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노제

 

1. 개요
2. 발생
3. 농노의 계층
4. 생활
5. 벗어나는 방법
6. 중세 이후
6.1. 서유럽: 쇠퇴
6.2. 동유럽: 재판(再版)농노제
7. 유사 개념
7.1. 소작과의 차이점
7.2. 노예와의 차이점
7.3. 노동자와의 차이점
8. 기타
9.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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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erfdom / 農奴制
농노제는 봉건제 유럽 중세 사회에 존재했던 하층민의 종속 체제이다.
농노는 땅에 예속되어 농민으로 살아야했으며 해당 영지의 지배자인 영주에게 종속되었다. 노예와 다르게 사유재산권을 인정받아 노예보다는 높으나 자유민보다는 신분적으로 낮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2. 발생


Comment que pluseur estat de gens soient maintenant,

voirs est qu’au commencement tuit furent franc et d’une meisme franchise,

car chascuns set que nous descendismes tuit d’un pere et d’une mere.

Mes quant li pueples commença a croistre et guerres et mautalent furent commencié par orgeuil et par envie, qui plus regnoit lors et fet encore que mestiers ne fust,

la communetés du pueple, cil qui avoient talent de vivre en pes, regarderent qu’il ne pourroient vivre en pes tant comme chascuns cuideroit ester aussi grans sires l’uns comme l’autres: si eslurent roi et le firent seigneur d’aus et li donnerent le pouoir d’aus justicier de leur mesfés, de fere commandemens et establissemens seur aus;

et pour ce qu’il peust le pueple garantir contre les anemis et les mauvès justiciers, il regarderent entre aus ceus qui estoit plus bel, plus fort et plus sage, et leur donnerent seignourie seur aus en tel maniere qu’il aidassent a aus tenir en pes et qu’il aideroit au roi,

et seroient si sougiet pour aus aidier a garantir.

Et de ceus sont venu cil que l'en apele gentius hommes, et des autres qui ainsi les eslurent sont venucil qui sont franc sans gentillece.

Et li serf si sont venu par moût de manieres d'aquiaicions.

Car li aucun sont venu par estre pris de guerre: si donnoient servitude seur aus et seur leur oirs pour raençon ou pour issir de prison;

et li autre sont venu parce qu'il se vendoient, ou par povrete, ou par convoitise d'avoir;

et li autre sont venu quant li rois avoit a fere et il aloit pour combatre contre estrange gent et il commandoit que tuit cil qui pourroieot armes porter li alassent aidier, et qui demourroit, il et si oir seroient de serve condicion;

et li autre sont venu de eus qui s'en fuioient des batailles;

et li aucun sont venu de ceus qui se donnerent as sains et as saintes par devocion puis que la fois crestienne commenca a venir;

et li autre sont venu parce qu'il n'ont eu pouoir d'aus defendre des seigneurs qui a tort et par force les ont atres a servitude.

Et par quelconques manieres qu'il soient venus nous pouons entendre que grant aumosne fet li sires qui les oste de servitude et les met en franchise,

car c'est grans maus guant nus crestiens est de serve condicion.

비록 현대에는 여러 신분들이 있지만,

태초에 모든 인간은 똑같은 자유를 가진 자유인이었다.

우리 모두가 한쌍의 남자와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고,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지나친 자만심과 질투로 인해 원한과 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을 때,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위대한 군주라고 생각한다면 평화롭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 가운데서 왕을 선출해서 군주로 삼았다. 그리고 법을 만들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를 처벌할 권력을 주었다.

또한 왕이 공동체의 적들과 사악한 관료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자신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강하고, 현명한 자들을 선출해서 봉신으로서 왕을 도우며 평화를 지키는 영주들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귀족이라고 불리는 신분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자신들 가운데서 귀족을 선출한 사람들 중 남은 이들은 비귀족 자유민이 되었다.

농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런 예속인 신분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힘으로써, 몸값 대신이거나 감옥에서 풀려나는 대가로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재정적 이익을 얻거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팔아서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왕이 왕국의 방어를 위해 외국인들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무장을 한 채 같이 전장에 나갈 의무가 있는 자들을 전부 소집했을 때 안전한 후방에 남은 대가로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전장에서 도망친 죄로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 교회가 설립된 시기에 경건한 의도로 성인들에게 자신을 바침으로써 농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부당하게 예속을 강요하는 영주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농노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 농노가 되었든, 농노들에게 자유를 주고 예속인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영주들이 할 수 있는 선행 중에서도 훌륭한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누구도 예속된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Beaumanoir, ''Coutumes de Beauvaisis'' (1283), 45장

