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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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영규(靈圭)
본관
밀양 박씨
종파
선종
출가
공주 갑사(甲寺)
칭호
기허당(騎虛堂)
출생
1537년 조선 충청도 공주
사망
1592년 조선 전라도 금산[1]
1. 개요
2. 생애
2.1. 임진왜란 이전
2.2. 청주성 전투
3. 사후
4. 기타


1. 개요


조선 중기의 승려. 승장(僧將)이다. 임진왜란 시기 처음으로 승병을 일으켜 청주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으나 금산 전투조헌과 함께 전사했다.

2. 생애



2.1. 임진왜란 이전


임진왜란 이전 영규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소략하다. 조인영(趙寅永)이 찬한 순의비명(殉義碑銘)에 따르면, 영규의 속성(俗姓)은 박씨로 밀양인이며 휴정의 큰 제자였으며 공주 청련암에 상주했다고 한다. 또한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순의실적비'에 따르면, 영규는 밀양 박씨이고 호는 기허이며 공주에서 태어났고 공주 갑사(甲寺)에서 오래 머물며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그리고 원각사에 소장된 갑사사적(岬寺史蹟)에 수록된 영규사실기[2]에 따르면, 영규는 19살에 계룡산 만정 북록 청련암에서 출가했으며, 영변 묘향산에서 휴정대사 문하에 들어가 20년간 수학하며 여러 범어 경전과 외서를 공부했다가 공주 갑사로 갔다고 한다.
또한 영규는 갑사에 있으면서 사제들을 도와 스스로 장작을 쪼개 목검처럼 사용해 무예를 익혔다고 하는데, 일각에서는 이 기록이 영규가 갑사에서 불목하니[3]로 살아갔음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영규사실기에 따르면, 영규는 여름에는 베옷만 입고 겨울에는 솜도 넣지 않은 옷을 입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사람들이 지나치게 검박하다고 지적하자, 영규는 "옷이라는 것은 단지 몸을 덮는 것이면 족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2.2. 청주성 전투


순의비명과 영규대사 순의실적비에 따르면, 영규는 국왕이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삼일간 통곡했다가 공주 목사 허욱을 찾아가 스스로 장수가 되고자 청해 허락을 받아낸 뒤 승려 수백 명을 모았다고 한다. 선조실록 선조 25년 8월 26일자 기사 역시 영규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스스로 승병을 일으켰다고 기술되었다.

호성감(湖城監) 이주(李柱)가 아뢰기를,

"어떤 중이 충청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면서 ‘한 그릇의 밥도 다 나라의 은혜이다.’ 하고는 그 무리를 불러 모아 지팡이를 들고 왜적을 쳤다고 합니다."

하고, 신점(申點)은 아뢰기를,

"영규(靈圭)라는 자가 있어 3백여 명을 불러 모으고서 ‘우리들이 일어난 것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나의 군대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니, 중들이 다투어 스스로 앞장서서 모이어 거의 8백에 이르렀는데, 조헌(趙憲)과 함께 군사를 합하여 청주(淸州)를 함락시킨 자가 바로 이 중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25년 8월 26일자 기사

반면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8월 1일자 기사에 따르면, 영규는 공주 목사 허욱에 의해 승장으로 임명되었고 허욱이 모은 승병들을 통솔했다고 한다.

승려 영규(靈圭)는 당초 공주(公州) 산사(山寺)에 있었는데, 목사 허욱(許頊)이 불러 승장(僧將)을 삼았으나 하려 하지 않다가 강권한 뒤에야 응하였다. 일단 무리를 모아 군대를 만들고 나서는 오직 조헌만을 따라 진퇴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8월 1일자 기사

어느 쪽이 사실에 부합한지는 기록이 소략해 확언하기 어렵지만, 선조수정실록을 제외한 모든 기록이 영규가 수백 명의 승병들을 모아 공주 목사 허욱의 허락을 받고 승장이 되었다고 서술된 것을 볼때, 영규가 자발적으로 승병을 모은 것이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유독 선조수정실록에서만 영규가 허욱의 강권으로 승장이 되었다고 기술된 것은 영규와 함께 의병 활동을 벌인 조헌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청주성 탈환이 조헌의 주도하에 이뤄졌다는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다.

