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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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씨 제나라(田齊)의 제5대 군주이자, 제2대 왕. 제위왕의 아들. 제민왕의 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라를 잘 다스렸다[1] . 그러나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연나라를 약탈해 연소왕이 제나라에게 원한을 품어 아들인 제 민왕 때 72개 성 중 70개가 털리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2. 생애
제 선왕 6년(기원전 314년), 제 선왕은 연나라에서 연왕 자지(子之)와 태자 희평(姬平)이 싸우면서 내분이 일어나자, 연나라를 쳐서 그 수도인 계를 50일만에 함락시켜 연나라는 잠시 멸망했다. 그리고 약탈을 자행하는 것을 막지 않아 결국 연소왕이 제나라에게 원한을 품어 훗날 악의(樂毅)를 등용해 제나라의 72개 성을 함락시켜 오히려 제나라가 멸망 위기에 처하게되고 명장 전단(田單) 덕에 겨우 나라를 겨우 회복시킨다.[2]
제 선왕 18년(기원전 302년), 왕이 추연(鄒衍), 순우곤(淳于髡), 전병, 접여, 신도, 환연 등의 유세가를 좋아해 집을 내리고 대부로 봉했다. 그리고 고자, 송견, 윤문, 팽몽, 계진, 맹자(孟子) 등도 제 선왕에게 의지했다. 제나라에서 제자 백가가 논쟁을 하며 자유로이 뜻을 펼쳐 선진(先秦) 문화의 절정을 이룬다.
제 선왕 19년(기원전 301년), 제 선왕이 죽고, 그 아들인 전지(田地)가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제 민왕(齊湣王)이다.
3. 평가
3.1. 제 선왕의 업적
3.1.1. 제자백가 양성
맹자, 추연, 순우곤 등을 등용해 제자백가를 양성하게 하여, 제나라의 문화가 융성해지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훗날 그것에 힘입은 유가(儒家)가 한나라 때 국교가 되는 기초를 마련한다.
3.2. 제 선왕의 실책
제 선왕은 재위 기간 중에 실수를 하여 훗날 제나라가 멸망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3.2.1. 합종
제 선왕 2년(기원전 318년), 제 선왕은 소진(蘇秦)의 말을 듣고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 연나라, 초나라와 합종하여, 진(秦)나라를 쳤으나 서로 간의 이해 관계 탓에 제대로 일을 해내지는 못했다. 그것이 훗날 진나라를 키우는 일이 되고 만다.
3.2.2. 초나라와의 동맹 파기
초회왕이 제나라와 동맹을 파기하자, 그것을 좋다고 초나라를 친 것은 전혀 좋지 않은 행위였다. 그 이유는 역시 진나라를 키우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3.2.3. 연나라 약탈
위에 언급한 제나라의 약탈로 인해 연나라의 원망을 사서 연소왕(燕昭王)이 악의를 보내 제나라를 영혼까지 털어버려 멸망 직전까지 가고 국력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해 진나라에게 망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4. 사기의 기록
위는 죽서기년의 기록을 참조한 것이고, 사기에서는 어땠는지 보도록 하자.[3]
제 선왕 2년(기원전 341년), 제 선왕이 전기(田忌)와 손빈(孫臏)을 보내 마릉에서 방연을 사살했고, 위나라의 태자를 포로로 잡았다.
제 선왕 7년(기원전 336년), 양혜왕과 평아에서 회맹했다.
제 선왕 8년(기원전 335년), 견에서 양 혜왕과 회맹했다.
제 선왕 9년(기원전 334년), 위 양왕과 서주에서 회맹해 왕을 칭했다.[4]
제 선왕 10년(기원전 333년), 초나라가 서주를 포위했다.
제 선왕 11년(기원전 332년), 위나라와 제나라는 조나라를 쳤으나 수공으로 실패했다.
제 선왕 18년(기원전 325년), 제자백가를 맞이해 이들을 대부로 임명하여 대우했다.
제 선왕 19년(기원전 324년), 제 선왕이 죽고 그 아들 전지가 이어 제 민왕이 된다.
[1] 물론 그것이 제자백가 양성이다.[2] 여담이지만 사기에서는 이것이 제민왕 때 일로 기록하였다.[3] 열국지는 사기를 따랐음을 알려두니 열국지를 보려고 하거나 봤던 사람은 참고하기 바란다.[4] 사기에 따르면 아버지 제 위왕은 생전에 왕을 칭한 적이 없고, 아들이 추존해 준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