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역왕

 


'''{{{#ece5b6 연나라 37대 국군
초대 왕
역왕
易王}}}'''
''''''
(姬)
''''''
퇴(脮)
'''아버지'''
연후문공(燕後文公)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321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21년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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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燕)나라의 제37대 군주이자, 초대 . 연후문공의 아들이자, 연왕 쾌의 아버지이다. 이때부터 연나라도 왕을 칭하였다. 시호는 역왕(易王).[1]

2. 생애


역왕 원년(기원전 332년), 제(齊)나라제선왕(齊宣王)이 연문후의 국상 중 연나라 영토를 쳐서 10개 성을 빼앗자, 연 역왕은 소진(蘇秦)을 불러 문책했다.[2] 그러자 소진은 역왕에게 제나라에 유세할 것을 진언했고, 소진은 제 선왕을 찾아가 유세하니 결국 제 선왕은 빼앗은 성을 다시 연나라에 돌려주었다.[3]
이후 소진은 제나라 신하들의 참소를 받아 서둘러 연나라로 돌아왔고,[4] 이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중용될 것임을 기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왕 역시 신하들의 말을 듣고 소진을 복직시키지 않았다. 당시 소진은 6국의 재상을 역임하며 합종책을 유지시키기 위해 여기저기 이해관계에 따라 물타기도 하고 속이는 짓도 하다보니 6국 신하중에 비판하는 자도 많았다.
이에 소진은 자신은 벼슬을 거부하고 산으로 들어간 백이, 숙제처럼 개인의 충심만이 아닌 나라를 위해 진취한 활동을 했다고 여러 고사를 들어 항변했고, 역왕을 설득해 연나라의 상국으로 복직하는 데 성공했다.
역왕 9년(기원전 324년), 소진은 역왕의 모친과 사통한 사실을 들킬까 두려워[5] 제나라를 약화시킨다는 이유로 제나라로 가겠다고 자청하니 역왕이 허락했다. 그리하여 제 선왕은 소진을 객경으로 임명했다.
역왕 10년(기원전 323년), 역왕은 왕을 칭했다. 이것을 전해 들은 고조선조선의 후(侯)도 대외적으로 왕을 칭했다.
역왕 12년(기원전 321년), 역왕이 죽었다. 그 아들인 희쾌(姬噲)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연왕 쾌(燕王噲)이다.

[1] 개혁의 의미를 지닌 한자이기에 易은 '쉬울 이'가 아닌 '바꿀 역'으로 읽는다.[2] 합종책을 제시하고서 제나라가 동맹을 깨는 짓을 했으니 역왕이 화낼 수밖에 없다. 동맹이 확실하다고 해놓고서는 그것을 깬 셈이니...[3] 사실 진(秦)나라와 함께 연나라를 칠 것을 들먹였는데, 역왕이 진나라 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 말에 넘어갈 수 없었다.[4] 여기저기 박대당하던 소진이 처음 등용된 곳이 연 문후가 다스리던 연나라였다.[5] 열국지에서는 소진의 공로 때문에 눈을 감았다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