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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하나라 초대 국왕 '''문명(文命)'''
로마 왕국 초대 국왕 '''로물루스'''
고구려 초대 국왕 '''추모(鄒牟)'''

군왕은 백성이 함께하면 편안하고 백성이 도와주면 강성하며, 백성이 반대하면 위태로워지고 백성이 등을 돌리면 멸망한다.

(百姓與之卽安 輔之則强 非之則危 背之則亡)

-

전한 한영(韓嬰)의 <한시외전>(韓詩外傳)

1. 개요
2. 호칭
3. 왕국의 국가원수인 국왕
4. 나라의 군주가 작위로서 주는 제후왕
4.1. 동아시아
4.1.1. 중국 왕조
4.1.1.1. 설명
4.1.1.2. 왕작 목록
4.1.2. 한국 왕조
4.1.2.1. 고조선
4.1.2.2. 고구려
4.1.2.3. 백제
4.1.2.4. 신라
4.1.2.5. 발해
4.1.2.6. 고려
4.1.2.7. 조선 ~ 대한제국
4.1.3. 일본 왕조
4.2. 중국왕조에서 바라보는 고려/조선 국왕
4.3. 유럽에서의 왕작
5. 곤충에서의 왕
6. 창작물에서 왕인 캐릭터
7. 같이보기


1. 개요


''''''
고대부터 현재까지 한 나라의 군주. 임금을 뜻하는 한자다. 갑골문에선 王은 아래 변이 넓고 위는 도끼 모양을 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선 도끼는 권력을 상징했기 때문에[1] 도끼를 권력자의 상징으로 썼다. 이외에도 갑골문의 모양 해석에는 몇몇 이설이 있는데[2], 대표적으로 중국 한나라시대의 학자인 허신(許愼)은 갑골문을 보지 못했기에 전서(篆書) 등 이미 원형에서 많이 변형된 후세의 자체만 보고 하늘과 사람 사이(二)의 중간에 위치하여(一) 하늘과 백성을 연결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서 하늘의 명으로 만민을 통치하는 존재라고 풀이했다. 갑골문을 찾기 전까지는 이 허신의 해석이 널리 쓰였으나 갑골문이 나와 그 진짜 의미가 드러났다. 즉 "권력을 가진 높은 분"이라는 뜻.
추가로 원래 한자 문화권의 전통에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 등 다신교 세계관에서의 "~~의 신"이란 개념은 '신'이 아니라 '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 듯하다. 우라노스의 이름을 딴 행성을 천'''왕'''성으로(해왕성, 명왕성 등도 같다.) 번역했다.
원래 한자 신(神)은 영어의 God보다는 Ghost에 가까운 개념이다. 명나라 때 중국에 입국한 가톨릭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교의 절대자를 신으로 번역하지 않고, 천주로 번역한 것도 이러한 이유다. 물론 신(神)이라는 글자에 God의 의미도 없지는 않았지만, 유일신 종교의 절대자 뉘앙스는 절대로 아니었고 애니미즘적인 정령, 산신 등에 쓰는 말이었다. 당장 민간에서 제사를 지낼 적에도 조상의 자리를 '''신'''위라고 부른다. 한자에서 절대자의 뉘앙스를 가지는 말은 천(天)이나 제(帝)이지 신(神)은 아니다.

2. 호칭


한국의 역사에선 왕을 뜻하는 고유의 일반명사들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국가
호칭
고조선
단군
고구려
개차(皆次)
백제
건길지, 어라하
신라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매금(寐錦)[3]
가야
한기(旱岐)[4]
발해
가독부(可毒夫)
이런 칭호들은 중국식 표현인 왕(王)이라는 칭호가 일반화 되면서[5] 신라 중대(통일신라), 고려 시대부터는 왕 칭호만 쓰게 되었다.
해외에서의 왕을 뜻하는 일반명사는 다음과 같다.
국가
호칭
영미권

프랑스
후아
독일
쾨니히
네덜란드
코닝
이탈리아

스페인
레이
포르투갈
헤이
러시아, 불가리아
차르
페르시아

이집트
파라오
에티오피아
느구스
오스만 제국
술탄
현대 터키
크랄
일본
[6]
그리스
바실레우스
인도
라자
조지아
메페
부탄
드루크걀포
몽골

아랍
말리크
필리핀
다투
스와질랜드
응웬야마
자세한 내용은 군주의 칭호 문서 참고.