조헌이 처음에 수십 명의 유생(儒生)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공주(公州)와 청주(淸州) 사이에 가서 장정을 불러 모으니 응하는 자가 날마다 모여들었다. 그러자 순찰사와 수령이 관군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갖가지 방법으로 저지하고 방해하였다. 이에 조헌이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을 찾아가 거사에 협력해야 한다는 뜻을 극력 말하자 순찰사가 그대로 따랐다. 청양 현감(靑陽縣監) 임순(任純)이 백여 명의 군사로 조헌을 돕자 국형이 그가 절도(節度)를 어겼다고 하여 잡아 옥에 가두고 죄를 다스리니, 조헌이 또 편지를 보내어 그를 책망하고 바로 우도(右道)로 가서 1천 6백 명을 모집하였다.

공주 목사 허욱(許頊)이 의승(義僧) 영규(靈圭)를 얻어 그로 하여금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조헌을 돕게 하니, 조헌이 군사를 합쳐 곧장 청주 서문에 육박하였다. 적이 나와서 싸우다가 패하여 도로 들어가니, 조헌이 군사를 지휘하여 성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서북쪽에서부터 소나기가 쏟아져 내려 천지가 캄캄해지고 사졸들이 추워서 떨자 조헌이 탄식하기를 ‘옛사람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런 것인가?’ 하고 마침내 맞은편 산봉으로 진(陣)을 퇴각시켜 성 안을 내려다 보았다.

이날 밤 적이 화톳불을 피우고 기(旗)를 세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진영을 비우고 달아났다. 조헌이 성에 들어가니 창고의 곡식이 그대로 있었다. 방어사 이옥(李沃)이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것을 남겨두어 적이 다시 점거하게 할 수 없다.’ 하고 모두 태워버렸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8월 1일자 기사

그러나 선조실록에 따르면, 청주성 탈환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바로 영규였다.

요동에 자문을 보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중략)

충청 감사 윤선각(尹先覺)이 제장(諸將)과 청주(淸州)를 진격하여 포위하자 적군 6백 명이 나와서 포(砲)를 쏘아댔습니다. 공주(公州)에 있던 승려 영규(靈圭)가 모집한 승군 8백 명을 거느리고 함성을 지르며 돌입하자 제군(諸軍)이 승세를 타고 수급 51과를 참획하였는데 남은 적은 밤을 틈타 도망쳤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5년 9월 15일자 기사

사간원이 아뢰기를,

(중략)

충청 병사(忠淸兵使) 이옥(李沃)은 변란 이후부터 머뭇거리면서 물러나 웅크린 것이 한두 번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청주(淸州)의 전투에서는 군사를 옹위하여 들어가지 않다가 영규(靈圭)가 성을 함락시킨 뒤에야 비로소 들어가 웅거하였는데 적이 되돌아올까 두려워하여 즉시 성을 헐고 곡식을 태우게 하고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므로 청주의 사람들이 그의 살점을 먹으려고 하였는데 마침내는 적을 물리친 것을 자기의 공으로 삼아 거짓으로 보고하여 상을 받았으니 이미 무상한 것인데다 저 종배(終排)의 전투에서는 주장(主將)으로서 15리 밖에 진을 치고 진격하여 토벌할 의사가 없었으니 군율(軍聿)로 논하여 중전(重典)으로 처치함이 옳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거만하게 장계하여 죄가 없는 사람인 것같이 하였으니 그가 군율을 멸시하고 조정을 가볍게 여긴 것이 심합니다. 여러 사람의 심정이 통분해 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관직을 삭탈하여 종군(從軍)하게 하소서.

선조실록 선조 26년 1월 12일자 기사


2.3. 금산 전투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조헌과 영규가 청주성을 탈환한 뒤 청주성에 뒤늦게 들어온 충청 병사 이옥이 창고의 곡식을 남겨두어 적이 다시 점거하게 할 수 없다며 모두 태워버리는 바람에 의병들에게 식량을 줄 길이 없자 조헌이 해산했다고 한다. 그 후 조헌은 다시 군사를 모집해 북쪽으로 향하여 온양에 이르렀는데, 윤국형이 장사 장덕익을 보내 조헌을 설득했다.

