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멜리안 푸가초프
1. 개요
1. 개요
푸가초프는 돈 코사크의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고의식파 정교도였다. 코사크로서 전쟁에 출전하여 우수한 전공을 거두었다. 반란 중에 다른 코사크의 딸이자 미녀로 소문이 자자했던 우스티니아와 결혼하였다.
당시 러시아 농민들은 예카테리나 2세의 지나친 친독일, 친귀족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귀족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농노들의 권리를 계속해서 제한하였으며, 국유지를 종종 자신이 총애하는 귀족들에게 하사했는데 그 순간 해당 국유지에 거주하는 농민들은 영문도 모르는 상태에서 농노로 신분이 추락하였다. 또한 예카테리나는 코사크들의 자유로운 공동체 생활을 제한하고 이들을 농노로 예속화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여 코사크들로부터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푸가초프는 겸손하고 덕망과 인품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떠밀려 의문의 죽음을 맞은 황제 표트르 3세를 자칭하여 농노제의 폐지를 선언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한 번은 그가 카잔에 있는 감옥에 수감된 적이 있었는데 카잔의 간수들이 오히려 그의 인품에 감복하여 그를 석방해주고 같이 봉기에 참여한 적도 있었다.
푸가초프의 난에는 농민 만이 아니라 코사크, 러시아 정교 고의식파 및 볼가 강 유역의 여러 소수민족(볼가 타타르, 추바시인, 마리인, 바시키르인)들이 대거 합세했다. 푸가초프의 세력권은 카잔과 오렌부르크를 중심으로 일시적으로 볼가 강과 우랄 산맥에 번질 정도로 거대해졌다. 하지만 수보로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의 진압이 시작되자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푸가초프는 1774년 9월 14일에 체포되었고, 철 우리에 감금되어 모스크바로 보내졌다. 1775년 1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공개처형되고 사지가 분리되어 각지로 보내졌다. 그의 부인이자 절세미녀로 유명했던 우스티니아는 이후 예카테리나 2세가 직접 내린 명령으로 요새에 종신 감금되며 죽을 때까지 모진 고초를 겪었다 한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소설 대위의 딸의 주 배경이 푸가초프의 난이며, 소련 초기에 활동한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도 1921년에 푸가초프를 주인공으로 다룬 시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