3. 왕국의 국가원수인 국왕


일반적인 정의는 왕국의 군주.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이다.
보통 목차보면 알 수 있듯이 '국왕'이라고 칭한다. 훌륭한 업적을 세우면 대왕이라고 부른다. 유럽 역사에서 "대왕"은 위대한 왕을 부를 때 쓰는 단어일 뿐이었지만, 한국사에선 위대한 왕을 부를 때뿐만 아니라 실제로 군주의 칭호가 "대왕"인 경우가 많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고려, 조선 왕조가 "대왕"을 자국 군주의 정식 칭호로 사용했고, 신라와 백제 역시 자국의 임금의 정식 칭호를 "대왕"이라고 했다.
황제의 개념이 여러 왕국들이 부대껴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면서 일종의 대빵을 만든 것처럼, 왕의 개념 역시 일반적으로 여러 부족들이 통합해 여러 부족장들의 수장을 정하게 되면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실제 역사에서 왕의 권력은 초창기에는 그리 강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왕이 여타 부족장이나 귀족들과 대립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면서 차츰 권위 또한 강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아직도 지구상에는 왕국이 여럿 남았으며, 대표적인 예로 영국, 스페인, 벨기에, 덴마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등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국가이다. 심지어 현대에도 전제군주제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왕도 일부 있다. 브루나이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가 그 대표적인 예. 반대로 부탄같이 '''왕이 직접 국가체제를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전환한''' 사례도 있다. 국민들은 오히려 전제군주제를 원했는데 '국왕이 명하시니까' 여기에 따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히려 '''의회가 결사반대'''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왕이 사라지더라도 체스판의 왕과 트럼프의 왕 4명, 그리고 영국왕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나세르가 이끄는 장교단의 쿠데타로 쫓겨난 이집트 국왕 파루크가 "20세기에는 각국의 왕실이 사라질 것이나 5명의 왕만은 건재할 것이니 트럼프의 왕 넷과 영국의 왕이다"라고 했다.
자세한 것은 군주 문서를, 정복군주는 정복 문서를 참조.

4. 나라의 군주가 작위로서 주는 제후왕


'''王爵(Prince/King)'''
왕국의 통치자인 국왕은 King으로 번역하지만 작위로서의 왕작은 주로 Prince로 번역한다. 대표적으로 팔왕의 난의 팔왕을 영어로는 보통 Eight Princes라고 번역한다.
황제의 아래이면서 대공의 위.[8]
동양에선 명목상으로라도 "천자의 땅을 대여했기에 그에게 충성해야만하는 제후"의 자리이며 서양에선 봉건제도의 영토 위주 국가 시스템에서 계약직의 최고봉이라 할만 한 자리다.

