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
1. 개요
조선 임진왜란기의 의병장. 본관은 배천(白川)[3] 이며,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경기도 김포 출신이다.
2. 생애
원래는 문신이었다. 정여립과 대립으로 정치적으로는 정철과 함께 서인 측 강경파로 분류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의병장, 행동하는 선비로 길이 남게 된다.
전쟁 전에는 이이를 열렬히 숭배하는 서인 강경파이자[4] 전투적인 성질로 유명했고 이이의 제자였다가 스승 이이를 비판하고 동인으로 전향한 정여립을 맹렬히 비난했다. 관직에 있다가 자기 의견이 안 받아들여진다 싶으면 물러나면서도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 정치 현안에 대한 상소를 올리는 등 독한 면모를 지니고 있어서, 선조가 "조헌 이 자는 서인 놈들 중에서도 간귀이니 앞으로도 마천령을 넘게 될 것이다(=유배 보낼 것이다.)."라고 깔 정도였다. 실제로 동인 집권기엔 병폐를 일으키는 동인 세력을 맹공하다가 유배를 갔었고, 후에 기축옥사로 동인들이 숙청되면서 선조에 의해 풀려났다. 동인의 수장이었던 이발의 식솔 등 죄없는 사람들까지 연좌되어 죽을때는 형장을 찾아가 위로주를 건내는 등, 개인적으로 동인을 증오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에는 서인 내 주전론자의 중심이었고, 전쟁을 대비하자는 상소를 자주 올렸다.[5]
또한 상소를 올릴 때 도끼를 함께 가져가거나 머리를 여러 번 땅에 치는 등 상소를 강경하게 올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렇듯 도끼를 들고 가서 상소를 올리는 일이 바로 '지부상소'(持斧上疏)', 이른 바 '도끼 상소'라 알려진 것이다. 요컨대, 상소를 가납하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가져간 도끼로 자기를 찍어 죽이라는(!!) 것. 상소를 올릴 당시에는 허세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후에 이 양반이 하는 일을 본다면 아마 이건 진담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흠좀무. 조헌의 이 지부상소는 후대에도 일부 양반, 유생들이 따라 행한 바가 있다. 대표적으로 숙종조의 윤지완, 고종조의 최익현 등이 있다. 이러한 지부상소를 두고는 호의적인 평을 하는 사람도 있었던 반면 무례한 일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가령 심노숭이라는 양반이 쓴 '자저실기'에서는 조헌 때문에 '''임금 앞에서 도끼 들고 함부로 설치는 못된 풍조가 생겨났다'''는 투로 지부상소를 비판하고 있다.
낙향한 후에도 지방관을 하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전쟁에 대비할 것을 촉구했지만 다들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라고 비웃었다. 오로지 연안성을 지키던 신각 장군만 그의 말을 옳게 여겨서 성을 정비했고, 이는 나중에 이정암이 연안성에서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는 밑거름이 된다. 신각은 약탈하던 일본군 수십명을 임진강 어귀에서 섬멸하여 '''조선 육군의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 도원수 김명원이 사실관계를 파악 않고 장계를 올리는 중대한 실수를 하여 적전도주 죄목으로 목이 잘리는 어처구니없는 운명을 맞이한다.
각설하고 그가 우려했던 것처럼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조선군은 일본군을 감당하지 못했다. 자신의 경고가 현실이 된 상황에서 조헌은 이제 의병으로 전쟁터에 뛰어들 결심을 했다. 입만 놀리는 주전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조헌은 1592년 5월, 옥천에서 병력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문인 이우·김경·전승업 등의 도움으로 16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는 데 성공하고 7월 초부터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조헌은 “귀신과 사람이 다 같이 증오하는 것은 도적이라. 화살이 이 원수들에게 함께해 그들의 고향 땅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리라. 뜻을 굳게 먹는다면 귀신이 감동하고 백성들이 따라나서며, 일을 이루려고만 한다면 천지만물도 도우리라”라는 격문을 써 의병을 모집했다.
