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

 



'''로마 제국의 5대 황제
Nero | 네로
'''
[image]
''''''
Lucius Domitius Ahenobarbus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본명)
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입양 후 개명)
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즉위 후 추가 개명)
'''배우자'''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53년 결혼 / 62년 사망)
포파이아 사비나 (62년 결혼 / 65년 사망)
스타틸리아 메살리나 (66년 결혼)
스포루스 (67년 결혼)
피타고라스 (자유민) (64년 결혼)
'''가족'''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父)
소 아그리피나(母)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子女)
'''생몰 년도'''
37년 12월 15일[1] ~ 68년 6월 9일 (30세)
'''재위 기간'''
54년 10월 13일 ~ 68년 6월 9일
1. 개요
2. 생애
2.1. 출생과 본가
2.2. 양자 입적과 황제 즉위
2.3. 즉위 초반과 친족 살해
2.4. 그리스 순회 공연과 파르티아 정책
2.5. 계속되는 막장행보
2.6. 로마 대화재
2.7. 화폐개혁
2.8. 몰락
2.8.1. 피소 음모
2.8.2. 그리스 순회 공연과 코르불로 사건
2.8.3. 고립과 최후
3. 외모와 사생활
4. 평가
5. 기타
6.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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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시작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본명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bus). 매장지는 본가인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집안의 공동묘지(도미티이 아헤노바르비 마우솔레움)이다. 외종조부 클라우디우스의 둘째 사위가 된 뒤 양자로 입적되면서 오늘날 익히 알려진 풀네임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로 개명했다. 하지만 이 당시 클라우디우스와 황실 어른들은 아헤노바르부스라고 불렀고, 후계자가 되지 않았으며 본인 역시 제위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기 54년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하자 어머니 아그리피나, 세네카와 부루스 주도의 친위 쿠데타로 아우구스투스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후손[2]이자 클라우디우스의 외동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제치고 황제로 즉위했다.
즉위 당시와 처음 5년간의 기간은 황금기라고 불랄 만큼 평도 좋았고 활달하고 발랄한 성격, 총명함과 유머 감각으로 등장 당시부터 황제 개인의 인기가 상당했다. 이때 스승 세네카[3]를 중용해[4]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고 코르불로를 기용하여 파르티아 전선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그는 '''즉위 초부터 자신의 가족과 친척들을 여럿 죽이고 방탕한 생활'''로 인해 상류층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로마인들이 중요시 여긴 가족에 대한 사랑과 헌신, 도덕성, 청렴함과 고결한 미덕 등과 워낙 상반된 행동'''을 대놓고 벌인 탓에 '''막장성과 정신병자 수준의 광기를 동시에 갖춘 인물'''로 낙인찍혔다. 따라서 사후 로마 제국의 폭군 콤모두스, 광기의 대명사 엘라가발루스와 비교해보면 비교적 업적이 있음에도, 의도적인 기독교도 탄압과 어머니, 아내 등을 비롯한 본인 외의 일가 직계 친족살해, 선황이자 양부 클라우디우스 능욕, 심각한 사치와 난잡한 사생활 등의 종합적인 단점으로 오늘날까지도 '''동서고금 막론하고 폭군의 대표주자'''로 꼽히고 있다.
'''네로에 대한 평가는 그가 십년 넘게 제위를 지킨 기간동안의 객관적인 행적상 폭군이라는 것에는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일부 업적이 주목을 받으며 재평가를 받은 까닭에 오늘날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따라서 그를 평가하는 의견 중에서는 “제정신 아닌 짓들을 많이 저지르기는 했으나 네로 본인은 크게 잔인하지도, 정국에 아예 관심이 없지도 않았다. 단지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예술가적 기질이 너무 강한데다[5] 몇가지 심각한 실책을 저지르면서 반란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스스로 자살하는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고, “콤모두스, 포카스 등과 동일선상에 놓일 폭군은 아니더라도, 네로는 폭군이며 부적격자였다. 그가 저지른 실책은 칼리굴라보다 더 심각했다. 네로의 치세는 로마 제국에 분명히 악영향을 줬다. 그래서 그가 실각한 뒤, 내전에 접어들었다. 다행히 그 실책들은 베스파시아누스 아들들에 의해 정리됐다.”는 주장도 있다.
즉, 오늘날 재평가를 받으면서 네로는 과거처럼 무조건 폭군이라고 비난만 받고 있지는 않고, 본인이 한 일에 비해 후대에는 악명이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다며 동정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로마 대화재의 배후에 네로가 있었다는 루머는 거의 중상모략에 가까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그가 만든 황금궁전, 코르불로 숙청 등의 연이은 행동은 분명 그의 몰락을 가져온 최대 실책이었고, 군대의 신임까지 잃게 해 결국은 몰락의 결정타가 되고 말았다. 또 무리한 친족 살해와 스승 세네카 처형 등은 반대파들이 그를 실각시킬 당시 내건 명분 중 하나가 됐다는 의견도 나온다. 하지만 재평가를 하는 측 역시 이전까지의 황제들과 달리 진짜 악행을 수없이 저지른 네로를 동정할 뿐, 네로가 분명히 폭군이자 암군이라고 한다. 즉, 네로는 여러모로 거대한 제국 로마의 통치자 노릇을 하기에는 부적격한 인물이며, 그가 저지른 악행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재평가될 여지만 있을 뿐 피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

2. 생애



2.1. 출생과 본가


네로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인 (소)아그리피나의 아들로,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의 후처로 들어온 뒤, 클라우디우스의 딸과 결혼하면서 클라우다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인물이다. 네로의 모계는 익히 알려졌듯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이며, 네로의 외삼촌은 로마 제국의 3대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이다. 따라서 네로의 외조부는 아우구스투스가 일찍이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로 낙점한 게르마니쿠스였고, 외조모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대)아그리피나. 그리고 그 위로 더 올라가면 어머니의 할아버지는 티베리우스의 동복동생이자 리비아 드루실라의 차남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로 생전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로 진지하게 고려했다고 말한 대 드루수스이다. 따라서 네로는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자 대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 부부의 차남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외종손이 되며, 모계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그 자체였다.
부계로도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혈족인데, 정확히 말하면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일찍이 제위계승권과는 먼 방계 친인척이었다. 그러나 네로의 친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대(大)안토니아의 아들이고, 대(大)안토니아는 옥타비아 (아우구스투스의 누이)와 안토니우스의 딸이기에 네로는 부모 양쪽에서 율리우스 가문의 피를 받은 셈이다. 네로의 입양 전 본명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인데, 어릴 때에는 영특하고 현명하였다고 한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라는 이름은 할아버지의 이름과 똑같고 가문 대대로 세습해온 이름 중 하나였다. 그의 본가인 아헤노바르부스 가(家)[6]는 평민에서 시작된 도미티우스 씨족에 속한 노빌레스 가문 중 하나로 대대로 로마 집정관(consul)을 역임해 온 로마의 명문가였다. 하지만 아헤노바르부스 가는 여타 도미티우스 씨족 내 분파가문이나 다른 노빌레스 가문들과 달리 출신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하나같이 좋지 못했고, 가문에 대한 명성도 옛 공화정 유력 가문이라는 것을 빼곤 최악이었다.
100여 년 뒤 사람인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아헤노바르부스 가에서 그나마 나은 인물이 후술할 네로의 증조부이자 해군 제독이었던 그나이우스라고 기록했다. 또한 다른 역사가들도 한결같이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을 상당히 나쁘게 평가했는데, 그럼에도 네로의 조상 중에서 이름 있는 인물들이 꽤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로마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라면 잘 아는 사실이겠지만, 네로와 이름이 똑같은 고조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7] 네로의 고조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포르키아(Porcia)[8]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네로의 증조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Gnaeus Domitius Ahenobarbus).[9],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시대동안 게르마니아 전쟁 당시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와 함께 장군으로, 동방에서는 뛰어난 행정가 겸 외교관으로 상당한 능력을 뽐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의 할아버지)가 있다.
먼저 네로의 본가 가계 중 네로의 고조할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에 대해 살펴보면, 그는 공화정 말기의 내전 중 하나인 카이사르폼페이우스 간의 내전 당시 카이사르의 반대편에 선 뒤 대항한 정치인이었다. 네로의 고조부 루키우스는 공화주의자 소 카토의 누나 포르키아의 남편, 즉 소 카토의 매형으로도 익히 유명한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기간 당시 원로원이 카이사르에게 최종권고를 한 뒤 카이사르의 후임자로 지명한 원로원파 인사이자 카이사르에게 생포됐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람과 포르키아의 아들인 네로의 증조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10]와 더불어 카이사르의 대표적인 적수(適手)였다.
네로의 증조부 그나이우스의 행적을 좀 더 살펴보면, 그는 소 카토의 조카로 기원전 32년도 집정관을 지낸 거물급 인사이자 공화정 말의 이름 높은 해군제독이었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젊은 시절 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의 고조부)와 함께 카이사르에게 맞섰다가 같이 포로로 잡힌 전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는 카이사르에게 칼을 겨눴어도 반대편에게도 관용을 베푼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사면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사면령을 받았음에도 기원전 46년까지 이탈리아에 일부러 들어가지도 않으면서 정치경력도 피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완전히 정치활동을 그만두지 않았고, 속주에 정착하지도 않았는데 기원전 46년 이탈리아로 귀국해 다시 정치경력을 시작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됐는데, 암살 전후 그나이우스가 보인 여러 행동들은 로마인들에게 그의 지난 행실과 암살 직후 보여준 태도 때문에 암살배후로 의심을 받았다. 이렇게 세간의 의심을 받는 와중, 그나이우스는 필리피 전투 당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에 맞서 브루투스, 카시우스 편에 가담했고, 130여 척의 로마 해군을 진두지휘하며 공화정군의 일원으로 싸웠다.
기원전 42년 10월, 네로의 증조부 그나이우스는 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의 원로원파가 삼두파에게 필리피 전투에서 패하자 다른 동료들처럼 항복 또는 자살하지 않고 휘하 해군을 온전히 이끌고 탈출해 지중해를 떠돌며 여러 차례에 걸쳐 해전을 치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세력을 불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전기작가들을 비롯해 수많은 로마인들에게 카이사르 암살범 못지 않은 살인마 같은 사람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이후 그는 기원전 40년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의 중재 아래 삼두파 중 한축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화해해 안토니우스파의 해군을 사실상 이끌며 옥타비아누스에게 칼을 겨눴다. 하지만 그나이우스는 악티움 해전 당시 로마 내 여론이 안 좋고 안토니우스의 상황이 불리해지자, 가차없이 안토니우스를 배신한 뒤 그동안 죽일 듯 욕을 해댄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 의사를 먼저 밝히고 자신이 합류일을 정한 뒤 옥타비아누스 측에게 갔다. 하지만 그나이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만나기도 전에 함선 위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 따라서 이런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행적상 모습은 부친이나 먼 친인척들(특히 외삼촌 소 카토)과 달리 지나치게 기회주의적이고 비겁하다고 평가를 받았고, 급기야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됐다. 그리고 이런 조롱은 단순한 조롱을 넘어 해군 제독으로서 악티움 해전 이전까지 세운 많은 공적과는 별개로, 그 인간성이 비루하게 여겨졌으며 그러한 인식은 내전 이전인 마리우스술라 시대동안 가문이 쌓아놓은 안 좋은 이미지까지 겹쳐 그의 가문과 자손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쳤다.
해군제독 그나이우스와 그의 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의 외아들[11]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의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실제 인간성과 달리 비루한 인간의 표본으로 까인 그나이우스의 외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만하고 잔인하고 사치스러운 가문의 악명"을 죄다 뒤집어 쓴 것으로 유명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 대 안토니아와 결혼해 1남 3녀를 뒀던 네로의 조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49년생으로 기원전 16년도 집정관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제 인간성과 별개로 죽을 때까지 미움을 받았다. 네로의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상당히 이름난 전차기수였는데, 이때 그는 로마인들에게 헌신적인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이후 그는 여러 공직 생활을 거친 뒤 아우구스투스의 두 양자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와 마찬가지로 게르마니아 전쟁에 참전했는데, 자신보다 6살 어린 티베리우스 밑에서 복무하는 동안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에 부교를 놓고 도로를 건설하는 임무 등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또 그는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 외의 다른 전임자들이 시도조차 못한 성과를 내면서 게르만족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게르마니아에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제단 등도 건설했다. 즉, 그는 젊은 시절 티베리우스처럼 게르마니아 정복을 거의 눈 앞에 뒀던 장군이기도 했다.
그 결과, 네로의 조부 루키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이자 후계자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동방으로 파견될 당시, 능력과 인간됨을 인정받아 아우구스투스가 손수 고른 수석고문단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가문의 이미지 때문인지, 실제인지 몰라도 그는 원로원에게 지나친 폭력성과 비열함과 잔인함을 갖췄다고 죽을 때까지 비난받았다. 사실 네로의 조부는 젊은 시절 전차기수를 하면서 취미활동으로 무언극 연기를 했었고 연기에 몰두한 나머지 로마 기사계급의 기혼 여성을 상대역으로 삼아 연기까지 벌였다고 한다. 또 그는 가문행사를 위해 검투사 경기를 역대급 규모로 개최했는데 문제는 이때 참전한 검투사들의 경기력이 과도하게 유혈사태가 났다고 이야기가 날 정도 격렬했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이탈리아 도시 곳곳에 야수쇼를 열기도 해서 "역시 아버지처럼 오만하고 잔인하고 사치스럽네"라고 호사가들과 반대파들에게 욕먹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가 이런 전적 외의 이유로 욕먹은 근본적인 이유는 부친의 행적과 아들의 망나니 행동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네로의 조부는 아우구스투스 사망 당시에는 대 안토니아의 남편이자 옥타비아의 사위였고 집정관까지 지낸 최고위 원로원 인사였음에도, 원로원 내에서 늘 평판이 나쁜 탓에 호사가들과 반대파들에게 아우구스투스 사후 황제의 유언장을 조작했다는 소문에 시달리다가 서기 25년 병으로 사망했다.
고대부터 내려온 기록상 네로 본가 내에서 나쁜 면으로 가장 유명한 인사는 네로도 있지만, 그 이전 가장 망나니로 유명했던 사람은 바로 네로의 친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였다. 그는 아들 네로가 폭군으로 공인되어 불행하게 몰락하기 이전부터, 로마 내에서 가장 질 나쁜 사람 중 한명으로 유명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네로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대 안토니아의 아들이며 안토니우스의 외손자이기에, 대 안토니아의 누이인 소 안토니아의 아들인 게르마니쿠스(Germanicus),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이종 사촌 동생[12]이 된다. 그런데 그나이우스의 부인 소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의 조카이므로 그나이우스는 그의 부인 소 아그리피나에게 오촌 당숙(!)이 된다. 그러므로 부계 쪽으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뻘이 되지만, 모계 쪽으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손자뻘이 되는 것이다(...). 또 클라우디우스의 황후 중 한 명인 발레리아 메살리나(Valeria Messalina), 클라우디우스의 맏사위 파우스투스 술라의 어머니는 네로의 고모인 소 도미티아 레피다(Domitia Lepida the younger)이므로 네로와는 사촌 관계이다.
상술했듯 네로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자신의 조부 그나이우스, 부친 루키우스보다 평가가 더 안 좋았고, 아들 네로가 막장스러운 행동을 하기 전부터 평가가 최악이었다. 먼저 그나이우스는 죽을 때까지 가문의 권력과 황제 가문과의 가까운 혈연 관계만 믿고 막장 짓을 저질렀고, 젊은 시절부터 성격이 비열하고 더럽기로 유명했다. 따라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로마 시내의 포룸에서 놀면서 여러 사람들을 별 이유없이 괴롭혔고 일부러 시내에서 말을 몰면서 사람들을 다치게 하거나 해코지한건 기본이었다. 또 그는 병상에서 죽을 때까지 늘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신분에 상관없이 상대방에게 모욕과 폭행은 예사였으며, 다혈질과 잔인함까지 가지고 있던 막장황족이었다. 아울러 그는 귀족 자제답지 않게 거액 사기 및 국고 횡령의 명수였고, 어릴 때부터 늘 도박과 전차경주, 검투사 경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주변에는 늘 질 나쁜 부류의 인사들이 많았다. 또한 그는 여자 관계가 매우 더러웠는데, 단순히 난잡한 사생활을 벌인 것이 아니라 질이 상당히 나빴다. 특히 그의 여자 문제는 범죄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그는 자신의 누이와 근친 혐의까지 받을 정도였고, 다른 귀족들의 부인 여럿과도 비슷한 불륜 관계를 맺었다.
이 외에도 네로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황실 일원인 탓에 남들보다 일찍 공직경험의 기회를 얻었음에도 그 직위를 안 좋게 이용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특히, 그는 법무관 시절 그 직위를 이용해 거액의 사기를 주도한 뒤 여러 은행가들에게 막대한 돈을 강탈하기도 했고, 상금을 이유로 다른 이들의 돈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런 이유 탓에 네로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의 평판을 계속 깎아 먹었고, 게르마니쿠스의 딸과 결혼한 뒤 집정관까지 올랐음에도 결국 완전히 티베리우스의 눈 밖에 나고 만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평소 성격처럼 그냥 넘어가지 않았는데, 그동안 그나이우스가 한 악행을 모아서 여러 가지 죄목(반역, 간음, 사기, 횡령, 근친상간)으로 기소한 뒤 법대로 처벌했다. 따라서 그나이우스는 실제로 기소 후 유죄판결을 선고받고 티베리우스에게 손수 '''사형''' 판결까지 받은 다음 그대로 사형수 신분이 됐다.
그러나 판결을 내릴 당시 티베리우스는 고령이었고, 얼마 안 있어 티베리우스가 세상을 떠나서 사형은 미뤄졌다. 그리고 그 사이 이종사촌형 게르마니쿠스의 막내아들 칼리굴라가 황제가 됐다. 이때 갓 즉위한 황제는 민심을 잡기 위해 티베리우스 때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을 사면해줬는데, 그 역시 사형을 앞두고 있다가 바로 석방됐다. 네로는 친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석방된 지 얼마 안 있어 소 아그리피나와의 사이에서 안티움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네로의 아버지는 서기 41년 아들 네로가 2살도 채 되기도 전에 부종으로 죽었다. 그는 죽을 때 자신을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칼리굴라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재산을 아들 네로 뿐만 아니라 칼리굴라[13]에게도 일부 넘긴다고 했었고 그것을 빌미로 칼리굴라는 그의 대부분의 재산을 가져가 버렸다. 그러나 칼리굴라가 가져갔던 재산은 네로가 황제가 되면서 다시 돌아왔다.