4.1. 동아시아



4.1.1. 중국 왕조



4.1.1.1. 설명

한나라 이래로 황제가 가장 높은 지배자의 명칭으로 굳어진 한자문화권에서 왕은 작위의 일종으로도 활용되었으며 이를 "왕작(王爵)"이라 한다.
유명한 공후백자남오등작도 춘추전국시대의 난리판을 거치며 유사한 과정을 통해 왕의 아랫칸에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찌어찌 한 시스템에서 위아래로 배치된 계급 비슷하게 되었지만, 이 명칭들은 본래 서로 다른 집단에서 각자들 칭해 쓰던 군주의 다른 말이었다. 고조선만 해도 연나라의 칭왕에 맞서기 전까지는 대외적인 군주의 명칭이 "후(侯)"였다.[9]
그 이전까지는 왕 아래 제후(公)가 있는 봉건제 국가가 중원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칭왕하는 것은 중원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과 같았다. 즉 이 시기의 왕은 진 이후의 황제와 같은 위치였다. 이후 황제가 등장하기까지 대왕, 태왕, 패왕 등 왕과 차별화하기 위한 명칭들도 나타났었다.
왕을 대신해 황제가 등장한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대공 작위를 거의 준 적이 없으므로 작위로서의 왕은 유럽에서 말하는 대공을 대신해서, 위계상 황제공작의 사이에 위치했다. 보통 황제의 가까운 황족에게 "친왕(親王)" 왕작을 줬다. 황제와 혈통상으로는 다소 멀더라도 공적이 높거나 세력이 강성할 경우 경우 군왕(郡王)에 봉했다. 단 청나라 시절 친왕과 군왕은 황제의 친자라도 공이 없으면 할 수 없었다. 방계라도 공을 세우면 가능했다.[10]
물론 한나라 이후 통일왕조의 봉건제도는 유교 윤리상 주나라 제도를 흉내낸 것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 나라를 움직인 것은 진나라법가였기 때문에 중앙집권제를 시행해 분봉받은 왕이 직접 통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절대왕정 시대 유럽의 공작이나 백작들처럼 작위명에 불과했다.
다만 왕이 완전히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다른 작위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왕작은 일단 명목상 제나라, 위나라, 연나라, 순나라, 초나라, 오나라, 촉나라, 진나라 등등 중국의 지역을 구별하는 봉국들의 왕으로서 자체적으로 그 제후국의 조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중앙 권력이 강하다면 그냥 지방정부 취급이고 세금 받아먹어서 자기 살림에 보태는 수준에 그치겠지만[11] 중앙 권력이 취약한 상태라면 어쨌든 명목상 신하국이긴 해도 나라의 왕이니 군대도 기르고, 어느정도 중앙과 따로 놀 수 있다는 말이니 상당한 실력을 기를 수 있었다. 유방은 왕에 봉한 공신들 중 같은 유씨가 아닌 자들은 끊임없이 찍어내려 노력했고,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이 된다면 천하가 그 자를 공격할 것이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리고 이 말은 이후 현실이 되는데 한나라의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져 난세가 펼쳐지자 헌제를 협박하여 위왕 작위를 받아낸 조조가 수도를 업으로 옮긴 뒤, 명목상의 한 조정에서 분리된 자체적인 조정을 세우고 찬탈/선양 준비를 하면서 사실상 껍데기만 남은 한나라 조정을 쥐고 흔들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한나라를 찬탈한 위나라도 똑같은 방법으로 사마씨 서진에 찬탈당한다. 물론 상술했듯이 자체적인 지방군을 조직할 권한을 얻은 대신 자기 봉국의 방어를 맡을 의무도 있으므로, 방어를 소홀히 해서 외적의 침략을 막는 데에 실패하면 책임을 물어 폐번당하기도 했다. 노관의 경우가 그 사례.