조헌은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이 1차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청주성 탈환을 계획했다. 관군 및 영규 대사가 이끄는 1000명의 승병과 합세해 청주 전투를 치뤘고,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7백 의병을 거느리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1만 5천 왜군과 2차 금산 전투에서 분전[6] 하다가, 아들인 조극관과 영규의 800명의 승군을 비롯한 전 의병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야사에 의하면 비록 패했지만 이들이 죽기 살기로 저항했기에 왜군도 수천여명이 죽을 정도로 피해가 커서 우두머리를 난도질했는데, 아들인 조극관을 우두머리로 알고 난도질을 했다고 한다.[7] 이들의 분전으로 왜군은 피해를 추스려야 했기에 호남 곡창지대 방어에 큰 기여를 했다.
다만 금산 전투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실제 일본군 사상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좀 의문이다. 일방적으로 당한 것에 가깝기 때문. 이치 전투 항목에 적혀 있는 것처럼 이치 전투가 웅치 전투보다 일정 정도 시간이 지나서 다시 벌어진 것이라면, 웅치 전투, 이치 전투, 2차 금산 전투의 시간순부터 애매해진다. 이치=웅치->금산이 아니라, 웅치 이후에는 순서가 불분명해지기 때문. 일본군이 조헌을 털어버린 다음에 다시 전주로 진격해서 이치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 마저 존재한다. 이 상황이라면 실질피해는 크지 않았을 듯. 뒤에 조선군은 반격으로 금산을 탈환하게 된다.
율곡 이이의 제자이기도 했는데, 이이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났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3. 칠백의총
전투 4일 후인 22일 조헌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조헌을 포함한 전사한 조선군 700명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 한 곳에 합장하면서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불렀다. 훗날 조정에서는 조헌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했다. 이후 인조 대에 순의단을 세우고 종용사라는 편액을 내리면서 종용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다가 종용당 서원이 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40년 진화사라는 사원을 세우면서 싹 밀려나갔다가, 광복이 되자 국민 성금으로 복원되었다.
하지만, 이 700명에는 '''영규가 이끌었던 승병의 숫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조헌의 제자인 박정양 등이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조헌 쪽 인사들의 이름만 넣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시신들은 같이 수습한 것으로 보이고[8] . 영규의 이름을 일단 같이 모셔지고 있다[9] 하지만 불교계에서는 천오백의총으로 바꿔야 한다는 불만이 종종 나오고 있다.
4. 우저서원(牛渚書院)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서원으로 중봉 조헌을 배향하였던 곳이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도 살아남았고 1973년 보수하였다. 서원에는 조헌 추모비와 사당 등이 있다.
참고로 조헌의 고향이 김포이기도 하여서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김포시에 있지만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5. 관련 문서
[1] 칠백의총기념관 보관 중. 운보 김기창 작..알다시피 친일인명사전에도 오른 김기창이라 친일파에세 영정을 맡겼다는 비난도 많다...[2] 금산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쭉 전라도 관할이었다. 금산은 박정희 정권시기인 1962년 11월 21일서울특별시, 도, 군, 구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법률 제 1172호)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되었다.[3] 배천 조씨의 시조는 무려 송 태조 조광윤의 직계손자 조지린. 이런 그가 왜 한국 땅으로 왔는지에 대해서는 송태조#s-2.4 항목 참조.[4] 호가 후율인데 이 율자는 율곡의 율을 따온거라고 한다.[5] 1574년에 명나라를 다녀오고서 "다행히 변경에 근심이 적은 것은 다만 오랑캐 가운데 웅대한 계략을 가진 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임금이 된 자가 어찌 저들에게 호걸이 없다고 하여 자신의 방어를 소홀히 하겠는가."라고 평했는데, 이 우려는 누르하치가 10년쯤 후부터 여진족을 통합해 나감으로써 현실로 드러났다.# [6] 이 때 관군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같이 공격하자는 영규의 주장을 배격하고 일단 돌격을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있다.[7] 아들 조극관이 만약 전쟁에서 패해 전멸했을 경우 아버지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 일부러 화려한 옷을 입어 우두머리인것처럼 과시하는 바람에 아버지를 대신해 변을 당했고 이를 가리켜 후대사람들이 자신을 희생해 아버지의 시신을 보전한 효자라고 불렀다고 한다.[8] 다만 이것도 현시창인 것이 상투 달린 시신만 수습했고 머리 깎은 시신들은 그냥 내버려둬서 근처 마을 사람들이 수습했다라는 일화도 전한다고 한다.[9] 영규의 무덤은 충청남도 계룡산 갑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