최근 중세사 연구에서 밝혀지는 것들이 다 그렇다시피, 실제로는 중세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고대 로마 시대까지 기원을 소급할 수 있다. 농노제의 기원은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까지 올라간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에 토지세와 그 토지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인두세를 결합한 것이 기원으로, 이후에 3세기의 위기 동안 로마 황제들이 인구가 적은 지역에 인구를 강제 이주시키고 정착시키는 제도를 시행한다. 4세기에는 원적법(JUS ORIGINARIUM)을 통해 농민이 원래 출생지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법이 시행된다. 이러한 토지 예속은 세습되는 신분으로 여겨졌으며, 이때 거주자를 가르키는 라틴어인 콜로누스(COLONUS)는 원래 자유민이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는 이미 노예에 가까운 낮은 계급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서로마 붕괴기의 혼란 때문에 콜로누스 제도 자체가 농노제와 얼마나 연속성이 있는지는 불명확하다. 굳이 따지면 이어지지는 않았을거라고 보는 것이 대세. 하지만 중세 토지대장 문서 등을 보면 콜로누스라는 단어는 살아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장원에 종속된 농민의 계급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게르만족의 습속에서는 종사 관계(Gefolgschaft, retinue)가 존재했는데, 자유민 상호간에 주군-종신 관계를 서약하는 것이다.
이 두 제도가 결합한 것은 봉건제도의 시작인 8세기 이후부터인데, 봉건제의 시작과 같이 샤를마뉴의 서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야만족의 침입을 막지 않고 방조하는 과정에서 각지의 제후들이 힘을 키운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원래 샤를마뉴 제국의 자유민들은 게르만족의 습속에 따라 전사이자 황제의 종신이었으나, 황제들이 야만족의 침입을 방조하자 각지의 자유민들이 멀리 있는 황제보다는 근처에 있는 유력자와 종사 관계를 맺어 자신을 의탁한 것에서 시작된다.
무력이 부족한 각지의 자유민들은 유력자들에게 자신의 토지를 바치고 종신이 된 다음, 유력자는 다시 그 토지를 종신에게 수여하는 형식의 계약을 맺어서, 유력자는 영주로 변하고 자유민은 농노로 변하게 되며, 영주가 그런 식으로 병탄한 대토지는 장원이 되었다.
유력자의 대토지에는 이미 상기한 콜로누스를 주축으로 노예(servus), 해방노예(litus) 등 다양한 신분이 존재했다. 중세 유럽을 노예제 이후 농노제로 표현하는 경향 때문에 노예 계층이 없었던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실제로는 9세기까지도 슬라브족이나 작센족 등 동방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잡은 이교도들이 적게나마 계속 노예로 공급되었으며, 각지의 유력자들은 그런 노예들을 거느린 대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간 유력자에게 토지를 위탁하온 이들은 원칙적으로 자유민이었고, 법적으로 이런 신분들은 세세히 규정되고 노예로 보느냐, 자유민으로 보느냐 차이가 있기도 했고 실제로 부역의 경중이나 예속 수준도 차이가 나기는 했으나, 현실에서는 그들이 계속 통혼으로 신분이 뒤섞이기도 했고, 토지에 예속되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존재로 여겨지면서 저 토지를 의탁해온 자유민이었던 이들도 점차 하나의 비슷한 계급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때문에 10세기가 되면 그냥 노예라는 뜻의 단어 세르부스에서 유래된 Serf로 퉁쳐지기 시작한다.
물론 저 자유민이었던 이들이 토지 의탁 하는 바람에 전부 농노 계급으로 떨어진 것은 아니다. 자기 토지와 재산, 특히 무기를 잘 갖춘 이들은 영주의 전투에 계속 동원되면서 기사 계급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중세와 관련된 것들이 으레 그렇듯이 농노제 역시 상당히 부정적인 시선만 받아왔던 제도이지만, '제도로서의 봉건제'에 대한 논의가 다 그렇듯이 매우 실체를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실제로는 관습적이고 모호하며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해온 유럽의 농촌 제도를, 후대에 대충 농노제라고 싸잡아 부르며 악습인 것처럼 규정한 것. 프랑스 혁명 때 봉건제도를 철폐하자고 부르짖었지만 실제론 봉건주의란 혁명 몇백 년 전부터 실질적으로 의미가 없었던 것과 비슷하다.