일반적으로 한족 왕조의 경우 황태자를 제외한 황제의 아들들, 즉 후계에서 제외된 친자들은 장성하기 전에 각 지역으로 분봉했다. 예외적으로 만력제의 아들 복왕 주상순은 일찍 낙양으로 분봉 받았으나 거의 예외적으로 장성해서도 임지로 보내지 않고 북경에서 끼고 살았다. 만력제가 태창제를 제끼고 황태자로 삼고 싶어한 데서 비롯한다. 이런 예외 이외에는 황자를 분봉했는데 황태자의 저위(儲位)를 방해하지 않고 중앙정계에서 후계다툼을 미리 방지하려고 한것이다. 다만 위처럼 왕작을 받고 딴마음을 품은 사례처럼 영락제가 연나라의 왕으로 세력을 키우다가 황제 자리를 찬탈한 경우도 있으니 왕이라는 작위는 그야말로 허울뿐이 아님을 일 수 있다.[12]
반면 이민족 왕조인 청나라 시기에는 모든 황족은 북경성 안에서 살아야 했다.[13] 한편 한자문화권의 제국에서는 프린스의 의미와 어느 정도 일치하므로 보통 작위로서의 왕은 영어로 king 대신 prince로 번역한다.
작위인 경우의 '왕'에 경우 일단 다른 모든 신하들보다 작위는 높지만 예우상은 아니다. 분봉받은 왕의 경우 천자의 조정에서의 신하들과 직접적인 군신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쉽게, 사단 산하의 차상급 지휘관인 연대장과, 사단 사령부의 사단장 직속 부하들(참모장, 비서실장 등)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봉건시대 예법의 기준인 주나라 예법은 경대부(천자-제후-대부-사 중에서 천자를 모시는 대부) 중에 삼공의 지위는 가장 높은 작위인 공작과 동급 대우[14] 였고 이하의 벼슬도 직위에 따라 제후들과 매치 되었기 때문에 이후 왕조에서 황제가 분봉할 때 작위가 공작 등에서 왕으로 격상되었어도 이같은 예법은 그대로 이어진다.
황제의 친자식이면 신하들보다 끗발이 세겠지만 촌수가 먼 종친이나 변방의 왕이라면 별 듣보잡한테도 개무시 당할 수 있다. 또한 중앙 관제에 속한다고 지방직은 경대부는 아니고 당나라때 절도사나 명청 시대 순무총독들은 제후 취급을 받기도 했다. 순무는 1개 성(省)의 행정관이고 총독은 1~2개 성의 지방행정과 군권까지 주어진다.

4.1.1.2. 왕작 목록

  • 친왕(親王): 황제와 비교적 가까운 친족, 예를 들면 황자나 황제의 아우들에게 내렸다. 절대적이진 않지만 친왕은 보통 수식어가 한 글자로 정해졌으며 따라서 일자왕(一字王)이라고도 불렸다. 청대 이전에는 춘추전국시대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에서 따와 번국호+왕으로 불렸으나[15] 청대에는 화석친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화석친왕에 봉해진 자들은 추상적인 글자 한 자+친왕으로 불리게 되었다.[16]
  • 군왕(郡王): 군왕은 비교적 먼 황족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다. 지방의 고장 이름에서 따온다. 이자왕(二字王)이라고도 불렸으며 청대 이전에는 대개 군이나 현의 명칭에서 따왔다.[17] 청대에는 다라군왕이라 불렸으며 역시 추상적인 글자 2자+군왕으로 불렸다.
    • 심양왕(瀋陽王): 원나라 때 존재했던 작위. 처음에는 이자왕이었으나 후에 심왕(瀋王)으로 승격.
  • 평왕(平王): 기원은 당(통일왕조) 시대다. 이전부터 북평, 남평, 동평, 서평의 4왕의 칭호가 있었지만, 당나라의 권위가 저하되자 사방을 지키는 유력한 절도사에게 북평왕, 남평왕, 동평왕, 서평왕 등의 왕작을 내리기 시작했다. 오대십국시대에는 평왕 직위의 절도사들은 왕위를 세습하게 되어, 중앙에 반항하여 국가를 건설하는 등 반독립국으로 바뀌게 된다. 북송 시대에 절도사의 왕작은 폐지되었지만, 서평왕은 서하의 군주에게 남평왕은 베트남리 왕조에게 주었다. 하지만 원나라 이후에는 단순히 황족에게 주는 칭호로 바뀌게 되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평왕의 의전서열은 일자왕과 이자왕 사이에 놓인다.
왕작의 종류는 시대별로 다르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4.1.2. 한국 왕조