2.2. 양자 입적과 황제 즉위


사실 네로가 황제가 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네로가 부모 양쪽을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 받았다고 해도, 네로는 어머니의 재혼 전까지 로마 사회에서 사실상 잊혀진 존재였고, 당시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에겐 전 아내인 메살리나 발레리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브리타니쿠스란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리타니쿠스의 친모 메살리나는 네로의 고모인 소 도미티아의 딸이었고, 네로에겐 고종사촌누나로 칼리굴라가 직접 결혼을 주선해 자신의 삼촌 클라우디우스와 결혼시킨 사람이었다. 따라서 황실 정통성상 정상적으로 네로는 브리타니쿠스에게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네로의 사촌누나인 황후 메살리나가 간통을 넘어서 중혼까지 저지르고 클라우디우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가 전체를 먹칠한 뒤, 황제가 처벌을 미루던 중 황제의 해방노예 출신 측근 나르키수스에게 제거된 대형 스캔들이 터지면서 네로의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가 황후가 되게 된다.
사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결혼은 아무리 근친혼이 성행하던 당시에도 무리수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피나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이었고, 게르마니쿠스가 일찍이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입적됐다고 해도,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혈통적으로 사실상 하나의 가문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카와 삼촌의 결혼식은 법적으로는 성이 다른 결혼이어도 불가능하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의견이 상당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의 뜻이 확고한데다 비텔리우스[14] 등 원로원 내 결혼 찬성파들의 지지로 통과됐다. 이렇게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가 황후가 되면서 미성년이었던 네로도 어머니를 따라 황궁에서 살게 된다.
아그리피나는 황후가 된 이후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클라우디우스에게 영향력이 큰 측근들을 포섭했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증조할머니 리비아가 과거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의 결혼[15]을 주도해 자신의 친아들 대 드루수스를 아우구스투스의 공식후계자로 만들려고 한 것처럼, 친삼촌 클라우디우스의 딸 옥타비아[16]와 네로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는 네로가 클라우디우스와 직접적으로 피가 안 섞였음에도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양자로 입적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50년 클라우디우스는 사위이자 의붓아들이며 조카의 아들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아예 양자로 들이고 이름까지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라고 지어줬다. 아울러 아그리피나의 뜻에 따라 그녀의 측근인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를 근위대장에 임명시켜주고 네로의 교육은 박식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가 담당케했다. '''클라우디우스의 외종손 양자 입적은 공식적으로 네로를 후계자로 결정지은 행동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클라우디우스는 양자로 삼은 네로를 계속 ‘아헤노바르부스’라고 불렀고,[17] 자신의 맏사위이자 인망 높은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18]를 브리타니쿠스의 제위를 잠시 맡아놓을 후계자로 점찍고 있었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는 건강한 편이었기 때문에 브리타니쿠스가 제왕 교육을 받기 시작할 10살이 될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 급사 후 공개된 유언장를 생전 작성했는데, 이때 그는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공동 후계자로 지명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했다.
네로의 양자 입적 후, 건강하던 클라우디우스가 54년 독살로 의심되는 석연찮은 죽음을 맞는다. 클라우디우스가 죽기 전, 혼란한 틈을 노린 아그리파나는 자신의 최측근이자 황제의 측근 팔라스[19]등과 함께 클라우디우스의 또 다른 측근세력인 나르키수스[20] 등에게 요양을 베푼다는 석연찮은 이유를 내세워 로마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했는데, 이런 혼란한 틈에 네로의 어머니는 세네카, 근위대장 부루스 등과 사실상 궁정 쿠데타 형식으로 17세에 불과했던 황제의 양자이자 사위 네로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이때 이들은 클라우디우스의 유언장에서 공동 후계자로 지명된 브리타니쿠스가 어리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이 유언장을 무시했으며, 자신들의 궁정쿠테타 계획을 알고 이를 기소하려던 나르키수스 등을 로마에 떨어뜨려 놓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따라서 이는 오늘날에도 클라우디우스가 독살당한 것으로 강하게 확신되는 증거로 평가받는데, 궁정쿠테타를 성공한 아그리피나 세력은 자신들이 앞세운 네로를 데리고 근위대 병영을 방문했다. 이때 아그리피나, 부루스, 세네카 등은 네로를 앞세워 각 병사들에게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를 주기로 약속해 이들의 지지를 얻어냈고, 세네카가 신중히 작성한 원로원 선언서는 원로원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2.3. 즉위 초반과 친족 살해


