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정(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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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colbgcolor=white,#2d2f34>'''휴정(休靜)'''
'''출생'''
1520년 3월 26일 조선 평안도 안주
'''사망'''
1604년 1월 23일 조선 평안도 묘향산 원적암
'''본관'''
전주 최씨[1]
'''속명'''
최여신(崔汝信)
'''아명'''
최운학(崔雲鶴)
'''자'''
운학(雲鶴)
'''호'''
청허(淸虛),서산(西山)
'''별칭'''
백화도인(白華道人), 서산대사(西山大師),풍악산인(楓岳山人),두류산인(頭流山人)
묘향산인(妙香山人), 조계퇴은(曹溪退隱),병로(病老)
1. 개요
2. 생애


1. 개요


千計萬思量 생각하고 꾀하던 모든 것들

紅爐一點雪 화롯불에 떨어진 흰 눈 한 송이

泥牛水上行 진흙으로 만든 황소가 물 위로 가고

大地虛空裂 대지와 허공이 꺼져버렸네

임종게(臨終偈).

조선승려. '서산대사'라는 별호로도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1520년 평안도 안주에서 최세창(崔世昌)의 아들로 태어나 1538년 출가하여 1540년 계(戒)를 받았다. 1549년 승과에 급제하고 선교양종판사가 되었으나 7년만에 그런 벼슬은 승려된 자의 본분이 아니라고 하며 관두고 금강산 백화암으로 들어가 수행하였고 다시 묘향산 금강굴에 가서 성속이 분리되지 않는 참됨의 가치와 그 길을 추구하였다.
이후 제자들을 길러 내었는데 제자 중 유명한 사람으로 사명당이 있었다. 사명대사는 묘향산까지 찾아와 서산대사를 시험하려고 "여기 오다가 고운 한 마리를 잡았는데 대사님한테 드려야 할지 놓아주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라고 장난치듯 말했는데 서산대사는 "나는 대사께서 소승을 찾아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을 텐데 밖에 나가 마중을 해야 될지 안으로 모셔 들여와야 될지 몰라서 망설이는 중이오."라고 대답했다. 이 한 마디에 사명대사는 무릎을 끓으며 그날로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당시 묘향산에 있었다. 서산대사는 승병을 일으켜 제자 사명당 등과 왜군을 물리치려 노력하였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사명당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하였는데 나이 85세, 법랍 67세였다. 다비한 사리는 묘향산 보현사, 안심사와 해남 대흥사에 나누어 각각 부도를 세웠다.
당취(혹은 땡추)를 이끌었다는 야사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야사이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 것.
<명종 실록>에 휴정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윤춘년(尹春年)이라는 선비가 "내가 근래에 정진(精進)한 공부가 깊어서 방안에 광채가 있고 입속에서 향기가 난다."하며 휴정에게 입김을 불었는데 입냄새가 너무 심해서 휴정이 참다 못해 "이것은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마장(魔障)이라는 것인데 당신이 신비한 빛과 특이한 향기를 지녔다 해도 별로 귀할 것이 없습니다."하고 말했고 이후 두 사람은 절교했다고 한다. 윤춘년은 실록에서 평가가 좋지 않은 인물인데 윤원형에게 붙어서 그의 형 윤원로의 추문을 들춰내 고발한 공으로 반열을 뛰어넘어 고관이 되었고 그 때문에 아부하는 선비들이 줄을 이루었으며 아는 것이 많다고 뻐기고 다녔다고 한다. 실록의 사관은 "선천적으로 기억력이 좋고 책도 많이 읽은 사람이기는 한데 학문이 편벽되고 논변은 시끄러웠으며 겉으로는 청렴하고 삼가는 태도를 꾸미지만 속으로는 출세할 생각밖에 없었다."하고 평가했다. 윤원형이 몰락하자 윤춘년 역시 몰락해 시골로 쫓겨나 말년에 정신이 나가서 무당 굿이나 찾다가 죽었다고 한다. 주색 잡기나 뇌물 수수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랄까.
온라인 게임 천하제일상 거상의 용병 파계승의 2차 장수가 서산 대사다(1차 장수는 사명당).
사명당과 얽혔기 때문에 역시 설화가 있는 편이다. 민간에서는 사명당과 서산대사의 도술 대결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 관광탄 사명당이 서산대사를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길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 그 발자국 어지러이 하지 말지라

今日我行跡 오늘 남기는 내 발자욱

遂作後人程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라는 시의 저자라고 알려졌는데 사실이 아니다. 위 시는 조선 후기의 문인인 임연당 이양연의 야설(野雪)이라는 작품인데 서산대사의 시라고 잘못 알려졌다. 시구 자체가 담은 교훈이나 고즈넉한 분위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고 백범 김구손양원 목사도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