3. 농노의 계층


봉건제 항목에서도 나온 문장이지만, '''중세 서유럽의 봉건제란 사회 제도라기보다는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계약들이 얽히고 섥혀 생긴 어정쩡한 사회 구조'''이며, 농노제 또한 그 일부이다. '''농노라는 것은 특정한 의무와 권리를 가진 계급이 아니라, 저 어정쩡한 사회 구조에서 전투보다는 농업에 더 치중한 계층[1]을 퉁친 것'''에 가깝다.
때문에 농노의 권리와 의무는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기보다는 개개별의 계약 사례마다 전부 다른 것으로 봐야한다. 심지어 장원과 행정 구역은 일치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 마을에 살아도 누구는 A영주를 모시고, 누구는 B영주를 모시고, 누구는 C수도원에 속한 농노고, 누구는 A B영주를 동시에 모시는 농노고, 누구는 영주를 따로 안 모시는 자유민인 식으로 마구 섞여 있었다. 같은 마을 공동체에 사는 농민이어도 이렇게 예속계약 상태가 다른만큼 의무와 권리가 서로 달랐고 각 지역의 관습법마다도 달랐다. 또 세속 영주에 비해 교회 영주(수도원이나 교회)들이 더 가벼운 의무와 좋은 권리를 지니는 경향도 있었다. 단 하나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꼽자면, 농노는 영주에게 보호를 받으며, 영주의 사법 지배 아래 놓이고, 영주에게 생산물 혹은 노동력을 통한 봉사를 한다는 부분일 것이다.
게다가 종사 계약이 무조건 자발적으로 상호 합의하에 이뤄진 것도 아니고, 사병을 잔뜩 가진 유력자가 근처 마을에 무력 시위를 해서 강제로 자신의 농노적 종신으로 편입 시킨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종사 계약으로 편입된 농노는 자발적으로 계약한 경우에 비해서 더 악조건으로 대우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 근처 영주와 종사 계약을 자발적으로 맺으면서 '농노가 아니라 자유민이기 때문에 수확물을 공납할 의무만 있을 뿐 부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라고 계약을 맺은 이도 어느 새 어영부영 부역에 끌려가는 경우도 매우 흔했다.
  • 자유민
말 그대로 자유민. 하지만 중세 시대의 자유민은 실질적으로는 명확한 정의를 할 수 없다. 상기하였듯 농노 계급의 유래의 상당수는 봉건 계약에 의해 종속민으로 편입된 것인데, 농노들도 자기네가 법적으로는 자유민이라고 주장하며 영주의 간섭을 차단하고 싶어했다. 일반적으로 자유민으로 보는 지표는 결혼세를 영주에게 납부하지 않는 것, 자유롭게 결혼하는 것, 봉건 계약이 맺어지지 않은 자유토지를 스스로 경작하는 것, 영주에 대한 부역이나 납세가 다른 농노에 비해 가벼운 정도, 영주의 법정이 아닌 왕의 판사 법정에서 심판 받는 것, 자유민이 배심원으로 참관하는 법정에 서는 여부 등을 통해 다른 주변 농노보다 잘 살았다 싶으면 대강 자유민으로 간주하는 것. 각 지역의 관습법에 의존하는 봉건사회의 특성 상, 지역별로 자유민으로 간주되는 인구의 비율이 차이가 컸다. 플랑드르 지역은 거의 대부분의 인구가 명목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자유민이었고, 영국은 노르만 정복 이래로 행정상의 목적으로 대부분의 토지를 봉건 질서에 따라 정리해서 '봉건 계약이 맺어지지 않은 자유토지'를 가진 인구는 10% 내외에 불과했다.
  • 미니스테알리스(ministeriales)
상기한 농노 계급 중 무장할 능력이 있던 계급이다. 주군에게 작은 토지를 수여받고, 주군에 대한 종속이 세습되는 계층이었다.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 '기사 계급'으로써 귀족으로도 간주됐고 '종속 계급'으로써 평민으로도 간주되는 이중적인 신분의 계급이었다. 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신분이 애매모호했던 자유민과 빌런들에 비해서 더 확실하게 법적으로 주군에게 종속되는 신분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결혼 및 이주 등의 자유가 그냥 농민 나부랭이들보다 더 제한되어 주군의 허가를 받아야했다. 전시에는 무장하여 기사/병사로 동원되었지만 평소에는 주군의 장원의 관리자로써 일했다. 이 역시 자유민과 마찬가지로 일원적인 계층은 아니다. 백작의 미니스테알리였으면 부백작(자작)이 되어서 백작이 없을 때 백작령을 낼름 먹고 완전한 귀족으로 승진하는 것도 가능했다.
  • 빌런
마을 사람이라는 뜻이다. 중세 당시에는 전형적인 농노, 하층민으로 간주되어 천시받았다. 자유민이나 미니스테알리에 비해서 많은 부역과 납세를 부담했으며, 무장할 권리도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서 병사로 징집되지도 않았다. 자유민 문단에서 설명했듯 자유민과 경계가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농촌에서도 하류층인 계급들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 코테저
빌런보다 하위 계급. 토지를 가족만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으로 최소한으로 보유했거나, 그조차 없어서 오직 공유지에만 의존하는, 노예를 제외하면 최하위 계급이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하층민들이 쫓겨났다고 표현할 때 그 쫓겨난 하층민들이 주로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4. 생활