오현제 중 지고의 황제로 불린 트라야누스의 평가로 와전됐다고 해도, 네로의 첫 5년은 확실히 축제 분위기였고 실제로 즉위 초반은 이후 재위기간과 비교해 성공적이었다. 특히, 스승 세네카가 만들어준 첫 연설문은 세네카 특유의 문체와 젊고 잘생긴 금발머리 소년 네로의 외모와 쾌활한 성격까지 결합돼 원로원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이 연설문에서 네로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따르고, 원로원의 특권들과 권한을 존중해주겠으며 본인은 오직 군 통수권만 갖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원로원은 과거 칼리굴라의 첫 등장 때처럼 네로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하지만 네로는 본래부터 자제력이 약했고 감성적인 소년인데다, 겁도 많았다. 또 본인 스스로 원래 황제가 될 생각이 없던 사람이었음에도 어머니, 세네카, 부루스 등에게 친위쿠데타 형식으로 옹립된 탓에 환호를 받았다고 해도 실권이 많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정통성은 클라우디우스의 사위라는 타이틀과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부모 양쪽에서 이었다는 점이었는데, 문제는 정숙하지만 외모가 예쁘지 않은 옥타비아와의 결혼이 사실상 강제였기 때문에 금슬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옥타비아는 당시 기준으로도 착하고 현명한 아내감으로 명망이 높았고, 네로에게 철저히 무시당한 터라 로마 시민들의 동정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네로의 아내 무시와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은 황제 스스로 정통성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아그리피나는 그 점을 상당히 못마땅해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사춘기에 접어든 네로는 친구 오토의 아내 포파이아를 사랑하게 되어 옥타비아를 몰아내려고 했다. 친구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 황제 정통성이 되어주는 결혼을 스스로 깨려고 하는 네로의 행동에 아그리피나는 옥타비아 편을 들면서 아들과 대립했다. 이때 네로는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실권을 잡으려고 했고, 아그리피나의 지나친 정치 개입으로 인해 친 아그리피나파 득세를 걱정한 세네카, 부루스 등이 아그리피나를 견제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친 아그리피나파 황실 관료들을 하나둘 제거하기 시작하는데, 클라우디우스 시대 이후에도 소 아그리피나를 돕던 칼리스투스는 실각, 나르키수스는 즉결 처형됐다. 네로와 세네카, 부루스의 행동은 당연히 모자 관계를 나빠질 대로 나빠지게 만들었다.
세네카와 부루스는 젊은 네로에게 예술과 음악, 시, 전차 경주에 대한 취미에 몰입하게끔 권장하면서, 모든 공식행사에서 네로가 돋보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조언했다. 또한 네로의 측근들은 젊고 미숙한 황제에게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헬레니즘 군주들처럼 행동할 것을 권장했다. 아울러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에서 소 안토니아 생전부터 충성을 다하던 아그리피나의 오른팔 궁정대신 팔라스를 파면시키도록 했다. 따라서 아그리피나는 더이상 통제되지 않는 친아들 대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황제가 되어야 할 브리타니쿠스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게르마니쿠스의 유일한 혈육이라는 타이틀을 강조하면서 “신이 된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대 드루수스의 직계인 브리타니쿠스를 권좌에 앉히겠다”고 협박했고, 아들 네로에게 “배은망덕한 아들”이라고 말하며 폐위까지 거론했다.
네로는 사실 정통성에서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브리타니쿠스가 당시 13살밖에 안 된 소년이었기에 이전까지는 그 아이를 질투했어도 견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분노와 협박이 단순한 폭언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따라서 네로는 이때부터 위기감을 느꼈고, 어린 브리타니쿠스가 자신보다도 훨씬 훌륭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선황제의 친아들이기에 일반 평민들에게 호감[21]을 가지고 있다는 점까지 고려해 당장 어린 소년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네로의 측근인 세네카와 근위대장 부루스 역시 네로와 생각이 비슷했다. 친구였던 세네카와 부루스는 클라우디우스 시절부터 자신들의 세를 키워 나가면서 아그리피나의 영향력을 꾸준히 약화시켜 모자 사이를 회복불능 상태로 만든 뒤 젊은 네로를 서서히 통제하고 있었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의 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임을 내세우면서 근위대와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파를 움직일 수 있는 아그리피나의 발언과 행동에 대해 두 사람은 단순한 협박이 아님을 느꼈고, 암묵적으로 네로가 브리타니쿠스와 아그리피나를 죽이려는 네로의 계획을 반대하지 않았다.
결국 네로는 하수인을 시켜 독을 이용해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식사 자리에서 브리타니쿠스를 암살했다. 이때 네로는 독약 전문가인 로쿠스타라는 여인을 고용해 브리타니쿠스를 죽였다.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네로는 브리타니쿠스를 한 번에 죽이고 싶어 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그의 저서에서 흔히 나타나는 뜬소문성 기록이 아닌 거의 사실에 입각한 내용이기에 오늘날에도 설득력이 높다. 이에 따르면, 네로는 로쿠스타를 고용했고, 로쿠스타는 독약을 먹였다는 의심을 줄이기 위해 양을 조절했다. 그래서 브리타니쿠스가 배탈에 시달리며 설사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네로는 “너는 내가 율리우스법 따위를 두려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호통치면서 그녀를 심문하고 매질한 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독약을 제조케했다. 네로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돼지에게 독을 직접 실험케해 돼지가 즉사하자 그 약을 가지고 브리타니쿠스를 죽였다. 살인 방법은 독탄 포도주. 당시에 술을 마셔서 독을 감정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당시에 포도주를 따끈하게 데워 마셨고, 너무 따뜻하면 냉수를 조금 탔다. 네로가 독을 탄건 이 냉수였다. 포도주에는 독이 없었기에 감정사는 알아보지 못했고, 아무도 냉수를 의심하지 않았다. 브리타니쿠스는 결국 독든 냉수를 탄 포도주를 마시고 급사했다. 그리고 브리타니쿠스와는 어린 시절부터 단짝친구였던 티투스 역시 네로가 브리타니쿠스를 죽일 때 독약이 강한 탓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22].
이때 네로는 식사자리에 있던 손님들은 독살을 의심하자 능청스럽게 브리타니쿠스가 간질을 앓아서 급사한거라고 둘러댔으며, 일반 시민들까지 독살을 의심하기에 이르자 비가 억수로 쏟아붓던 날에 브리타니쿠스의 시신을 장례식도 치뤄주지 않고 서둘러 화장해 매장했다. 따라서 모든 로마인들은 네로가 브리타니쿠스를 죽였다는 것을 확신했는데, 이는 훗날 네로의 몰락 당시 그의 잔인성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게 된다. 아울러 네로는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호위하던 게르만 친위대를 경호인력에서 제외한 뒤 본국 출신 근위병들도 철수시켰다. 그리고 네로의 손에 브리타니쿠스가 독살된 지 몇 달 뒤, 자신을 언제라도 내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어머니 아그리피나마저 네로가 자객을 보내 살해됐다. 이후 그동안 사이가 나빴던 아내 옥타비아에게 간통의 혐의를 뒤집어 씌운 뒤 외딴 섬으로 유배보냈다가 처형했는데, 타키투스를 비롯한 로마인들의 일관된 기록에 따르면 네로는 어떤 로마 사람들도 하지 않은 방식으로 아내 옥타비아를 죽인 뒤 그녀의 목을 잘라 로마로 가져오도록 하고 이를 본인이 직접 확인까지 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이런 짓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네로의 치세에는 그다지 큰 영향이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당시 로마 시민들의 아그리피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고 해도, 또 이때까지는 네로가 정치적으로 뚜렷한 실책은 하지 않았다고 해도 로마인들은 신분이나 재산에 상관없이 가족에 대한 사랑과 효심을 중요시 여긴 만큼 네로의 잔인성에 혀를 내둘렀고, 이는 네로의 실책과 기행들이 벌어질 수록 그의 여론을 나쁘게 만드는 이유가 됐다.
이 외에도 네로는 자신의 손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의 직계들을 끝장내기 전부터 훗날 몰락의 시발점이 될 만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아내 옥타비아를 무시하고 처형시키기 전부터 장인이자 양부, 외종조부인 클라우디우스를 능욕하고 비꼰 행동들인데, 이는 로마인들에게 유명했다. 먼저 네로는 즉위 이후, 습관적으로 클라우디우스를 희롱하거나 비하하는 농담을 즐겼다. 따라서 그는 세네카 등과 함께 늘 클라우디우스를 비꼬면서 “(클라우디우스가) 세상에서 바보 노릇하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또 그는 남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전임자 이야기가 나오면 ‘계속 머문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 morari의 첫 음절을 일부러 길게 늘이면서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던 클라우디우스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었으며, 양부를 “늙은 바보”, “멍청하고 잔인한 노인네”라고 불렀다. 아울러 네로는 그리스 속담을 인용하면서 클라우디우스의 죽음을 가져온 버섯을 “신들의 음식”이라고 불렀다.
브리타니쿠스, 아그리피나, 옥타비아를 모조리 죽인 네로는 얼마남지 않은 아우구스투스의 후손들까지 여럿 살해했다. 그는 아그리피나 생전때 반란을 획책했다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인 아시아 속주 총독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그 일가를 숙청했고, 친고모 도미티아 레피다 역시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때 그의 이런 행동은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를 모두 경험한 로마인들에게 "그 잔인함"을 비난받았는데, 살해된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경우에는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가 "사람이 양처럼 유순하고 너무 정직하다"고 할 정도로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인 탓에 네로의 잔인함을 더 돋보이게 했다. 그리고 네로는 자신의 고모 도미티아 레피다와 먼친척인 실라누스 일가가 무고죄로 고소됨을 알고 있음에도, 어머니 아그리피나보다 더 잔혹하게 친족 살해를 묵인하고 공격했다. 그래서 그는 고모와 먼친척 실라누스 부자에게 불리한 죄목을 덮어 씌우고 조작된 증거들을 이용해 이들을 공격한 뒤 정맥을 잘라 고통스럽게 죽였다. 이후에도 네로는 친족 살해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네로가 몰락할 무렵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된다.

2.4. 그리스 순회 공연과 파르티아 정책


네로는 즉위 초 몇년을 제외하곤 어머니, 아내, 양동생이자 처남, 실라누스 부자, 친고모 등을 잔인하게 죽인 것 때문에 서서히 로마인들이 말하는 미덕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세네카와 근위대장 부루스의 보좌를 받은 네로의 초기 치세는 겉으로는 꽤나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그리피나라는 제어장치가 네로의 손에 사라지면서 네로는 조금씩 자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62년 보좌의 한 축이었던 부루스가 병에 걸려 죽자, 가족까지도 가차없이 살해해 버리는 네로의 성격에 경계심과 위협을 느낀 세네카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물러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세네카는 네로에게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한 뒤 모든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다. 이때 네로는 스승이자 조력자인 세네카에게 환대까지 하면서 그의 은퇴를 아쉬워했는데, 사실 세네카가 스스로 물러난 이유 중 하나는 부루스 후임으로 근위대장에 오른 오포니우스 티겔리누스가 네로의 지시에 따라 그를 뒷조사한 까닭이 컸다.
세네카 은퇴 이후, 네로는 아직 미숙한 상태로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네로는 자신을 '''위대한 예술가''' 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연예인 기질이 강했는데 그를 제약하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자 이러한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한다.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23]에게 신설된 "아르비테르 엘레간티아이"[24]라는 장관직을 주고 궁정에서 모든 종류의 취향에 관한 판단을 맡겼으며,[25] 부루스를 대신할 사람으로는 오포니우스 티겔리누스[26]를 선택했다.
자신은 그리스 문화와 시에 심취하여 수염을 기르고 그리스 등지에서 열리는 시 낭송 대회에 출전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으며, 그와 관련된 여러 일화와 농담들이 전해진다. 올림픽 경기에 직접 출전해 자신을 위해 창설한 음악 경쟁에서 우승하고, 7두마차[27]를 끌고 출전한 전차경기에서는 중간에 전차에서 굴러떨어졌음에도 심판진의 '''안 퍼졌으면 님이 1등''' 판정으로 우승. 그 외에 다른 종목에서도 전부 우승하였다. 네로를 이기면 '''사형 판결'''을 받기 때문에 선수들은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리스에서 열렬히 환영(?)받던 네로가 로마에서 자신의 시 낭송회를 열자, 연예인 황제에게 좌절한 시민들의 반응이 환상적이었다고 한다.[28] 그 광경은 실로 클라스가 다른 중대장 축구, 부장님 개그였을 것이다.
나름 시인이자 아티스트, 체육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어보려고 노력은 참 많이 했지만 당시 로마인들에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데, 명색이 황제란 인간이 정무는 안 돌보고 그리스에 가서 놀고 앉아있고, 전차경기장이나 음악 경연장에서 워낙 모습을 자주 드러내다보니 실력 여하를 떠나서 좋은 소리가 나올 턱이 없다.[29] 로마인들은 예술가 황제를 원한 게 아니라 나라를 잘 돌보는 황제를 원했다. 다만 네로 사후에 그야말로 나라를 말아먹는 막장군주들이 속출한 덕분에 오히려 네로 치하를 그리워했다 한다.
로마인들이 그리스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지만 결국 그리스 문화도 '외국' 문화였기 때문에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 많았다. 특히 동성애의 경우, 로마인들은 그리스 식의 소아동성애가 장차 로마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을 나약하게 만들고 여성화시킨다고 생각해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30] 일례로 대 카토는 미소년 시종논밭이나 도자기보다 더 값나간다는 사실에 로마는 망할 거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네로가 예술에 빠져 지내자 네로는 여자라고 험담을 했으며[31] 네로의 스승인 세네카도 이런 네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만 로마의 예술 발전에는 매우 큰 공헌을 했다. 네로의 예술 활동은, 동양의 경우로 따지면 정무는 안 돌보고 황궁에 틀어박혀 도적 패거리가 깽판을 치든 말든 돌 감상에 시간을 허비한 북송의 황제에 비교할 수 있겠다. 물론 통치는 그들보단 훨씬 잘했지만.
그렇게 취미활동을 즐기긴 했지만 네로가 정무에 그렇게 무신경한 것은 아니어서 네로 통치하의 로마는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었다. 특히 국방, 외교적인 면에서 네로는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서방에서는 라인 방어선을 책임진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와 브리타니아 전선의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국경지역을 보호하고 영토를 확장시켜줬다. 동방에서도 두 명의 장군들이 훌륭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바로 코르불로베스파시아누스였다. 특히 동방 정책을 담당한 두 장군 중 전임자로 파르티아 방면으로 파견한 장군 코르불로의 중재는 훌륭했다. 따라서 로마는 한동안 파르티아와의 평화를 얻어냈다.
당시 파르티아의 황제였던 볼로가세스는 원래 측실 소생이라 황제가 될 자격이 없었으나 정실 소생이었던 동생 티리다테스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고 장자상속의 원칙을 내세우며 형에게 양보한 덕분에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동생의 의리에 감복한 형은 파르티아 정실왕자에게 어울리는 번듯한 자리를 만들어 주는 걸로 보답하려 했고 국내의 반대파를 진정시키기 위한 것도 겸해서 파르티아의 최고제사장 자리와 더불어 이웃나라이자 로마가 대두되기 이전에는 속국이었던 아르메니아 왕위를 주려 하고 있었다.
이때 아르메니아의 관할 문제를 두고 파르티아와 로마가 전쟁중이었는데 네로가 개입하여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대관식을 로마에서 치르게 함으로써 로마와 파르티아 양국의 자존심을 모두 살렸다. 이때 티리다테스는 비슷한 나이대였던 덕분인지 네로와 상당히 친해졌는데, 아르메니아로 돌아간 후 수도 명칭을 네로의 도시라는 의미의 '네로폴리스'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축제를 매년 열었다. 심지어 네로가 죽은 후에도 이 축제를 계속할 수 있도록 "네로 황제가 국가반역죄다 어쩐다 한 모양인데 우리한테는 은인이니까 계속 축제 열어도 괜찮겠음?" 하고 로마에 허가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것으로 로마의 동방 국경이 안정되었다. 문제는 정작 네로 본인은 이걸로도 까였고 덕분에 한동안 내전이 벌어졌다는 것(...). 이후 파르티아와 다시 전쟁을 하는 것은 트라야누스인데 트라야누스의 출정은 파르티아가 쳐들어와서 한 게 아니라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네로의 정책을 파기하고 출정한 그냥 정복 전쟁[32]이다. 즉 협정을 깬 건 로마였다.