한국사 왕조들은 연호 사용이나 짐(朕) 등의 제국격 용어 사용, 소극적인 칭제, 혹은 황제에 버금가는 고유의 군주 칭호을 사용하기도 했지만[18] 대부분 "국왕(대왕)"으로 통용되는 칭호를 사용했다. 작위로서 왕을 봉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봉왕 사례가 각 왕조마다 가끔씩은 있었다.(신라의 갈문왕이라던지) 사실 제후왕도 호칭이 왕이고 그를 봉하는 천자격도 호칭이 왕이라는, 척 봐도 그렇고 실제로도 애매하다. 이게 다 외왕내제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인데 외왕내제라는 개념 자체가 앞뒤가 다른 모호함을 기본적으로 깔고 가는 것이다보니..
제후왕 봉작, 타국왕 봉작, 타국왕을 자국 제후왕 취급, 친왕 봉작 네가지 사례가 있다. 그중 제도적인 면모로 백제의 봉왕 사례가 문헌에 가장 많이 남아있다.

4.1.2.1. 고조선

고조선에선 비왕이라는 왕작이 있었다고 중국 사서엔 기록하고 있다. 이는 흉노의 비소왕 작위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4.1.2.2. 고구려

고구려의 경우 주몽이 병합한 비류국송양다물국왕으로 책봉하고 또, 부여 임금 대소왕의 동생에게 왕작 제수를 한 기록이 있다. 또한 신라, 백제의 임금들을 매금, 잔주[19]라 부르면서 그들에게 의복을 주고 예우를 받으며 제후왕 취급을 하는 등 병합한 국가의 지배자에게 왕작을 책봉하는 사례가 확인되었다. 또한 고구려에 투항한 북연 황제 풍홍을 고구려 장수왕이 ‘용성왕’이라 부르며 제후왕 취급을 한 일도 있다.
이외에도 덕흥리 고분이나 고구려 유민들의 묘지명 등을 통해 제후왕을 작위로 내리는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신찬성씨록과 같은 기록에서는 일부나마 그 책봉된 명칭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는 군주가 군림하는 아래에 후왕, 왕, 국주, 매금 등이 존재하는 위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견해에 따라서는 북연의 천왕 역시 대종(태왕)과 소종(천왕)으로서 이 위계에 들어간다고 간주하기도 한다.

4.1.2.3. 백제

백제에선 여러 신하에게 매라왕, 벽중왕, 아착왕, 면중왕 등 왕작을 하사한 것이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있다. 칠지도의 명문에는 일본국왕을 "후왕"이라고 칭하여 일본국왕을 제후왕 취급했음을 알 수 있다.

4.1.2.4. 신라

신라에선 신라에 귀부한 고구려 왕족에게 '고려국왕' 내지는 '보덕국왕'' 작위를 내렸다. 또한 진골 김주원에게 "명주군국 군왕" 작위를 주었고 국왕의 아버지에게는 "갈문왕" 작위를 주었다. 제주도의 탐라국이나 울릉도의 우산국도 독자적 왕이 존재하는 왕국이었지만 통일신라의 속국 지위에 있었고, 형식상이었지만 나중에 후삼국 시대의 고려, 후백제도 물리적 권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던 신라의 제후왕임을 자처하기도 했음을 보면, 당시의 신라는 쇠약해지긴 했어도 삼한일통의 계승자라는 짬(?)이 어디 안 갔는지 어떤 상징적인 우위를 인정받고 있었던 듯하다.

4.1.2.5. 발해

발해에서는 오등작의 사용 흔적이 나타나며 또한 왕부를 따로이 설치한 것이 유물로써 확인되기 때문에 왕작을 수여하는 것이 예외적인 사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조영의 재위 기간 중 태자인 대무예계루군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이 역시 발해에서 왕의 칭호를 가진 이들이 둘 이상 존재했음을 방증한다.

