이다.[1] 안습. 하지만 그 내용 중에는 현대인이 보기에 당시의 사고라기에는 충격적이기까지 한 것들이 많다. 우선 그의 글 중에는 사회계약론과 유사한 주장이 등장한다.
또한 에트루리아 철학의 영향을 받아 데모크리토스 등이 주창한 입자설(원자설의 시초)을 수용하였다(단 데모크리토스의 주장을 비판한 내용도 있다).자연의 정의는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해침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려는 상호 이득의 협정이다. / 서로를 해치지 않고 해침을 당하지 않도록 계약을 맺을 수 없는 짐승들에게는, 어떤 것도 정의롭거나 부정의하지 않다. 또한 해치지 않고 해침을 당하지 않도록 계약을 맺을 수 없거나, 그런 계약을 맺을 의사가 없는 인간 종족에 대해서도, 정의/불의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 정의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어디서든 사람들의 상호 관계에서 서로 해치지 않고 해침을 당하지 않으려는 계약이다.
- '중요한 가르침' 31 ~ 33
2.1. 쾌락주의
흔히들 그가 '쾌락주의'의 대표자였다는 것때문에 방탕하고 문란한 사상가였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고 스토아 학파에서도 이를 빌미로 에피쿠로스를 공격했지만 이는 전혀 잘못된 이해이다. 오히려 그를 까는 예시로 들었던 방탕한 삶 등은 에피쿠로스와 반대항에 놓여있던 키레네 학파의 것에 가깝다. 단 그는 방탕한 삶 등으로 누리는 쾌락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러한 쾌락도 행복의 일종이며 윤리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다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 쾌락을 추구해보았자 그에 수반되는 고통이 더 클 것이라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에피쿠로스는 성행위는 남에게 피해를 안 주면 운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고통의 부재'로, 오히려 쾌락을 일부러 추구하다보면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그가 추구하라고 주장한 것 중의 하나는 '신체의 고통이 없는 상태'(ἀπονία)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생을 유지할 정도만을 소비하는 절제가 필요하다. 또 한편으로 에피쿠로스는 망상과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이 정신적인 고통을 준다고 보고 우주와 고통, 욕망 등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보았는데(여기서 철학이 필요해진다), 이를 통해 '영혼의 평안'(ἀταραξία)을 얻을 수가 있다고 보았는데, 이 아타락시아 개념은 되려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 개념과 상당히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
또 한편으로 그는 철저히 감각에 기초하여 그의 학문을 전개했으며, 앞서 말했듯 입자설에 맞추어 우주론을 펼쳤다. 다만 이 과정에서 (남아있는 그의 글에서는) 천문학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했는데, 천문학에서 대해서는 이런저런 입장을 취합하다보니 뻘소리 비슷한 느낌이 나기도 한다. 애초에 그 부분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 에피쿠로스는 가까이 다가가 알 수 없는 천체들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도 없고 그저 우리에게 주어지는 감각만 설명하면 된다고 말하기도 했고...[2]
2.2. 무신론 논쟁
고대 서양 무신론의 대표주자로도 잘 알려져 있으나, 신의 부재를 '직접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맥락상 무신론으로 보아도 무방하긴하다) 그는 신을 계속해서 그의 책에 언급하지만 그의 저서에서 신은 일반적인 인간보다 초월적인 존재로 쾌락을 누리고 있는 존재일 뿐이며, 그러한 신이 무언가를 주재해 움직인다면 완전한 쾌락의 상태에서 벗어날 것이므로 신은 그러지 못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물론 세상을 주무르는 초월적인 인격신의 개념을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당시로서 생각할 수 있는 상당수의 신 개념을 비판한 것이기는 하다.만약에 신이 악을 막으려 하지 않는다면, 신은 선하지 않다.
만약에 신이 악을 막지 못한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다.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신이 악을 막으려 하지 않거나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이 악을 막으려 하지 않거나 막을 수도 없다면
우리는 왜 그를 신이라고 불러야 할까?
에피쿠로스의 무신론 논증.
에피쿠로스는 모든 인간이 도달할 수밖에 없는 고통의 최고점인 죽음이 쾌락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죽음은 그 자체로서 매우 고통스럽지만 인간이라면 결코 피할수 없다는 점에서, '고통의 부재'를 추구해야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에게는 최종 보스라는 느낌이랄까. 간단한 역설로 요약해서 설명해보자면, "인간이 살아있다면 죽음을 경험할 수 없고, 죽었다면 죽음을 느낄 수 없다. 고로 인간이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그 마음을 던져버려라. 그렇다면 그대는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난 것이다."
중세시대에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위험한 사상으로 까였다. 그래서 신곡 지옥편에서는 지옥 6층인 이단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다.
2.3. 성향
이외에 공동체적 삶을 살면서 우애를 강조했으며(그러나 재산을 공유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3] ) 노예와 여성(심지어는 창녀도) 등까지도 학파에 받아들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 이후 혼란스러웠던 그리스의 정치 상황 등에 영향을 받아 그의 철학은 은둔적이고 개인의 보신(保身)적 성향이 강했으며, 정치성은 약했다[4] .
3. 관련 서적
- 문학과지성사에서 '쾌락'이라는 제목으로 1998년에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등에 인용된 에피쿠로스의 단편들을 옮긴 원전번역이다.
- 동서문화사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번역서인 '그리스철학자열전'(번역자가 시치미를 떼고 있으나 일본어 중역이다)에도 '에피쿠로스' 부분이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