2.5. 계속되는 막장행보


네로는 64년 자신의 연극 데뷔라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 이후부터 부자와 상류층들에게 평가가 상당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네로는 이 무렵부터 예전과 달리 몸이 점점 비대해져 갔고, 완전히 자기절제력을 상실했다. 그 결과 그는 이때부터 자신을 내세우면서 유흥과 사치에 많은 돈을 쏟아 부었는데, 네로의 사치는 상상을 초월했고 열혈한 그리스 문화 애호가답게 그리스에서 들어온 것을 사랑했다.
이때 네로가 없어서 못 살 정도로 소비한 사치품은 여러 개가 있었는데 그중 유명한 것은 장미였다. 따라서 네로 시대동안 황궁 안에는 네로의 명에 따라 황제 개인 방에 늘 장미꽃잎을 뿌려져 있었고, 장미로 만든 향수를 뿌린 새가 방 안을 날아다녔다. 또 그는 장미향을 사랑해 향수도 남들보다 많이 썼다. 그리고 그는 아라비아나 근동에서 가져온 온갖 사치품들을 물쓰듯 소비했는데, 대부분의 사치품들은 로마나 제국 내 대도시들에서 한 해 소비하는 양과 거의 맞먹을 정도거나 다른 도시에서는 보기조차 어려운 향신료 같은 물품들이 많았다.
하지만 네로의 이런 호화로운 생활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따라서 네로는 티겔리누스가 이끄는 조직들을 이용해 로마 내 부자들과 원로원 의원들을 대상으로 날조된 죄명을 덮어 씌워 그들의 재산을 강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를 비롯한 황실 사람들이 대거 숙청된 이후, 가까스로 살아남은 방계 황족들까지 반역죄를 덮어 씌워 즉결 처형한 뒤 재산을 빼앗았다. 그 결과, 선제 클라우디우스의 사위이자 독재관 술라의 후손인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비롯해 티베리우스의 외증손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등이 네로에 의해 '인기가 많다',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등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포함돼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이때 이들의 자녀 및 손주들까지 네로의 명으로 살해당했다.
그런데 이중 평소 자기 자신을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임을 대놓고 내세운 데키무스 실라누스 내외 외는 모두 뚜렷한 죄목도 없어서, 네로의 행동은 정치적인 이유도 전혀 없는 범죄 그 자체였다. 또 네로의 이런 일련의 행동들은 과거 칼리굴라의 반대파 숙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각했고, 연좌죄 등을 대놓고 활용했다. 그래서 로마의 여러 전통들을 황제 스스로 깨버린 행동들이라고 당대사람들에게 씹힐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친족 숙청 중 58년 벌어진 파우스투스 술라 추방 및 처형 사건은 누가 보더라도 악질적이었다. 그래서 네로가 파우스투스 술라를 58년 반역죄로 기소할 당시부터 문제는 많았다.
네로가 그를 미워한 이유는 먼저 이 사람이 아우구스투스 후손이라는 점[33],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생전 브리타니쿠스의 보호자로 낙점될 뻔한 점, 마지막으로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남편인데다 인기 많고 기품 있는 황족인 이유 때문이었다. 따라서 네로는 파우스투스를 즉위 전부터 미워했는데, 그가 나이에 비해 회백색 머리인 것을 가지고 숱이 없는 대머리라고 놀렸고, 일찍부터 사람을 붙여 꼬투리를 잡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꼬투리는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네로는 포기하지 않았고, 티겔리누스에게 명을 내려 그를 제거하려고 사건을 터트렸다.
그 결과 네로는 파우스투스 술라를 갈리아로 추방하기 전, 짜인 각본에 따라 서기 55년 이전의 근위대장 부루스가 자유민 팔라스와 공모해 파우스투스 술라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했다고 조작해 재판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파우스투스는 애당초 팔라스, 죽은 부루스 같은 인사들과 거리도 멀었고, 목적 자체도 클라우디우스 시절 고위관료를 지냈고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최측근이기도 한 팔라스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이런 탓에 네로가 팔라스와 파우스투스를 엮으려고 해도 둘을 쉽게 엮이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티겔리누스를 앞세워 파우스투스를 기소할 당시, 네로의 파우스투스 제거 계획은 실패했다. 하지만 네로와 타겔리누스는 3년 뒤 다른 자유민을 반란 혐의로 기소하면서 어거지로 파우스투스 술라를 58년 재기소한 뒤 처벌했다. 그러나 이때도 바로 죽이기 못했고 59년 갈리아의 마실리아(오늘날 프랑스 마르세유)의 감옥에 보내는 것에서 끝내야 했다. 그렇지만 네로는 결국 62년 사촌형 파우스투스를 살해해 그의 머리를 로마로 가져오게 했고, 티겔리누스는 네로의 뜻을 알아챘다는 듯이 명을 받은 뒤 불과 5일 만에 갈리아의 감옥으로 가서 저녁식사 자리에 있던 파우스투스 술라를 죽였다.
그런데 파우스투스 술라 사건은 애당초 목적 자체가 매우 불순한 사건인 탓에 벌어질 피소 음모 사건처럼 그 전말이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네로는 막장군주들이나 할 만한 일을 거리낌없이 저지르는 동안 보여준 행동을 다 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재산을 강탈한데다 피소 사건 이전에 처형이기도 했던 파우스투스의 아내를 노리고 실제 근친상간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리 내 소문을 통해서만 여동생과 근친상간 소문이 돈 칼리굴라와 달리, 네로는 당대부터 이 문제를 지적받기도 했다. 이 내용은 타키투스의 기록에서 나오는데, 수에토니우스와 달리 원로원 회의록과 관보를 토대로 최대한 사실에 입각해 기록한 그의 스타일과 플라비우스 왕조와 이 왕조 이전과 가장 가까운 네로 시대에 대한 그의 정확한 기록 특성상 이는 사실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근친혼이 빈번한 로마귀족들과 원로원에서도 파우스투스 술라의 추방과 처형, 이후 벌어질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처형사건은 다소 쇼킹할 일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를 네로 한명으로 바꾼 사건이었기 때문에, 본인 입장에선 스스로의 정통성을 끌어올린 사건이기도 했지만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네로 몰락의 시발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류층이나 로마 지식인들 사이에서 해당된 일이었을 뿐이었고, 아직까지는 민중들에게 이런 막장행동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하류층들의 네로에 대한 반감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2.6. 로마 대화재


네로의 몰락은 엉뚱하게도 정무 수행에서가 아닌 다른 데서 촉발되었다. 우선 64년 로마의 대화재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 로마 시의 대화재는 지금까지의 역사에도 유래가 없을 정도의 규모로, 무려 5일에 걸쳐 불이 타올랐으며 로마의 14개 구 중 4개 구를 뺀 나머지가 탔다고 한다. 10개 구 중에서도 3개 구는 완전히 불에 타 소실되었고 나머지 7개 구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이때 로마인들 사이에서 네로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는 네로의 그리스 애호 취향을 섞어 그럴 듯하게 각색한 이야기였다. 그 당시에 그리스 문화 중 호메로스일리아스, 오디세이아가 유명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의 하이라이트인 트로이가 파괴되고 불타는 장면을 네로가 일부러 연출하기 위해 로마를 불질렀다는 이야기였다. 이 소문은 나중에 네로가 로마를 불사른 다음 궁중의 높은 누각에 올라가 리라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까지 부풀어서 전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근대에 와서는 이와는 반대되는 연구와 주장이 등장했다.[34] 반대되는 주장에 따르면 네로는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네로는 로마가 아니라 80km나 떨어진 해안 도시 안티움(오늘날의 안치오)에 있었으며 대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불타는 로마로 전차를 몰고 달려가 현장에 직접 나서 화재 진압을 진두지휘하였다고 한다. 로마 대화재 이후, 건축 자재로 가연성 재료를 쓰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든 것 역시 네로다. 또한 도시를 복구할 때도 민심을 잘 추슬렀는데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난민들을 지원한 데다 궁전을 개방하여 재산을 손실한 시민들의 피난처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 대화재를 네로가 직접 일으켰다면 네로의 정치적 생명은 그야말로 끝장나는 거다. 네로는 그런 일로 정치적 생명을 말아먹을 멍청이는 아니었다.[35]
그러나 많은 증거와 상황이, 네로가 화재와 무관함을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네로가 범인이었고 직접 불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네로의 명을 받은 노예들이 불을 질렀다는 식으로 낭설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퍼졌다. 이는 훗날까지 전해져 폴란드 작가 시엔키에비치의 소설 쿠오 바디스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적극적으로 해명하면서 이미지 쇄신에 나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네로는 폭군답게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방화사건을 날조하여 만만한 자들에게 뒤집어씌우기로 결정했는데, 그 희생양이 바로 기독교도들이었다. 마침 당시 로마에서는 국가의 행사에 "기독교도로써 이교의 신들에게 바쳐지는 축제에는 참석할 수 없다"며 불참하고 군대에도 "기독교도는 이 세상 군대의 병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군대의 병사다"라며 불참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대화재와 같은 국가적 재난 때 시민들이 신전에 가서 울부짖을 때도 기독교인들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시민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네로가 콜로세움에서 기독교도를 사자들의 밥으로 주는 등의 방식으로 처형했다는 얘기가 매우 유명한데, 사실 네로는 콜로세움에서 단 한 명의 기독교도도 죽일 수 없었다. '''왜냐면 네로 재위기간에는 콜로세움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은 네로 사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지은 건축물이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네로의 거대한 동상(콜로수스) 자리에 지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설이 있을 정도다.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씨족명) 원형 경기장이다. 아마도 이 설은 네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원망 + 쿠오 바디스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또한 '로마'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콜로세움을 떠올릴 만큼 콜로세움 자체가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콜로세움에서 기독교를 처형하는 데 썼다는 방법을 다른 원형경기장에서 네로가 썼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독교도에게 짐승의 가죽을 덮어 씌운 다음 사냥개를 풀어 물어 죽이게 했다고 하며, 십자가에 매단다던가, 화형시킨다던가 별의별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하였다. 그리고 이런 식의 처형으로 자신에게 전가되고 있는 의심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려고 했으나 오히려 시민들 사이에서는 '''황제가 찔리는게 있으니까 저렇게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게 죽이는거지'''하면서 루머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초대 받고 경기장에 구경온 시민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 이들이 더 무거운 죄를 지었다 해도, 처형 방식의 잔혹함은 그것을 보는 시민들의 가슴을 동정심으로 가득 채웠다.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기독교도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그토록 잔혹한 운명을 내린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잔인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임을 알고 있었다. -타키투스[36] 연대기-
이때 주범으로 몰려 죽은 사람 중 한 명이 그 유명한 사도 파울로스(사도 바울)이다. 그는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이렇게 처형할 수는 없었으나 결국 네로는 기어이 방화죄를 씌워 참수형을 당하게 하였다.