4.1.2.6. 고려


고려는 오등작을 시행하긴 했지만 초창기 신라가 투항할 때 경순왕낙랑왕에 봉한 사례를 제외하면 생전에 왕작을 내린 예는 찾기 힘들다. 또한 죽은 왕자에게 "문원대왕", "필영대왕", "정간왕", "조선국 양헌왕"의 작위는 내린 적이 있다.

4.1.2.7. 조선 ~ 대한제국

조선은 조선국 시기에는 사례가 없고 이후 황제국을 선포한 대한제국에 들어서 친왕 봉작을 했는데 흥선헌의대원왕, 영친왕, 의친왕, 완친왕[20] 등이 있다.

4.1.3. 일본 왕조


일본에서는 천황의 3세손(증손자)(1947년 이전에는 5세손) 이하의 남자 자손은 왕(王), 여자 자손은 여왕(女王)이라 하며, 중국의 군왕(郡王)과 비슷한 지위라고 볼 수 있다. 다만 1947년 신헌법 시행 이후로는 "왕"은 한 명도 태어나지 않고 있다.

4.2. 중국왕조에서 바라보는 고려/조선 국왕


이 문단은 우리 왕조 내부가 아닌 외부 즉, 중국 왕조의 시각에서 고려/조선을 어떤 위치로 바라보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고려시대 때 상당한 예우가 있었다. 고려 정종 5년(1039년) 기묘년 기록을 보면
옛 현도(玄菟: 고려국)의 땅을 그대에게 모두 주나니 영광은 옛날 일자왕(一字王)보다 높고, 조칙에 의해 부여받은 높은 직위는 삼공(三公)을 겸했다.
이 외에도 고려국 사신을 국신사라 하여 서하보다 위에 두고 사실상 요나라에 준하여 취급한 것을 보면 송나라에서도 예우받았다고 볼 수 있다.원나라 시기 고려 국왕은 고려 국왕이라는 작제적 지위를 받았다. 원나라 당시에는 친왕, 번왕 이런 식으로 안 나누고 모두 왕으로 통일했다. 왕급 직위 중에서는 최고 직위이며, 관료적 지위로는 정동행성 승상과 겸하여 신하 중에서는 최상위 지위였다. 그만큼 고려를 제1번국으로서 우대했다는 것.
조선 국왕은 관료제적으로는 2품, 작제적 질서와 종법적 질서에서는 친왕급이었다. 조선 국왕은 중국의 군왕급이었다는 잘못된 지식이 있는데 예법상 이등체강(二等遞降) 원칙에 따라황제에서 이등(이품)급을 낮추면 황태자- 친왕 순이다. 이는 명나라가 조선의 관료의 위치를 일일이 정해주기보다는 조선 국왕의 위치를 정해 관료들의 위치를 간접적으로 정해주는 방식을 펴서였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에는 친왕 대우였다. 이는 조선 국왕 뿐만 아니라 조선의 벼슬아치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의정부대신(삼정승)이나 좌우찬성은 조선에서 1품이지만 명나라 의전예우로는 3품 대우이다. 양녕대군이 조선의 세자로 명나라에 입조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영락제는 양녕대군을 정강왕(광서성 일대를 다스렸다고 한다.)의 예에 따라 대했다고 한다. 다만 초대 정강왕은 왕작을 군왕에서 시작해 친왕으로 올라갔다고 적었다.
또한 실록을 찾아보면 태종 2년 2월 기사에 명 건문제가 태종에게 면복을 주며 칙서에 이리 말한다.
조선왕은 군왕의 벼슬이니 오장(五章)이나 칠장복(七章服)을 주어야 마땅하지만 이제 특명으로 친왕(親王)의 구장복(九章服)을 내려 주며...
또한 태종 9년 4월 기사에 말하기를
사신을 중국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영락(永樂) 원년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조(詔)와 인(印)을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國王)으로 봉(封)하고, 이어서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와서 전하에게 곤면 구장(袞冕九章)을 하사하였으니, 품계(品階)가 친왕(親王)과 동일하였다.
그러므로 대우가 친왕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조선이 멀쩡할 때에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꽤 크게 여겼다. 현대 팍스 아메리카나 체계로 보면 캐나다, 영국, 호주 등 미국의 최중요 동맹국과 비슷한 위치. 지금도 대체로 인구 분포가 그렇지만 한반도나 베트남 같은 경우 땅이 제법 크고 인구도 많은 편이라 만주, 몽골, 티베트 등지의 여러 칸들보다는 직위는 왕이라도 실질적인 격은 위라 볼 수 있었다.[21] 더불어 수왕조를 쳐바르고 당나라를 고전시킨 고구려, 그 후신이자 요나라를 귀주에서 발라버린 고려, 다시 그 후신이자 요동을 이래저래 엿본 초기 조선 등 한반도 역대 왕조들은 중국 통일 왕조 입장에서도 가볍게만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조선은 스스로 사대를 천명하고 알아서 숙였으니 중국 측에서도 어느 정도 꽤 대접은 해주었다 볼 수 있다.
때문에 명나라 시대에는 천자의 대리인으로 온 사신들도 조선 국왕을 만나면 칙서를 반포하기 전에는 공손하게 읍하며 예우를 했고 초기 환관을 보내던 데서 후기로 올수록 사신 지위도 높아졌다. 황제의 스승이자 공부상서를 지낸 사람이 올 정도였다. 이 사람은 정2품으로 조선 관직상 판서에 해당한다. 명나라는 재상을 없애고 1품 직위는 대학사, 즉 황제의 자문에 불과했기 때문에 관직상 오를 수 있는 최고직이다.
청나라의 홍타이지도 삼전도의 굴욕을 시전할 때 항복 절차가 끝나고 나서 "조선왕은 일국의 국왕이니 짐의 아우(친왕급)들 사이에 앉혀라" 했고, 조공국들 중에 조선이 그나마 나라꼴을 갖춰서 주요국으로 대우했기 때문에 사신으로는 만주인 고관을 보냈다. 그쪽에서 봐도 비교적 큰 나라인 조선 국왕에게 수천~수만에 불과한 몽고 추장 7~80명과 같은 왕작위를 줬어도 대우는 현격히 달랐다.
반면 국세가 기울어 임진왜란시기 선조 시절에 나라가 털리고 나선 경략(해당 지역 책임자)으로 온 명나라 병부우시랑 송응창은 정 3품 조선 관직으론 병조참판 해당한다. 명나라 시절 남경 정부에 시랑하나 북경엔 좌우 시랑 청나라 시기엔 만한상서 2인 밑에 만인시랑 2명, 한인시랑 2명 등 총 4명이다. 또 듣보잡 연대장급 지휘관한테도 맞절하고 일국의 왕세자인 광해군은 아버지의 친구를 맞는 예로 인사할 지경이 되었다. 조선 막장테크인 고종 때는 청의 황제도 아닌 일개 북양대신 이홍장의 대리로 온 위안스카이에게 조선 국왕 고종도 개무시받던 안습의 역사도 있다.
이후 고종은 갑오개혁을 하면서 제후를 벗어난 자주국을 표방하기 위해 국왕이라는 칭호를 폐지하고 대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외국의 국왕들도 전부 대군주로 번역하게 했으며, 1897년에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고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대한제국의 황제와 대청제국의 황제는 서로 대등한 관계로 한청통상조약을 맺는다. 하지만 이후 일본제국이 의해 대한제국이 망하고, 청나라도 신해혁명으로 망하면서 두 제국 모두 없어지고 1991년에 공화국이 된 두 나라는 서로 대등한 현대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4.3. 유럽에서의 왕작