상기했듯 일원적이고 명확한 계급이 아니라, 같은 공동체에서도 다양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을 퉁친 계층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이런 삶을 살았다고 말하기는 애매하다. 다만 결과적으로는 영주의 영향을 크게 받는 농촌 공동체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시의 농촌의 일반적인 시대상과 생활상 속에서 살았다고 표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중세 농촌 공동체의 삶이 농노의 삶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농노랑 바로 같은 마을에 사는 10~40% 가량의 자유민도 결과적으로는 농노들이랑 비슷한 삶을 공유했을 뿐더러, 공식적으로 농노제가 해체된 근세에도 농촌 공동체의 삶은 별 차이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농노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자기가 자유민이라고 주장하며 권리를 행사하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세르부스, 리투스 등 '예속 계급'으로 간주되는 계급들은 9세기에는 이미 자유민들과 같은 마을에 살며 통혼해서 이리저리 피가 섞인지라, 법이 발전하지 않은 초기 봉건사회에서는 저런 이들을 예속 계급으로 간주해야하는지 자유민으로 간주해야하는지 혼란스러워했다. 영주는 자기 휘하의 예속민에 대해서 재판권을 가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념이었으나, 게르만족의 전통에는 자유민이면 자유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재판에 의해 심판 받는다는 관습도 존재했고, 동시에 자유민은 왕이 보낸 재판관에 의해 심판 받을 권리가 있다는 관념도 존재했다. 이렇게 3중적인 사법에 대한 관념 속에서, 농노와 영주들은 항상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해보이는 쪽으로 일을 진행시키려고 했다.
일반적으로는 세속 영주들이 교회 영주보다 더 압제적이었다. 세속 영주들은 자신의 권한을 더 크게 행사하고 싶어했고, 농노 계층은 그걸 벗어나고 싶어했다. 교회는 그 자신이 영주이기도 했지만 영주들이 농노들을 압제할 때는 대체로는 농노들에게 더 유리한 판단을 들어주기도 했고, 교회나 수도원에 속한 장원은 부역이나 공납에 있어서도 세속 영주의 장원에 비해서는 나았다.
이를테면 세속 영주들은 자신의 장원에 속한 예속민들은 결혼의 자유가 없다고 주장하며, 타 장원의 예속민과 자기 장원의 예속민과 결혼하는 것도 막고자 했다. 서로 다른 장원의 예속민끼리 결혼하면 그 자식은 어디 속하는가 따지느라 피곤하니 나름 이유있는 항변이었지만, 교회는 모든 자연인은 결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농노들은 자기들이 자유민이라고 주장하며 교회법 아래에서 결혼을 해서 영주는 농노들의 결혼에 간섭하기 어려웠다.
영주들은 농노들의 이동의 자유도 제한하고 싶어했으나, 노동력은 부족한데 땅은 많은 중세 유럽의 상황 상 아쉬운 것은 항상 영주였다. 영주는 막대한 토지를 지녔으나 그걸 전부 경작할 노동력이 부족한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농노제 역시 토지를 매개로 한 계약이었기 때문에, 장원의 농노경작지에 대한 경작권을 포기하기만 하면 농노는 자유민이 될 자격이 있었다.
영주가 자기 소유지의 예속민들에 대해서 부역에 동원시킬 권리가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것이었다. 농노들은 영주(의 가족)에게 큰 일(ex: 직영지 수확)이 생기게 될 경우, 농노들은 부역으로서 강제로 그 작업에 참가해야만 했다.
중세 유럽에는 막대한 미개발 삼림이 존재했으며, 그런 땅은 영주의 소유이거나, 공유지이거나, 교회 소유였다. 교회는 자기 소유의 삼림에서 농노들이 벌채, 사냥, 채집하는 것을 방기했다. 성경에서 자기 소유의 땅에서 빈민들이 이삭을 줍는 것을 막지 말란 규정이 나오기 때문에, 교회 역시 그 규정을 실천하는 셈치고 빈민들이 교회 토지를 자유롭게 쓰는 것을 내버려 뒀다.
