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병섭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여병섭은 1890년 8월 21일 경상남도 고성군 철성면 성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신학교에 재학중이던 1917년 평양에서 조직된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에 참가하여 경상도 구역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 초 조선국민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피체되어 1918년 3월 1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기독교 계통학교의 교사로 근무한 그는 1919년 10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주 광림학교(光林學校) 교사 홍수원·강우석 등과 함께 비밀결사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여 회원 모집과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또다시 발각되면서 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옥 후, 여병섭은 장로회 장로로 활동하는 한편 동아일보 통영분국장·마산지국장 등을 지내면서 사회운동을 폭넓게 전개하였다. 그는 강연활동을 통하여 경남 일대의 청년회나 노동야학회의 설립과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20년 4월 거제군 기성청년회(岐城靑年會) 주최 강연회에서 <아반도(我半島) 청년의 사명(使命)>이란 주제로 강연을 행하였고, 동년 4월 고성청년회 주최의 강연회에서는 <현대와 노력>이란 제목의 연설을 수행하는 등 주로 청년의 의식 계몽에 역점을 두고 강연활동을 벌여 나갔다. 그는 1920년 12월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의 창립총회가 서울 중앙 기독교청년회에서 열릴 때 마산청년회의 대표로 참석하여 창립총회의 의사(議事)에 선출되었고, 1922년 4월 3일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25년 4월, 여병섭은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될 때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노농운동에도 깊게 관여했다. 조선노농총동맹의 성립은 3·1운동 이후 질적 성장을 거듭한 농민운동의 결정체로써, 창립 당시 182개의 농민단체가 참여한 전국 규모의 농민운동단체였다. 또한 그는 1925년 4월 신문기자대회에서는 서기(書記)에 선출되었으며, 신간회 창립 후 마산에서 지부 설치를 주도해 1927년 3월 마산지부가 설치되는 데 기여했다. 이후 1929년 신간회 복대표대회(復代表大會)가 열릴 때 마산구 대표로 선출되었으며, 1930년 3월 21일 신간회 마산지회의 서기장 겸 서무부장의 일을 맡아 신간회 마산지회의 실질적 책임자로 활약했다. 그 후 1934년 7월 27일 고성군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여병섭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3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