유럽에서는 왕이 작위로 나올 경우가 19세기 이전까지 거의 없다. 유럽의 황제는 동양처럼 힘이 있으면 그 어느 누구라도 황제를 칭하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전통적으로 유럽 그 자체였던 로마 제국과의 증명된 연계를 통한 정통성이 있어야 했다. 즉 '''한 지역의 지배자가 아닌 유럽과 기독교 세계 전체의 지배자'''였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신성로마제국에만 황제가 존재했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의 경우 작위로서 왕을 많이 쓴 편이었다. 일단 다음 황제로 선출된 자에겐 로마왕이란 작위를 주었고 황제를 선출할 권한이 있는 선제후들 중 한 명은 보헤미아왕이었다. 보헤미아 왕은 황제의 신하이기도 하지만 신성로마제국과는 이질적인 독립된 지방이 신성로마제국에 복속되어 보헤미아 공작으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황제에게 왕의 칭호를 수여받았기 때문에 때문에 작위로서의 왕과 군주로서의 왕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22]
동로마 제국 같은 경우 바실레우스 아래에 데스포티스라는 작위가 있어 사실상의 친왕 역할을 했고, 중국 왕조들처럼 데스포티스는 자신만의 번왕국을 가질 수 있었다. 모레아 전제군주국이 그 예이다.
동로마 제국의 계승은 동로마의 마지막 황녀와 결혼한 러시아의 차르가 이어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서유럽에선 무관심이었다. 한 지역의 왕이 황제를 주장하는 꼴이기 때문. 특히 러시아의 경우 로마 제국 시대에는 크림 반도 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로마의 강역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리고 이 당시는 러시아가 서구화를 외치며 유럽 세계에 편입되지 않았을 때였다.
영국에서도 대영'''제국'''이라지만 영국의 정식 명칭은 대브리튼 연합왕국이지 제국이었던 적이 없다. 유럽 최강국으로 올라서도 왕국에 여러 작위를 합친 군주였고 황제 드립은 무굴 제국을 멸망시키고 버마를 합쳐서 인도 제국을 세워서 '인도 황제'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서 나왔다. 이때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은 쓸데없는 짓이라거나 작위적이라는 비판을 하였다. 전통적으로 유럽의 황제는 자신의 힘의 총량이 아닌 유럽 그 자체였던 로마 제국과의 증명된 연계를 통한 정통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황제를 자처했을 때 전 유럽에서 광역 어그로를 먹었다.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외칠 수 있던 것도 독일 역사에서 독일 1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왕조의 초대 황제가 오토 1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그 강한 국력을 가졌을 때에도 황제 드립을 나폴레옹 이전까지는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국의 왕은 꼭 외왕내제스러운 "왕은 그의 왕국에서는 황제다!"(O imperador é rei em seu próprio reino!)[23] 같은 정신승리적 발언을 했던 것. 이것을 나폴레옹이 깨트리면서 그 때부터 기존 유럽세계의 질서를 깨트리는 흉악한 간웅이라고 생각한 각국과 더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장기 중세를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중세의 마지막의 절정기가 바로 이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라고(태동기는 프랑스 혁명, 완성은 1848년의 각국에서 벌어진 운동) 할 정도로 나폴레옹의 행동은 유럽 세계에 속한 국가들에게 기본 질서와 공식, 의식 공격을 하는 초 광역 어그로를 끈 셈.
사실 동아시아의 중화 체제와 달리 유럽에서는 King of만 붙으면 주권국가이자 진정한 왕국으로 인정하기 때문에[24] 별로 허울뿐인 황제 작위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정통성이 부족한데 황제를 참칭해봐야 다른 나라 왕귀족들에게 비웃음만 들을 것이 뻔했고, 나폴레옹처럼 황제 참칭을 하다가 망한 경우도 있다.[25]
그런데 유럽에서도 극히 드문 경우지만 King(왕)을 작위로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여왕의 남편(국서)에게 주어지는 칭호인데 정식 명칭은 King consort다. 유럽에서 여왕왕비를 구분할 때 왕비에게는 Queen 뒤에 consort를 붙이는 것과 똑같다. 여왕은 Queen regnant. 사실 군주인 왕도 엄밀히 따지면 King regnant인데 남성인 왕이 기본값에 가까울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그냥 짧게 King으로 사용될 뿐이다.
그러나 King consort라는 호칭은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만 사용되었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여왕의 남편의 호칭에 인색한 관계로 그냥 Prince consort의 작위를 주었다. 여자 왕의 남편은 한국에서는 부군/국서(國壻)로 번역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부군은 여왕의 남편 뿐만 아니라 남의 남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국서는 여왕의 남편/왕의 사위(부마)의 뜻으로 한정된다.