2.7. 화폐개혁


64년 발생한 로마 대화재 이후, 네로의 로마 재건 정책은 시민들의 혹평을 사게 되었다. 네로는 불에 타 소실된 넓은 지역에 '''네로를 위한 궁전'''[37][38]을 짓기로 하였는데 이를 로마 시민들의 거처를 빼앗는 짓이라고 생각한 원로원 의원들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그의 양부인 클라우디우스의 신전터도 궁전 건설 계획 부지에 들어갔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이런 대공사를 위한 비용은?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속주들도 털렸으며 심지어 '''신전까지 털렸다.''' 설상가상으로 네로의 사치는 여전히 심해 국고를 곧 바닥나게 만들었고, 화폐가치는 예전보다 급락했다.
따라서 네로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까지 골격을 유지한 새로운 통화 제도를 발표했다. 새로운 아우레우스(표준 금화)의 무게를 예전보다 10% 가량 줄이고, 데나리우스(표준 은화)의 은 함량 역시 비슷하게 줄여 네로의 새 통화 조치는 금화와 은화 간의 가치 차이를 안정화시켰다. 또한 이때 동화를 새롭게 도입하고 예전보다 로마와 그리스 화폐 간의 균형화를 추진시켜 제국 내 통일 화폐 기준을 새로이 만들었다. 네로시대이후 제국은 필요시에 은화 함유량을 줄였다 원상복귀 했다를 반복했지만 기본적으로 점점 은화 함유량이 줄었다.(오현제 시대에 특히 더 심해진다.)
하지만 네로의 이 조치는 당장 통화 가치 하락으로 인해 물가가 10% 가량 오르게 만들어, 네로는 로마에 거주하던 하층민들에게 제공된 곡물 구호 정책을 해외의 모든 빈민과 로마 거주 서민들에게까지 확대 제공해야만 했다.

2.8. 몰락



2.8.1. 피소 음모


대화재 이후 네로의 인기는 로마 모든 계층 사이에서 추락하기 시작했고, 이런 여론은 네로의 잇딴 실언과 로마재건사업발표와 맞물리면서 더 악화됐다. 그리고 네로가 65년 제2회 로마 올림픽을 개최하고 참가한 같은해 말, 그의 스승인 세네카까지 가담한 네로 암살 계획, 즉 ‘피소계획’이라고 불린 네로 암살미수시도가 발각된다.[39] .
이야기에 따르면 이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네로가 여러 번에 걸쳐 방계황족과 부자들에게 죄를 덮어 씌워 반역재판이라는 명목으로 유배, 사형, 자살, 사형 후 효수 등을 벌이면서 원로원, 근위대, 황궁 관료 전반에 두려움과 적개심이 번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음모를 주도한 사람은 뚜렷하게 없었고, 이 사건으로 희생된 이들은 모두 친분을 나눈 저명한 인사들이었는데 이 사건은 이들 일행 중 한명인 플라비우스 스카이비누스가 통상적으로 가족이 없는 부자들이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면서 한 일이 의심을 받으면서 커지게 됐다
피소계획을 밀고한 스카이비누스의 해방노예인 밀리쿠스 부부는 주인 스카이비누스의 재산정리 당시 옛주인의 재산 일부를 받고 많은 돈까지 하사받았다. 하지만 그는 스카이비누스가 자신에게 단검을 갈아둔 뒤 지혈대와 함께 보관하라는 말을 의심해, 또는 네로 시대 판결문처럼 네로 제전이라고 불린 5년제 기간 중 피소를 옹립하려는 계획의 실패를 생각한 스카이비아누스 집안 하인 부부가 밀고하면서 들통났다고 한다. 어쨌든 스카이비아누스의 하인 밀리쿠스는 이 집안 하녀였던 아내와 상의 후 자신의 주인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여기고 로마 교외에 머물던 네로에게 달려갔다.
태생적으로 겁이 많던 네로는 두 번째 올림픽 성과에도 맨앞에 앉아서 형식적으로 환호한 원로원과 상류층에게 불만은 있어도 모두가 자신을 과거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처럼 증오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네로는 암살음모라면서 날카로운 단검을 증거로 가지고 오자 암살음모를 확신해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냐하면 이때 그는 경호가 잘 되는 팔라티누스 황궁이 불에 탄 까닭에 교외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두명의 근위대장 중 네로에게 헌신하는 악질 중의 악질 티겔리누스에게 총수사권을 부여하면서, 증거가 명백하게 되어버린 스카이비누스를 즉시 체포해 심문케했다.
증거는 나름 명확했고 총수사는 악랄하고 유명인사와 부자들이라면 사람을 붙여 어떤 꼬투리라도 잡던 티겔리누스가 담당한 만큼, 사건은 이전 네 명의 황제 시절이나 과거 로마의 사건들보다 잔혹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스카이비누스는 고문실로 끌려온 뒤 생전 처음 보는 온갖 고문기구까지 심문에 동원되자 견디지 못하고 심문자가 원하는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티겔리누스의 의도대로 명문귀족으로 인품과 능력 모두에서 존경을 받고 있던, 중년의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네로의 스승 세네카를 비롯해 젊고 유명한 시인 루카누스, 풍자작가 페트로니우스까지 줄줄이 사탕처럼 명사들의 이름이 계속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또 첫 조사 후 가담자 중에는 이듬해 집정관에 선출된 라테라누스 등 원로원 지도급 의원들과 티겔리누스와 함께 근위대장으로 있던 루푸스까지 같이 심문하던 중 연루됐다고 이름이 나와 그 자리에서 심문받는 상황이 연출됐다. 따라서 로마에서 이름 있는 명사나 유력자들이 죄다 피소음모라는 대형 국가반역죄에 이름을 올렸다.
스카이비누스 이후, 네로와 티겔리누스가 다음 심문 대상으로 선정한 인사는 '심정적 공화주의자'로 의심받고 있던 시인 루카누스였다. 그래서 루카누스는 먼저 체포돼 고문을 받게 되었는데, 젊고 건강한 그 역시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비슷한 이름을 댔고 자신의 모친 이름까지 심문 중 불었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한 심문보고서가 나왔을 때, 증거와 증언이라는 명목 아래 벌어진 네로의 보복은 무자비했다. 다행히 네로를 죽이고 황제로 내정되었다고 의심받은 피소는 티겔리누스가 이끄는 근위대가 자신을 체포하기 전 자결해 조롱받고 비참하게 죽지 않았지만, 다른 인사들에게는 변호나 명예의 기회조차 보호받지 못했다. 그래서 라테라누스, 세네카를 비롯한 가담자들은 자택에 있던 중 느닷없이 체포돼, 변론조차 못하고 황제의 명령에 따라 정맥을 끊고 고통스럽게 자살하는 방식으로 죽었다. 하지만 이때 확실히 음모에 가담하지 않은 스토아 철학자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파이투스 트라세아 같이 억울하게 희생된 유명인사들도 있어서, 네로의 행동은 로마 귀족들의 최고 덕목인 위엄(디그니타스)와 자유(리베르타스)까지 손상시켰다고 비난받았다.

“이렇게 수많은 명사들을 참살한 뒤에, 마침내 네로는 미덕 그 자체도 근절시키려고 했다.”

'''타키투스, <연대기>'''

아울러 네로는 이 무렵, 상술한대로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의 아내였던, 클라우디우스의 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와 결혼하려고 했다가 차이게 되자, 마지막 남은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인 클라우디우스의 장녀를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다. 또 그는 피소 음모 사건을 대규모 모반사건으로 확대해 근위대 장교, 원로원 의원 등을 ‘정적제거’라는 목적으로 피소 음모 사건 이후 19명을 사형, 13명을 추방한 뒤 그들의 재산을 자신의 개인재산으로 거둬들였다.
특히 62년 갈리아에서 추방생활 중인 파우스투스 술라를 잔인하게 처형된 이후, 불과 4년 뒤 피소 음모 사건과 엮이면서 마지막 남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 직계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억울한 죽음은 네로에게 아우구스투스 일가가 완전히 멸문당한 사건이 됐다. 따라서 원로원 내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세력과 네로의 끈은 이때 끊어지게 됐다. 이에 따르면 당시 네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장녀로 엄청난 미인이었던 클라우디아 안토니아(파우스투스 술라의 아내)[40]를 자신의 아내로 만들고 싶어해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가 죽자마자, 결혼하자고 고백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는 네로보다 7살이나 많은데다 네로와는 법적으로는 남매, 혈연상으로는 5촌 이모였고 남편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터였다. 그래서 고백을 받은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희화화하고 남편과 여동생, 남동생, 심지어 사촌언니인 네로의 친모까지 잔인하게 죽인 일을 알고 있던 이유 등으로 막장같은 프로포즈를 단칼에 거절했다. 따라서 마지막 황실 직계였던 그녀는 이 일이 빌미가 되어 피소 음모 사건 직후 남편 파우스투스 술라처럼 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반란 시도 유죄 선고 후 처형당했다.
그런데 타키투스로 대표되는 이들이 말했듯이 네로의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처형 사건은 근친상간이었던 이유 외에도 황제가 피소 음모라고 불린 대형 숙청 사건에 어거지로 사적 감정까지 뒤집어 씌운 탓에 여론을 더 악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또 피소 음모 사건 이후 네로는 계속해서 음모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숙청을 정당화했다. 따라서 이전의 파우스투스 술라,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부부 처형건이나 피소 음모 사건으로 네로는 폭군 이미지를 제대로 굳히게 됐다.

2.8.2. 그리스 순회 공연과 코르불로 사건


대화재와 권좌 찬탈 음모 사건을 경험한 네로는 이런 상황에서 66년 가을 또 다시 말 많던 그리스 순회 공연을 떠났다. 네로는 첫 순회 공연 때보다 철저하게 준비한 뒤 올림피아, 코린토스, 델포이 등을 여행하며 가수이자 배우이며 전차경기 기수[41]로 활동했다. 이때 네로는 1808개의 상과 우승 트로피를 독식했으며, 그리스인들이 자신에게 보내준 환영회와 호평에 매우 흡족해 하면서 67년 그리스인들의 염원 중 하나인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으로부터의 그리스 해방 조치를 선물로 하사했다.
이런 상황에서 네로는 유대인의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유대 지방은 시리아 총독이었던 파르티아 전쟁의 영웅 코르불로의 관할하에 있었는데 네로는 이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코르불로 휘하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내리고 코르불로를 자신이 머물던 그리스에 소환한다. 영문도 모른 채 달려온 코르불로에게 '내란 주모 혐의로' 자살할 것을 명령하였고 코르불로는 죽었다. 당시 로마 병사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코르불로[42]가 황제에게 처형된 것에 경악하고 분개하는 장병이 많았다. 결국 젊은 장교들이 황제 암살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또한 근위대 일부 장교와 병사들에 의한 암살시도도 있었다.
코르불로를 의심해 자살하도록 한 네로는 그리스 바로 동쪽에 위치한 소아시아 일대를 여행하고 이집트를 유람하기로 결정내렸다. 하지만 그의 여행 계획은 즉각 취소되었다. 왜냐하면 코르불로 사후 일 년 뒤에 갈리아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사실 네로에 대한 불만은 과거 그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가 아들을 혼낼 때 항상 하던 말인 “로마인답지 않은 행동과 태도”에 대한 로마 상류층과 군인들의 불만, 그동안 전임자를 비방하고 친족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해한 부도덕함, 사치를 위해 이탈리아 내 사유지와 북아프리카 일대의 대규모 농장들을 탈취 및 몰수한 조치, 군단병들의 급여 체불, 속주세 인상 등이 복합적으로 터져서 발생한 반란이었다.

2.8.3. 고립과 최후


“우리는 황제에게 반항해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되오.네로는 로마 국을 약탈했소. 원로원의 꽃이라는 꽃은 죄다 뽑아 버렸소. 그는 방탕으로 신세를 망쳤고, 어머니를 죽인데다 군주같지도 않소! (중략) 대체 누가 이런 네로를 황제라 부르겠소?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그에게 저항하며 일어설 때요! 여러분 스스로를 구하시오! 로마인을 구하시오! 세계를 해방시키시오!”