서원(西原)의 전투에서 이미 공의 충용함을 알았으니, 이제는 공과 사생(死生)을 함께할 것을 맹세한다. 그런데 금산(錦山)의 적이 고 초토(高招討)가 전투에서 패한 뒤로 더욱 창궐하여 앞으로 호서(湖西)·호남(湖南)을 침범할 형세가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국가에서는 다시 중흥할 희망이 없어질 것이며, 공을 따르는 사졸들도 자신의 집을 생각하게 될 것이니 어떻게 안심하고 북쪽으로 갈 수 있겠는가. 차라리 작전을 변경하여 금산의 적을 토벌한 뒤에 힘을 합해 근왕(勤王)하는 것이 더 좋겠다.

이에 조헌은 금산의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금산 방면으로 진군했다. 당시 일본군이 금산에 주둔하면서 가끔 나와 가까운 고을을 습격하였는데, 호남의 관군과 의병의 여러 장수가 이끄는 8∼9진(鎭)에서는 모두 요해처를 지키면서 고경명이 패한 것을 거울삼아 감히 금산을 노리지 못했다. 다만 보성과 남평에서 병사들이 출격해 금산을 노렸다가 일본군에게 역습당해 남평 현감 한순과 병사 5백명이 전사했다. 이후 조헌이 금산을 공격하려 하자, 전라 감사 권율과 충청 감사 허욱이 모두 만류하며 동시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 금산을 함께 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약속한 기일이 지나도 관군이 오지 않자, 조헌은 그들이 머뭇거리는 것을 분하게 여겨 휘하 700명만 이끌고 금산으로 가려고 했다. 이에 영규가 간곡히 만류했다.

반드시 관군이 뒤에서 지원을 해 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조헌이 눈물을 흘리며 답했다.

군부(君父)가 어디에 계신가.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버려야 하니,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성패와 이해 관계를 어떻게 돌아볼 수 있겠는가.

결국 조헌과 의병 700명이 출격하자, 영규는 "조공을 혼자 죽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권율 등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며 함께 진군할 것을 재촉한 뒤 승려 800명을 이끌고 조헌과 함께 금산으로 향했다. 순의비명에 따르면, 금산 십리 밖에서 비를 만나 진영이 서지 않자 영규가 다시 건의했다고 한다.

병(兵)이란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는 법이니 잠시 늦추지요.

이에 조헌이 답했다.

이 도적은 우리가 능히 대적할 수 없지만, 우리들은 충의로써 선비의 마음을 일으켜 그 날카로움을 타고자 한다.

다음날 조헌의 의병 700명과 영규의 승병 800명은 금산의 일본군과 교전했으나 끝내 모두 전사했다. 순의비명에 따르면, 새벽에 적이 내습하여 군대의 후방이 끊기고 조헌이 전사하자, 사람들이 피할 것을 권했으나 영규가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살 수 있으리오?

영규대사 순의실적비에 따르면, 영규는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가 다시 기운을 차렸으나 창자가 상처를 따라 나오자 한 손으로 창자를 쥐고 또 한 손으로 병기를 잡고 일어나 공주로 가서 제기하려고 60리를 걸어 초포천을 건넜다고 한다. 그러나 냇가를 건너던 중 복부의 상처에 물이 스며들어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자, 영규는 정신을 가다듬고 불당리까지 이르렀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국사와 야록에는 대사가 문열공과 함께 금산 땅에서 전몰하였다고 하였고 청주에서 왜적과 격전하다가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공주 지방 사람들은 대사가 손으로 아픈 상처를 쥐고 공주 초포 불당리까지 왔었다고 하면서 그곳을 가리키며 차탄함을 금치 못한다. 현재 유평리에 대사의 묘가 있으며 불당리와 거리가 가까운 점으로 보아서 그 말이 진실인듯 하다.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순의실적비


3. 사후


조정은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영규를 지중추부사에 추증했다. 이후 총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으며, 진락산 기슭에 그의 영정을 안치한 진영각(眞影閣)과 비가 세워졌고 의선(毅禪)이란 편액(扁額)이 하사되었다.

4. 기타


공주시 계룡면 기산리에 그의 이름을 딴 영규대사로가 있으며 논산시 상월면 월오리까지 이어진다.
[1] 금산은 박정희 정권 때 충청남도로 편입되었다.[2] 정식 명칭은 임진의병승장복국우세 기허당대선사일합영규사실기(壬辰義兵僧將福國祐世騎虛堂大禪師一篕靈圭事實記)[3] 사찰에서 땔나무를 베고 물을 긷는 사내 종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