5. 곤충에서의 왕


수개미는 오직 여왕개미정액셔틀(..)일 뿐인 개미와는 다르게 흰개미는 유시충(생식흰개미) 암수 한쌍이 평생 살면서 아이를 생산한다. 그래서 유시충 수컷을 왕이라고 부른다. 자세한 것은 흰개미 문서를 참조.

6. 창작물에서 왕인 캐릭터




7. 같이보기


  • 로스엔젤레스 킹스[26]
  • 대관식
  • 대군주
  • 대왕
  • 번국
  • 부왕
  • 사천왕
  • 새크라멘토 킹스[27]
  • 세자
  • 여왕
  • 왕녀
  • 왕관
  • 왕국
  • 왕들의 취미
  • 왕뚜껑
  • 왕실
  • 왕위 계승의 법칙
  • 왕위 요구자
  • 왕자
  • 왕정복고
  • 왕조
  • 왕조국가
  • 왕족
  • 외왕내제
  • 율리우스 카이사르[28]
  • 제왕
  • 제후
  • 천왕
  • 천자
  • 천조
  • 태왕
  • 황제

[1] 이는 중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고대 국가들이 비슷했다. 고대에서 도끼, 낫, 칼 등은 '언제든지 나의 목을 벨 수 있는자', 즉, '''언제든 나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자'''라는 의미였다.[2] 사람이 땅 위에 서 있는 모습이라는 설, 士 자의 분화자 설, 土 + 一/上 설 등. 사실 王 자의 음이 도끼의 상형문자인 戉(도끼 월) 자와 음이 멀어서 도끼의 상형자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3] 중원고구려비와 봉평신라비에서 등장. 마립간의 다른 표기로 보기도 한다.[4] 사비회의 당시 참석자 기록을 봐선 가야 안에서 크고 강한 나라의 임금은 왕(王), 작은 나라의 임금을 한기(旱岐)로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5] 왕이라는 칭호 자체를 쓰기 시작한 건 기원전 4세기 때부터이기는 하다.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게 문제기는 하지만[6] 일본어 발음으로 오라고 한다[7] 정확히는 보헤미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 제후국이던 독일 왕국의 구성 제후국이던 보헤미아 공국에서 보헤미아 왕국으로 승격한 것이라 보헤미아 국왕은 독일 국왕(=신성 로마 황제)의 봉신이었다.[8] 엄밀히 따지자면 동양에선 대공이라는 작위가 없기에 제후왕인 친왕이나 군왕은 서양의 대공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에도 보헤미아 왕국처럼 왕이 황제 아래의 제후인 경우가 드물지만 있기는 했기 때문에[7] 대공과 완전히 같다고 보기는 힘들다.[9] 《위략》에 나오는 내용으로 어디까지나 중국적 사고방식, 즉 자신들이 천하에 중심이고, 자신들의 통치자가 온 천하를 통치하는 天子라는 개념에서 나온 말이다. 조선이 연의 칭왕을 따라서 칭왕을 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하게 존재하지만 , 그 이전에 스스로 侯라고 하였을 가능성은 거의없다.[10] 청나라 애신각라씨의 봉작 화석친왕-다라군왕-다라패륵-고산패자-기타 등등에서 황자는 대체로 기본이 다라패륵이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청나라의 봉작은 세습되면서 등급이 떨어졌다. 사실상 방계가 다라군왕이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편이었다. [11] 주로 명나라가 그랬다. 명 말기에는 친왕은 28명에 불과했지만 군왕이 무려 600여명에 달하여 그 들에게 지급해야 할 녹봉도 주지 못할 정도로 제후왕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고 한다.[12] 다만 영락제는 명 건국초 여전히 국가의 주적으로 잔존하던 원나라 잔존 세력(북원)을 견제하던 북방 사령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특이적으로 군사력이 강대했다.[13] 청조의 경우 황족포함 모든 만주족이 북경을 포함한 전국 주요 대도시에 소재한 팔기주방 내에서 거주할 의무가 있었다. 그것은 지배민족인 만주족이 한족을 사사로이 괴롭히는것을 막으려는 목적과 한족과 섞여살며 동화되지 않은 팔기의 군사조직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애당초 북경의 옛 '여(呂)'자 모양 성벽중 자금성이 있는 위쪽 작은 직사각형 지역이 만주족 전용 주거지역이었다.[14] 그런데 고려해봐야 할 것은 周代의 중앙 고위관료들은 제후들 중에서 임명되었다. 따라서 三公의 지위에 오른 제후가 제후들 중에서 가장 높은 등급과 동등되게 취급되었다는 것이다. [15] 예를 들자면 한나라의 위왕 조조가 있다.[16] 예를 들자면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나 공친왕 혁흔이 있다.[17] 예를 들자면 해왕 등등이 있다.[18] 고구려 태왕(성상), 신라 삼황 혹은 황왕(제왕), 발해 가독부(황상), 고려 황제(광종 시기 및 공식선상이 아닌 기타 재야 문헌 등지) 사용 등.[19] 백제의 멸칭인 '백잔' 의 주인이라는 뜻.[20] 사후 추증.[21] 따지고 보면 명나라나 청나라와 국경을 맞댄 나라들 중 조선보다 인구가 많은 나라는 지극히 드물었다. 러시아와 인도는 청대에 들어 겨우 접했고 그나마도 중국의 직접 통치력이 약하다 보이는 몽골, 티베트 방면에서 접했다.[22] 신성로마제국은 독일 왕국, 아를 왕국, 이탈리아 왕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로마왕은 독일 왕국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사실상의 황태자였다. 그런데 보헤미아 왕국은 신성로마제국을 구성하는 독일 왕국의 제후국으로 같은 왕국이긴 했지만 보헤미아 국왕은 로마왕(독일왕)의 신하였다. 좀 쉽게 설명하자면 보헤미아 국왕은 왕이라기 보단 대공보단 높고 왕보단 낮은 대대공(...)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23] 포르투갈어[24] 따라서 King in은 일종의 외왕내제다.[25] 그러나 만약 나폴레옹이 황제가 아닌, 왕으로 즉위했다 하더라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물량이 아무리 거리상의 문제로 제대로 물량을 동원할 수 없던 러시아를 제외한 전 유럽과 맞먹는다고 해도 프랑스 제국의 마지막 시기를 보았을 때 비슷한 전개로 갔을 것이다. 또한 나폴레옹이 황제에 올라 프랑스가 다시 군주정으로 돌아섰다고 해도 당시 프랑스 제국군은 역설적이게도 혁명의 불씨를 가는 곳마다 뿌리고 다녔기 때문에 타 군주들의 입장에선 어떻게든 무너뜨려야 할 대상이었다.[26] NHL의 팀[27] NHL의 팀[28] 그의 이름이 왕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 쓰는 차르라는 호칭과 프로이센에서 쓰는 카이저라는 호칭이 이 사람의 이름 '카이사르'를 자기네 나라 식으로 부른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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