'''타키투스, <연대기> 중 휘하에 10만 명 이상을 모은 “빈덱스의 네로 탄핵 발언” 중 일부'''

67년 말, 네로가 서둘러 로마에 돌아왔을 때, 그와 원로원의 관계는 이미 티베리우스 말년이나 칼리굴라 암살 직전 이상으로 냉랭했다. 원로원은 더 이상 네로를 지켜줄 생각이 없었고 그에 대해 확실한 명분을 내세운 빈덱스를 심정적으로 지지했다, 특히 빈덱스의 반란은 그가 강력한 군을 거느리거나 다른 군을 포섭하려고 적극 나서지 않으면서 네로 탄핵 연설로 호소했던 탓에 네로는 정치적으로 고립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네로에게 반기를 든 빈덱스는 히스파니아(오늘날 스페인) 총독 갈바와 루시타니아(오늘날 포르투갈) 총독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를 반란에 가담시켰으며 선황 클라우디우스의 오랜 친구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네로는 고지 게르마니아 사령관이었던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에게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행히 루푸스는 빈덱스와 결전을 벌여 반란군을 격파했고, 루푸스에게 패배한 빈덱스는 패전 후 자결했다. 하지만 빈덱스 자살 후에도 네로를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던 로마 군대는 더 이상 충성을 하지 않았고, 사실상 네로에게 불신임권을 행사하면서 그동안 라인 전선에서 명성을 쌓은 루푸스에게 네로를 탄핵하고 황제를 칭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루푸스는 이를 거절했다. 이렇듯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지지의 핵심세력인 서방 속주 군단병들과 루푸스의 게르마니아 전선 일대의 진압군마저 네로를 따를 마음이 없음을 보여주자 네로는 완전히 고립됐다.
이때 갈바는 마음껏 황제를 칭하면서 원로원에게 어떤 선택을 할건지 압박했다. 그리고 황제를 칭한 갈바는 자신의 대리인들을 로마 근위대 병영으로 보내 자신을 지지하면 병사 1인당 8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근위대와 군단병 모두의 마음이 이미 네로를 떠나 갈바 쪽으로 기울게 됐다. 그러자 이를 본 원로원은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해 공적으로 만든 뒤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무렵, 네로의 근위대장 중 한명인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휘하 근위대와 함께 공적이 된 네로를 버리고 갈바 쪽으로 붙었는데, 네로가 믿고 있던 티켈리누스는 네로와 휘하 근위대를 내팽겨치고 야반도주하듯 도망쳐버렸다.
이렇게 되자 네로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다음날 아침 궁정에서 일하는 관리들이 모두 도망가고 없음을 발견한 네로는 배를 타고 오스티아로 도망쳐 파르티아로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선장들의 거절로 인해 이를 실현하지 못한다. 그 뒤 네로는 직접 로마 포룸으로 나아가 로마 시민들에게 연설하여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자 하였으나, 포룸으로 가는 도중 민중에게 맞아 죽을 것을 겁내어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마침내 네로는 자신의 노예의 집으로 달아나 숨게 되는데, 이때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였음을 알게 된다. 뒤이어 '원로원이 자신을 채찍질로 처형할 것'이라는 소문을 전해 듣고 공포에 질려 있다가[43] 원로원으로부터 파견된 전령의 말발굽 소리를 듣자 칼로 자기 머리를 찌르는 방식으로 목숨을 끊는다.

Qualis Artifex Pereo(참으로 훌륭한 예술가인 내가 죽는구나)

그래도 네로가 종종 시혜자이자 즐거움을 주는 황제로 기억되었던 까닭에 그에 대한 시민들과 하층민들의 원한이 그리 깊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가 죽은 뒤 그 시체를 테베레 강으로 던져라 등의 별 험한 꼴 당하지 않고 정중히 화장되었다. 하지만 그는 화장 이후 영묘에 묻히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의 유해는 석관에 안치되어 자기 조상들의 묘역 인근에 매장되었으며, 나중에 밝혀진 네로의 무덤에서 그의 석관이 발견되었다.

3. 외모와 사생활


수에토니우스의 묘사에 따르면 네로는 중간 정도의 키에 몸에 얼룩이 있었고, 밝은 금발에 곱슬머리가 층을 이뤘다고 한다. 그리고 몸에는 고약한 냄새가 났고, 온갖 방탕과 향략에 빠졌음에도 재위 14년간 세 번밖에 아프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체질이었다. 또 그에 따르면 네로의 목소리는 약하면서도 허스키했다고 하는데,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네로의 목소리는 작고 불분명해 확실히 매력은 떨어졌다고 한다.
네로는 수염을 즉위 초부터 구레나룻부터 턱수염까지 길게 길렀는데 본가 분파성씨처럼 금빛수염이었다고 한다. 또 그는 그리스 문화 애호가답게 머리 스타일 역시 그리스나 헬레니즘 군주들처럼 곱슬머리를 층을 이뤄 정돈한 스타일부터 다양한 머리스타일을 유지해 로마인들의 전통적 머리스타일과 많이 달랐다. 따라서 네로의 초상화들은 오늘날에도 초기 원수정 황제나 황족들의 초상화와 확연히 구분할 수 있다고 평가받는다.
사생활적으로 살펴보면 여성편력이 상당히 심했고, 그리스문화가 로마인들에게 경멸받은 가장 큰 이유인 미소년에 대한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네로는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결혼한 상태에서도 오토의 아내였던 포파이아 사비나와 잠자리를 거리낌없이 가졌다고 하며, 유부녀와 여성황족들에게 희롱조 농담을 하거나 음탕한 행동을 했다. 아울러 미소년 피타고라스, 스포루스를 동성애인으로 뒀는데, 스포루스의 경우에는 본인이 황제임에도 국법을 어기고 아예 거세시켰다. 또 네로는 거세된 그를 남편 역으로 하고 피타고라스를 아내 역으로 한 뒤 ‘결혼’시켰으며 본인 역시 동성애인들과 ‘성적 방종’을 했다. 특히 그는 거세된 스포루스와 관계를 주로 맺었는데, 그가 이 미소년을 사랑한 이유는 아내였던 포파이아 사비나와 무척 닮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네로는 전문적으로 자신의 취향을 관리하고 사치품을 조달하는 관직을 만들어 운영했고, 사치 역시 심했다. 또 리라를 비롯해 각종 악기 연주를 위한 스승을 둔 뒤 예술활동을 장려하고 기량 발전에 노력했고 공연때마다 지나치게 비싼 의상을 입고 근위대가 밤낮으로 자신의 컨디션과 리라 상태를 관리케했다. 따라서 이는 황제와 왕실의 기반인 전통귀족들이 그를 경멸하고 안 좋게 인식한 가장 큰 이유가 됐다.

4. 평가


“(콤모두스는)도미티아누스보다 더 야만적이고, '''네로보다 더 악랄했다.'''”

'''원로원,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 당한 소식을 들은 뒤 기록말살형 통과 전 네로를 언급하며...'''

“사실 네로가 남은 시간 동안 얼마나 추악하게 살았는지, 그가 제국의 지배자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러한 부류의 존재를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역겹고 수치스럽다.”

'''섹스투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한마디로 정리하면 콤모두스와 동급으로 평가되는 폭군이자, 자신의 취미[44]에 국고를 탕진한 암군이었다. 그나마 굳이 차이를 두자면 초기에는 선정을 했고 외교적인 성과가 있었다는 점이지만 콤모두스도 국가경제를 거의 파탄지경으로 몰아넣던 전쟁을 아무 생각없이 끝내긴 했어도 일단 끝낸 공이 있다는 점에서 크게 낫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래도 굳이 인간적인 면모를 논하면 콤모두스사이코패스에 가까운 반면 네로는 보통사람이 타락한 쪽에 가깝고 그래서 그나마 통치 중간중간 황제로써 책임감을 가지려고 노력하기도 했다는 차이는 있다. 오래 가지 못해서 문제였지만.
네로는 모든 인간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지 말아야 할 악행(존속살해, 근친상간, 무분별한 사치, 폭력, 폭언, 살인교사 등)을 실제로 벌인 사람이었고, 로마인들에게도 금기시된 행동을 한 사람이었다. 이는 이전 로마사에 등장한 최고지도자 중 소문이 아닌 진짜 행동으로 모든 악행을 저지른 경우였고, 당대 로마에서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할 프린켑스(제1 시민)가 직접 행한 범죄행위였다. 그래서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등 오늘날 남아있는 모든 로마사 기록에서 드러나듯 네로는 당대, 후대 로마인들에게 한결같이 추악함, 악랄함, 잔인함, 패륜 등 온갖 말의 대명사격으로 평가받았다. 이는 그토록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좋아하지 않은 타키투스 같은 인사들이 아니더라도 로마인들에게 “이전에 문제 많다고 한 사람들보다 더 악랄하다”고 욕먹은 이유였다.
또 타키투스가 말했듯이 네로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 당시 “군중들이 미워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 기독교도들에게 지극히 의도적이고 비열한 술책으로 죄를 덮어 씌운 일을 벌인 탓에 더 큰 비난을 받았다. 이것은 애초에 자기 잘못에 대한 책임만 지는 게 당연한 로마법을 대놓고 황제가 무시한 행태로써, 그리고 이런 그의 행동은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가 된 이후 더 부각되면서, 자신이 하지 않은 일도 하게 된 일이 되는 일을 겪어야 했고 결과는 로마 역사상 가장 추악한 폭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게 됐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네로는 동서양 역사상 희대의 폭군으로 까이고 있으며, 폭군 대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실제로 네로는 폭군이자 암군이었기에 이런 평가는 틀리지 않다. 하지만 '''후대에 등장하는 콤모두스, 포카스와 같은 폭군과 동급으로 묶일 황제는 아니다고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네로는 성격 자체도 변덕이 심하고 즉흥적인 성격이었고, 제대로 된 제왕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였으며 지나치게 사치스러웠다. 또한 주변에서 그를 제대로 통제해줄 측근들도 부족한데다, 그나마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인사들도 세네카처럼 아전인수로 사리사욕을 챙기면서 네로의 행동을 방조한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수도 로마의 관리에도 재능이 없었기에 '''제국의 통치자로서는 분명 부적격한 사람'''이었다는 주장이다. 오히려 그는 노래 부르며 사람들에게 환호받는 음유시인의 인생을 걷는 것, 오늘날로 치면 정치인이나 기업 경영인보다는 연예인이나 아이돌에 더 어울리는 남자였는데, 본인 스스로도 황제 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심정을 털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동급으로 취급받는 콤모두스와 달리 재미있는 이벤트를 자주 만들어냈고 황제로서 선정을 펼치려고 노력했으며, 개인으로서는 호감가는 젊은이였기 때문에 생각 이상으로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좋았다. 또 비참하게 몰락했어도, 상류층 중 극히 일부 인사도 간혹 “저 나쁜 놈”이라고 까기 보다는 비텔리우스처럼 대놓고 “쾌활하고 마음씨 좋은 분이다. 난 그를 존경한다”라고 말한 다음, 대대적으로 네로의 옛 치적을 복구해주는 경우도 있었다[45][46]. 따라서 네로는 최후가 매우 비참했던 데다 네로 사후 내전기를 거치며 자격 미달인 후대 황제들. 특히 비텔리우스의 행태에 질린 근위대와 시민들이 네로 탄핵을 '''후회'''했다고 한다. 덕분에 네로의 무덤에는 꽃이 끊이질 않았다고. 대부분은 네로의 유모 아크테가 바친 것이지만, 의외로 일반 시민들이 바친 것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어머니 아그리피나, 처남 브리타니쿠스를 살해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47]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설령 정치적 이유였다고 해도 근본적인 이유는 왕권강화 같은 이유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개인의 충동적 성향에서 나온 탓에 옹호 측에서도 완벽하게 네로를 감싸진 않는다. 또 그는 포파이아와 혼인하기 위해 원래 부인이었던 옥타비아마저 간통죄로 몰아서 추방시킨 뒤 살해한 부분과 포파이아와 혼인하여 슬하에 딸 하나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포파이아를 '''발로 차서 죽여버리는''' 등 이후에도 이해하지 못할 근친살해 행각을 이어나갔고, 외삼촌 칼리굴라와 달리 진짜 근친상간을 시도했다가 보복차원에서 이모이자 누나인 처형을 반역혐의로 처형시키는 등의 악행을 이어나가 이 부분에서 정치적 이유라는 측면의 옹호여론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당시 얼마 남지 않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가까운 친인척들과 코르불로에게 억울하게 유죄를 뒤집어 씌운 뒤 그 일가를 살해한 부분도 마찬가지인데, 네로는 그때마다 로마법상의 절차를 온전히 지키기 보다는 연좌제 도입 , 의도적인 미행 등 잔혹하고 비열한 방법을 사용해 로마인들에게 미덕 그 자체까지 없앤 사람의 대명사가 되게 됐다.
하지만 '''네로가 일부러 로마에 불을 질러 대화재를 초래하고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면서 리라를 켜고 시를 읊었다는 소문은 말 그대로 루머일 뿐이고 네로 본인은 화재를 진압하고 인명을 구하기 위해서 눈물나게 노력했던 것도 사실'''이기에 본인 입장에서는 이런 측면의 비난은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소문이 도는 와중에 그는 화재 직후 황금저택을 지으려고 하는 등 자기 취향을 위해 국고를 탕진하는 것만큼은 자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화재로 집을 잃은 사람들의 피난처로 자신 소유의 정원을 개방해 캠프를 짓게 하고 모든 속주에 명령해 구호 물자를 로마로 보내게 하고, 가연성 소재로 집을 짓지 못하도록 법령까지 짓은 것은 좋았다고 해도, 하필 화재로 소실된 자리에 황금 저택을 짓겠다고 했으니 가뜩이나 민감해져 있는 감정에 "저 자식 일부러 불 지른 거 아냐?"라는 가짜 뉴스가 나돌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로마가 아름답지 못하다"며 다 때려부수고 새로 건축해야겠다고 떠들고 다녔던 이전의 온갖 헛소리까지 들춰지면서 로마 대화재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크게 이미지를 깎아먹었다. 물론 이 점은 억울하다고 하겠으나, 여기에 더해 후대의 간토 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처럼 애꿎은 크리스천들에게 무고한 누명을 씌워서 학살한 행동은 이 당시 기독교를 안 좋게 보던 로마인들에게도 “저 사람들이 이상하긴 했어도 그걸 뒤집어 씌우네”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로마인들의 생각은 전 유럽이 기독교화되고 난 뒤에는 ‘최초로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라는 타이틀과 당대부터 안 좋았던 공인된 폭군이라는 평가와 결합되면서 4세기 이후에는 아예 죽일 놈으로 평판이 더욱 나빠진다. 오늘날까지도 유럽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로마 역사상 크리스트교를 크게 박해한 황제'로서 완전히 인식이 박혀 있다.
굳이 크리스트교 때문이 아니더라도 수에토니우스[48]디오 카시우스[49] 등의 역사가들에게도 많이 까였다. 먼저 그는 여러모로 ‘당대 로마인’답지 않았다. 네로는 공화정, 원수정 초기 로마인 중 누구보다 열렬히 그리스 문화를 사랑했고, 그 성향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일부 헬레니즘 군주들의 퇴폐적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더해 행실 역시 상당히 문제가 많아서 즉위 초부터 로마인들에게 욕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밤마다 길거리를 배회하면서 친구들과 술집을 찾았고, 퇴폐적 군주들처럼 다른 귀족이나 황족 여성들, 자유민 미소년들을 상대로 농담조로 희롱하는 것을 거리낌없이 해댔다. 여기에 더해 네로는 성년식 이후에도 여러모로 로마인들과 달랐는데, 제국의 황제임에도 수염을 깎지 않은 채[50] 구레나룻부터 턱수염을 길게 길렀다. 이는 같은 황실 내 남성황족 중 몇 명[51]이 비슷하게 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개인성향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 문화 애호가였던 네로의 평소 성향, 행동은 다른 황족들과 달리 지극히 그리스 애호가적이고 개성도 강해 세간의 평가가 안 좋을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그는 이전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처럼 ‘소문’이 실제한 악행으로 왜곡되어 비난받는 게 아니라 실제 행동이 문제였다. 바로 당대 로마에서 나쁘게 평가하던[52] 동성애적인 행사를 공개적으로 하는 등 "문란"했고, 사치 역시 심각할 정도로 심했기 때문인데 이는 순전히 개인의 쾌락을 위한 무분별한 사치인데다 그 때문에 재정이 진짜로 파탄나서[53] 빵과 서커스라는 쉴드조차 로마인들에게 받지 못했다. 또 그는 정치를 완전히 손 떼지 않았음에도 노래나 시, 연극 등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고, 지나치게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아울러 본인 스스로의 행실이나 언사도 지극히 즉흥적이고 감성적이었고, 여성편력 역시 문란해 이 부분에서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정치 스타일도 점차 변했는데, 처음에는 나름 신중했던 성격은 가면 갈수록 광포해졌으며 5년간의 선정 이후에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무절제한 사치 행각이 날로 극심해졌다. 이러한 자신의 사치를 감당하기 위해서 네로는 로마의 다른 속주를 세금으로 쥐어짰다. 네로의 선물비용은 20억 세스테르티우스로 로마의 연간 군사비의 몇 배에 해당하는 액수였다고. 당시 로마에는 소득세가 없어[54] 고스란히 속주세로 메워야 했고 그만큼 속주는 막대한 세금을 내야 했으며, 심지어 부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재산을 갈취하거나 속주의 유력자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일도 발생하여 속주와 원로원, 상류층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60년의 속주 브리타니아에서의 켈트부디카 여왕의 거병이나 66~70년에 속주 유다이아에서 대대적인 민란이 일어난 원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네로 사후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무질서를 잉태하여 로마 제국을 한동안 내전에 시달리도록 하였다.
네로가 탄압하고 숙청한 것은 주로 귀족과 상류층 그리고 (당시 로마에서는 별로 인식이 좋지 않던)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에[55] 의외로 그의 수탈 범위 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던 로마 민중들의 네로에 대한 악감정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게다가 네로는 노예가 법정에서 주인에게 항의할 수 있게 해주는 법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잘 이용했다면 속주와 원로원의 반역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는 기회도 있었겠지만, 네로는 이를 살릴만한 정치적 역량은 없었다. 애당초 그에게 그만한 정치적인 감각이 있었다면 그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리도 만무했겠지만. 후대에는 네로에 대한 평가가 더욱 나빠졌는데, 예컨데 콜로세움[56] 터에 있던 네로 황제의 청동상과 인공호수를 로마인들이 없애버린 것이 그 예이다. 굳이 지반이 불안정한 호수를 메꿔가면서까지 네로 황제의 흔적을 없애려고 한 것을 보면 굉장한 집념이 느껴질 정도.
내치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외치적으로는 괜찮은 평가를 받는다. 부티카의 반란은 주둔한 로마군이 부티카의 딸들을 강간하는 등 네로가 통제 불가능한 사태로 인해 촉발된 점이 참착되어야 하며[57] 유대의 반란은 헤롯 왕조의 몰락으로 인해 촉발된 사태이다. 유대 자체도 훗날 현제 하드리아누스마저도 골치 아프게 할 정도로 반 로마적인 분위기가 팽배했으며 이 두 반란 진압에도 유능한 사령관[58]을 투입시키는 등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여 피해를 최소화했다. 네로의 최대 업적인 파르티아 사태 역시 코르불로를 배치하고 흔쾌히 아르메니아 왕에 티리다테스를 앉히는 등 외교적으로 뛰어난 감각을 보였다.

5. 기타


  •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한 전설에 따르면 네로가 어린시절 암살 시도가 있었는데 이때 암살자들이 뱀 허물을 보고 뱀으로 착각해서 목숨을 건졌고[59]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이 뱀 허물을 황금 팔찌로 만들어 네로가 착용하고 다니도록 시켰는데 훗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팔찌를 버렸으며 얼마 뒤에 그가 몰락했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한다(출처:수에토니우스, 12명의 카이사르, 네로 편 6장).
  • 예술에 탐닉했지만 정작 그의 능력은 함량미달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자기는 노래를 잘 불렀다 생각했지만 심각한 음치였다. 그래서 네로는 노래를 어떻게든 잘 부르기 위해 목에 안 좋다는 음식도 가려먹고[60] 복근도 단련하는 등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결과가 영 시원찮자 박수부대를 조직해 거금을 쥐어주며 공연마다 따라다니며 억지호응을 유도해 바람을 잡았고, 공연장 문을 잠가 청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노래를 듣게 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한편 베스파시아누스는 젊었을 적 네로의 시를 듣다가 조는 바람에(!) 네로의 노여움을 산 적이 있다. 다행히 그 자리에 있던 네로의 총신 페트로니우스의 비호로 유배되는 선에서 끝났다.
  • 네로의 아내인 포파이아 사비나는 목욕을 위해 당나귀를 500마리나 길렀으며 본인의 피부 관리를 위해서 아침과 저녁에 당나귀 젖으로 목욕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 500명의 노예를 두었고 여행을 떠날 때도 이들을 데리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다.
  • 향수, 향신료, 장미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리스 문화 애호가였던 네로는 유명한 향수 매니아였고, 그리스에서 로마로 넘어와 인기를 끌던 장미 역시 광적으로 좋아했다. 그래서 장미로 만든 향수로 분수를 만들어 배치했으며, 향수 바른 새를 집안에 날아다니게 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개최한 연회에서도 사람이 장미에 깔려 질식사할 정도로 장미와 향수를 사랑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와 함께 사용하는 방에 장미 꽃잎을 가득 채워 지냈고, 늘 장미 꽃잎을 채운 욕조에서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아울러 네로는 값비싸기로 유명한 향수와 향신료들을 거침없이 소비했다고 하는데, 아라비아에서 생산되는 향수 10년치를 아내 포파이아의 장례식에서 한 번에 사용했고 시나몬을 한 도시에서 1년 소비할 양만큼 하루에 태웠다.
  • 네로는 암살당하지 않기 위해 살아있는 동안 계속 독약을 마시며 내성을 길렀다고 한다. 네로는 채찍형으로 죽을 거라는 말을 들은 이후,[61] 덜 고통스러운 죽음을 위해 자살을 시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택한 방법이 독물 자살(...). 허나 독내성 때문에 죽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여러 번의 시도후 원하던 대로의 죽음을 맞게된다.
  • 공교롭게도 칼리굴라와 같은 안티움 (이탈리아어로 안치오) 태생이다. 안치오는 폭군들만 나온 땅이라 네로 사후엔 잊혀졌다가 1944년에 와서야 안치오 상륙 작전으로 다시 역사에 나타나는데, 이 때도 결과는 좋지 않았다.
  • 네로(Nero)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 기능은 CD롬이나 DVD롬을 굽는 것. 영어로 롬을 굽는 것을 “burning ROM”(롬을 태운다)이라 하기 때문에, 로마(영어로는 Rome, 롬)에 불을 질렀다는 네로의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이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이는 누명이다...

6. 대중매체


  • 셴키에비치가 쓴 소설 쿠오 바디스를 원작으로 한 1955년 영화에서는 명배우 피터 유스티노프가 네로를 연기했다. 자신의 눈물을 호리병에 모으고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불러제끼는 등 네로의 똘기를 신기에 가깝게 묘사한게 일품. 이에 질려버린 네로의 측근 페트로니우스는 자살하기 전에 편지에다 대고 네로에게 "차라리 사람을 죽일지언정 네놈의 시를 듣는 고통을 안기지는 마라"고 디스할 정도(...). 페트로니우스의 편지를 본 네로는 거품 물고 기독교인 학살에 나선다. 이후 폐위당하고 갈바가 황제에 즉위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동일하다.
  • 게임 Ryse: Son of Rome에서는 네로가 죽지 않고 늙고 연로할 때까지 통치하고 있었다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게임상 설정으로는 네로가 두 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그들의 이름이 '콤모두스'와 '바실리우스'다(...). 콤모두스는 네로처럼 로마사에서 못난 황제로 악평이 높다. 네로는 파르티아와의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한편 대화재 진압과 전후 복구사업을 몸소 지휘하는 등 그나마 실드를 쳐줄 수 있는 구석이 군데군데 있지만 이쪽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바실리우스[62]는 원래 왕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를 부르는 칭호가 되었다.

  • 유희왕검투수 몬스터인 검투수 네로키우스의 이름의 모티브가 되었다.
  • 1980년대 말 인기를 끌었던 코미디 프로그램인 '쇼 비디오 쟈키'의 코너 중 '네로 25시'라는 코너가 있었다. 최양락이 네로 역을 맡았다.

[1] 이탈리아 안티움.[2]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네로 탄핵 당시 원로원과 군대에서 일관되게 정의한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직계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 대 드루수스, 게르마나쿠스와 클라우디우스, 브라타니쿠스’였다. 이때 가이우스 카이사르,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소 드루수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등 아우구스투스 집안 남성들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4대 황재 클라우디우스의 가계를 기준으로 언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3] 세네카가 유능한 사람인건 사실이지만 네로를 통제할 수 없는 군주로 만드는데 책임이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네로의 스승인 세네카는 소 아그리피나파와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10대 사춘기였던 네로에게 프린켑스로서 네로가 돋보여야 된다고 조언하는 과정에서 취미활동인 전차 경기 몰두와 음악 활동을 장려하고 헬레니즘 군주와 같은 행동도 하도록 조언해 결과적으로 네로를 통제하기 힘든 황제로 만들고 말았다.[4] 네로와 달리 이전 황제들인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는 세네카를 신뢰할 수 없는 자로 여겨 그를 견제했고, 죽이거나 완전히 추방시킬 생각도 했다. 실제로 세네카는 로마로 복귀한 이후, 신임 근위대장이 된 브루스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친구가 되었고, 서서히 힘을 키워나가면서 어린 네로의 스승이 되기에 이르렀다.[5] 어디까지나 '기질'이 강했을 뿐, '재능'은 별로 없었다.[6] 로마사에서도 출신 가문 남성들의 독특한 이름 대물림으로도 유명한 집안이었다. 공화정 초기에는 루키우스만 연이어 대물림해 사용하다 이후에는 루키우스, 그나이우스를 무한반복으로 번갈아 사용했기 때문이다.[7] 네로와 동명이인이다. 서양에서는 꽤나 흔한 일.[8] 로마의 유명한 학자 대 카토(Cato the elder)의 증손녀이자 소 카토(Cato the younger)의 누이이다.[9] 해군 제독이었으며, 악티움 해전 당시 안토니우스의 진영에 서서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했는데, 연이은 패전과 전쟁은 뒷전이고 클레오파트라에 빠진 안토니우스의 행실에 불만을 품고 그를 배신하여 진영을 이탈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로 향했으나 곧 열병에 걸려 죽음을 맞는다.[10]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이다. 본래는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 출신인데 유아기때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 그는 동맹시 전쟁때 이탈리아 자유민들에게 로마시민권 부여를 입안했다가 암살당한 양부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달리 양할아버지, 본가 남성들처럼 상당히 완고한 원로원파 의원으로도 유명했다.[11] 가계를 보면 할머니는 소 카토의 누나 포르키아, 외가쪽 친척은 삼두파 중 한명인 레피두스이다.[12] 게르마니쿠스는 기원전 15년생, 클라우디우스는 기원전 10년생, 그나이우스는 기원전 2년생(또는 기원전 17년생이라는 말도 있다)이다.[13] 사실 안토니우스의 두 딸을 통해서 네로와 칼리굴라는 6촌 형제가 된다. 왜냐하면 칼리굴라의 할머니가 소 안토니아이고, 네로의 할머니는 대 안토니아이기 때문.[14] 네로 사후 갈바, 오토,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제위를 놓고 다툰 비텔리우스의 아버지이다.[15]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는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 형제를 낳았고, 소 아그리피나는 이들 부부의 장남 게르마니쿠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대 아그리피나와 결혼해 낳은 3남 3녀 중 넷째이자 장녀이다.[16] 브리타니쿠스의 동복 누이로 엄밀히 말하면 친어머니를 기준으로 네로와는 5촌 사이이다.[17] 네로는 이에 불만을 품고 클라우디우스 면전에서 “브리타니쿠스는 뒤바뀐 아들이잖아요”라고 대꾸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18] 독재관 술라의 후손으로 어머니(네로의 작은고모)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아우구스투스의 외증손이자 브리타니쿠스의 외삼촌이었다.[19] 그리스 출신 해방노예로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부부 생전부터 이들 부부의 가족, 특히 게르마니쿠스의 자녀들과 클라우디우스에게 헌신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이 사람은 칼리굴라가 세야누스에게 제거대상이 될 당시 소 안토니아의 자필편지를 품고 카프레아이 별궁까지 가서 티베리우스에게 안토니아의 간곡한 뜻을 전해 해방노예 신분을 얻게 된 것으로 유명하다. 또 소 아그리피나가 잊혀진 존재였던 시절에도 그녀를 지지했다고 하며, 클라우디우스와 소 아그리피나의 결혼을 추천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 당시 아그리피나의 복심으로 활약한 대표적인 최측근이기도 했다.[20] 그리스 출신 해방노예로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부부 생전부터 이 가문에 헌신했던 클라우디우스의 해방노예 3인방 중 한명이다. 이 사람은 팔라스와 라이벌 관계였고, 클라우디우스 생전부터 브리타니쿠스 지지세력이자 브리타니쿠스를 보호하려고 한 황실 관료이기도 했다.[21] 의외일지 몰라도 클라우디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종손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이라는 타이틀, 온화한 인품으로 이탈리아 내 평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더해서 즉위 후 본인이 직접 주재하는 재판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억울한 판결들을 여러 번 검토 후 되돌려주는 경우도 많아서 원로원보다 평민들에게 그의 인기는 훨씬 높았다.[22] 이런 까닭에 티투스는 훗날 네로에게 살해당한 친구를 위해 브리타니쿠스 동상을 금으로 만들어 세우고 그를 기렸다.[23] 소설 쿠오바디스에서 주인공 중 하나인 비니키우스의 외삼촌으로 나온다. 서양사에서는 페트로니우스 아르비테르로 알려져 있으며, 소설 판본에 따라서는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간단하게 페트로니우스라고 잘 알려져 있다.[24] 우아함을 관장하는 장관 혹은 우아함의 심판자라는 뜻을 가진다.[25] 즉 취향과 관련된 문제가 생겼을 때, 페트로니우스의 결정이 바로 법적 효력을 지닌다는 의미다.[26] 생선 도매상과 말 사육사로 일했던 사람으로 부루스 생전부터 네로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부루스 사후 근위대장, 소방대장, 경찰대장에 임명돼 네로 재위 후반기 동안 밀고, 고발과 무고, 납치와 고문 등을 통해 세야누스 못지 않은 공포정치 시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티겔리누스는 세야누스와 달리 제위를 노리지 않고, 말 그대로 네로의 통제 속에서 권력 찬탈 음모를 발본색원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사람이었다.[27] 10두라는 이야기도 있다. 원래는 4두마차로 하여간 반칙.[28] 시민들은 매우 끔찍한 시를 들으면서 강제로 환호와 박수를 보내야 하는데 싫은 티라도 냈다간 목숨이 위험했다고 한다. 다만 어느 재치 있는 시민 3명은 훌륭하게 시 낭송회에서 빠져 나갈 수 있었다. 한 명이 갑작스레 쓰러진 척을 하자 다른 두 명은 쓰러진 사람의 머리와 다리를 잡고 들어올려 시 낭송회를 빠져 나갔다.[29] 콤모두스의 경우 네로와 달리 진짜 검투사로서 실력이 매우 출중한 인물이었는데 뛰어난 쇼를 많이 보여줬는데도 놀고만 있다고 욕을 먹었다(물론 콤모두스는 네로보다 더한 막장 군주다). 애초에 이들은 검투사나 예술가가 아닌 '''황제'''다. 아무리 예술이니 스포츠니 신경 써도 정치를 못하면 군주로서 실격이다.[30] 5현제라고 칭해지고 동시대의 사람들도 황금시대 라고 말하던 트라야누스도 미소년 동성애에 대한 스캔들 논란이 있다. 물론 이건 거의 무시되는 수준이다. 다만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대놓고 안티노우스를 사랑하기도 했다.[31]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로마 남자들에게 가장 큰 불명예는 남자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32] 이 사람은 네로의 정책뿐 아니라 도미티아누스의 협정도 깨버리고 다키아 전쟁을 일으켰던 사람이다.[33] 네로의 고모가 낳은 아들이므로 네로와는 혈연적으로 사촌 형이기도 했다.[34] 네로 황제 연구, 안희돈, 다락방. 2004.[35] 이때의 화재진압과 시민들을 위한 여러 대처는 네로에 대해 혹평을 했던 동시대의 최고의 역사가조차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36] 참고로 타키투스 본인도 기독교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본인의 저서인 연대기에서 "그 이름은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본티오 빌라도 총독이 처형한 그리스도한테서 비롯되었다. 당시에 처벌되었던 그 사악한 미신은 유대만 아니라 로마(제국)에서까지 다시 파고 들어와 더럽고 사악한 것을 퍼트리며 자발적인 동료들을 얻어냈다."라고 하고 있을 정도.[37]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 황금저택(黃金邸宅)으로 번역되기도 한다.[38] 실제로는 이름만 이렇고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될 수 있는 공원과 같은 구조로 지으려 했다는 가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도 대체 왜 '''도무스''' 라는 이름을 썼냐는 비난을 한다. '''도무스'''가 사저를 뜻하는 단어였다고 한다.[39] 다만 세네카가 정말로 네로 암살 시도 계획에 관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40] 네로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는 법적으로 남매 사이였고, 혈연상으로는 고모뻘이 됐다.[41] 검투사 못지 않게 고대 로마 시대에 전차 기수의 인기는 상당히 높았고, 네로의 할아버지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처럼 명문귀족임에도 유명 전차기수로 활약했던 상류층들도 꽤 있었다. 학자들에 따르면 검투사들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권투선수, 격투기선수나 보디빌더 이미지에 가까운 운동선수였다면, 전차기수는 오늘날 축구선수나 야구선수같은 인기 스포츠 선수와 이미지가 더 비슷했고 이들처럼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고 한다.[42] 그의 인기는 사후에도 식을 줄 몰라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코르불로의 딸을 아내로 삼을 정도였다.[43] 당시 로마에서 쓰던 형벌용 채찍은 보통 39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당 채찍을 휘두르는 병사기분에 따라 훨씬 가닥 수가 많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 채찍은 땋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그 속에는 '''쇠 구슬, 날카로운 뼛조각, 쇳조각, 가시''' 등의 치명적인 흉기 등이 박혀 있었으며, 거기다가 이 가죽을 하룻동안 물에 담가 불려놓아 무게를 무겁게 만든다. 이를 맞게 된다면 이 드는 것은 기본이고 상처난 곳이 벌어지고, 살이 찢겨져 나갔다. 이런 채찍질은 단순히 몇대 맞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죽음의 문턱에 도달할 정도로 혹독하게, 어깨에서 시작하여 등, 팔, 가슴, 복부,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정강이까지 전신을 무자비하게 구타한다. 이렇게 얻어 맞으면 사형수는 피부 밑의 골격 근육까지 찢어져서, 살은 리본처럼 덜렁덜렁 매달려 있게 된다. 3세기의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을 인용하면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뼈, 그리고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고 한다.[44] 네로는 각종 자기 취향의 건축, 콤모두스는 검투사질[45] 문제는 이렇게 말한 대표적인 상류층이 하필 로마 원수정 사상 최악의 무존재 황제라고 까인 비텔리우스였다는 것이다. 네로의 옛 친구 오토는 갈바가 행정공백 등도 무시하고 네로 지우기를 나선 탓에, 이를 막고자 네로의 옛 관료들을 복귀시킨 다음 일처리를 하게 했지만 비텔리우스는 아예 선을 넘어버린 셈. 따라서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 등 동시대 그를 체험한 사람들이 대놓고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인간”, “비슷한 부류라서 생각하는 것도 우리와 다르구만” 등으로 비텔리우스를 씹어댄 것이 아니다.[46] 대부분의 로마황제들은 원수정 시대 당시 보통 즉위 후, 원로원에서 교과서라고 칭송해준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트라야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존경한다, 배우겠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이들 황제 외에도 행정성과 같은 부분은 티베리우스나 하드리아누스의 치적을 많이 참조하는 모습도 보였다고 한다.[47] 후대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역시 자신의 아내 파우스타와 장남 크리스푸스를 살해한 혐의가 있다.[48] 다만 이 사람은 원래 네로뿐 아니라 다른 황제에 대해서도 평가가 박하고 티베리우스의 경우처럼 어떤 때는 아예 있지도 않은 루머까지 사실인 것처럼 자신의 저서에 수록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49] 이 사람은 네로가 죽고 백 년쯤 뒤에 태어났다.[50] 로마 황제들이 본격적으로 수염을 풍성하게 기른 것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후부터였다. 하드리아누스도 굉장한 헬레니즘 문화 옹호가였지만 적어도 공무를 방기하지는 않았다.[51] 가이우스 카이사르, 네로 카이사르[52] 그나마 남자 역할을 맡으면 평판 하락이 덜하긴 했다지만, 그래도 대놓고 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동성애 성향이 의심되는 황제나 고위공직자들조차 공식석상에서는 전혀 티를 내지 않다가 죽고 나서 여기저기서 증언 나온 걸로 유추하고 있을 정도다.[53] 칼리굴라와 이 점에서 전혀 다르다. 칼리굴라가 대중에게 닥치고 볼거리를 제공했다고 욕을 먹지만 그는 최소한 할아버지 티베리우스가 남겨놓은 흑자 내에서만 돈을 썼으며, 또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54]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고 소득세 개념의 세금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리 큰 액수도 아니었고(세율 1%) 군 장병들의 급여용으로 책정된 목적세였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게다가 이걸로도 모자라서 속주세 등 기타 직접세조차도 군인들 봉급에 들어갈 지경이었다.[55] 이전 문단에는 상류층이 믿는다라고 적혀있는데, 수많은 논문과 미디어에 나오는 내용들, 그리고 각종 증거들을 보면 네로 시기뿐만이 아니라 5현제 시대까지도 하층민들이 주로 믿었다라고 기록된 것이 많다. 만일 이 시기부터 상류층이 기독교를 믿었다면,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이전부터 이미 주류가 되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공인할 때도 기독교는 완전 비주류였음을 감안하면 더더욱 신빙성 없는 이야기.[56]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으로도 불리며 황제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그곳에서 약탈해온 보물들로 지었다고 한다.[57] 더군다나 이때는 아직 네로가 세네카의 그늘에 있던 시기였다.[58] 이 사람은 예전에 네로가 시를 읽는데 졸았다는 이유로 공직에서 쫓겨나서 그리스에서 벌을 치고 있었다.[59] 로마시대부터 이탈리아인들은 뱀을 흉조라 생각해 전쟁 전날 뱀을 보면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2002년 월드컵 이태리전 전날에도 하필 이탈리아 선수단 숙소에 뱀이 나타나 다음날 경기장에 임할 때 반쯤 멘탈이 나간 상태로 임했다고.[60]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부추와 올리브 오일을 먹거나 공연 날짜가 잡히면 빵같이 목에 안좋다고 여기는 음식은 아예 먹지 않고 부추만 입에 달고 사는 등으로. 당시엔 부추가 목에 좋다고 여겨졌다.[61] 이때 쓰는 채찍이 날카로운 납 조각들이 주렁주렁 달린 것으로 살점을 거의 파내다시피 뜯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무기다.[62] 라틴어식 발음으로, 그리스어식으로는 '바실레이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