반면 영주들의 사유 삼림은 매우 빡센 규정이 적용되었다. 게르만족의 전통에서는 사냥은 곧 명예로운 전사의 행위였으며, 사냥 후 고기를 나눠주는 행위 역시 부족장의 권한이었기 때문에, 감히 농노 따위가 숲에 들어가서 사냥하는 것은 영주 입장에서는 죽일 일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들판에서 족제비나 그물 같은 간단한 도구를 사용한 토끼 사냥 등은 밭을 망치는 유해 조수를 박멸하고 농노들의 소소한 부수입을 통해 불만을 부분 해소하는 차원에서 눈감아주거나 대놓고 허가했다. 제대로 된 사냥이 허가된 이들은 소수의 전문 사냥꾼으로, 대신 이들은 영주의 사냥터지기가 되어 사냥터 내 사냥감 개체 수 관리와 경비, 영주의 사냥 시 수행원 역할, 전시에는 평시 연마한 궁술 및 사격술을 활용한 정예 보병으로의 소집과 같은 의무를 졌다.
교회가 세속 영주보다 더 관대한 것은 무려 프랑스 혁명 무렵까지도 유지된 경향이지만, 교회 역시 나름대로 좀 비상식적인 면이 있기도 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 간의 평화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수도원 휘하 장원들은 자기네 예속민이 평시에 무기를 들고다니지 못하게 규정하거나, 너무 사치스러운 무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처벌하기도 했던 것이다. 현대 국가야 행정력 강화와 치안 유지를 위해 일반 시민의 무기 소지를 금하지만, 결투 재판이 법적으로 인정될 정도로 폭력이 만연한 시대에 수도원들의 저런 규정은 세속 영주들에게는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중세 성기 무렵 경제가 발전하고 기계공학이 발전하면서 영주들도 그런 것들을 도입해서 자신들의 수입을 높히려했다. 특히 빵의 보급과 물레방앗간의 등장이 영주에게 짭짤한 수익이 되어줬다. 농민들이 곡식을 제분하여 빵으로 만들어 먹기 위해선 영주들이 직영 혹은 세금을 받고 영업 허가를 내어 준 방앗간과 제빵소를 유상으로 이용해야만 하였다. 이를 이용하지 않고 집 등에서 몰래 제분, 제빵을 하면 중벌에 처해졌다. 농촌에서는 빵을 구울 때 공동화덕에서 몇달에 한번, 심하면 1년에 한번 대량으로 굽기도 했다.
장원은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적 성격이 강했고 도시와의 교류는 매우 적었기 때문에, 공업제품은 거의 영주의 직영 작업장에서 생산되는 물품에 의존했다.
'영주는 농노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말해지는 것 때문에 농노는 병역의 의무를 안 졌을 거 같지만 실제론 그렇게 FM대로 잘 지켜지진 않았다. 위에서도 말했듯 병역의 의무가 없는 것이 원칙인 '법적인 비자유민' 즉 노예, 해방 노예 등과 병역의 의무가 있는 '법적인 자유민'인 콜로누스가 뒤섞이고 서로 통혼하는 바람에 '법적인 자유민'과 '법적인 비자유민'이 구별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기 때문에, 결국 재산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서 무장해서 군사력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이렇게 제약이 많은 삶이나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 살 수는 있게 해주었다. 후술하지만 12세기까지는 유럽의 행정능력은 영 형편없어서, 영주가 영지민들을 지나치게 착취하면 농노들은 그냥 도망쳤다. 영주 입장에서도 지나친 수탈로 농노들이 몰락하거나 반항하는 것은 제살 깎아먹기라서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게 해야 했다. 농민 반란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지고, 적어도 법적으로는 농노제가 철폐된 시대인 14세기 이후에나 잦아지기 시작한다.

5. 벗어나는 방법


사실 12세기까지는 영주에 대한 농노의 예속은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일단 인구 밀도가 너무 낮은 것이 궁극적인 원인인데, 봉건 영주들의 행정능력 자체가 미약해서 영지 내부 관리도 철저하지 못했고, 농노 가족이 야반도주라도 해서 텅텅 빈 땅에 정착해서 살면 못 잡는게 다반사였다.
게다가 농노의 예속은 기본적으로 토지소유에 기반한 것이다. 농노가 영주의 토지를 경작하는 동시에 자기소유토지가 따로 있는 상태라면 깔끔하게 영주 토지에 대한 경작과 영주의 보호 받기를 포기한다면 그는 자유민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반대로 자기 토지가 1도 없고 여러 영주의 토지를 전전하며 경작해야하는 하층민도 많았고 이들은 도주 아니면 예속 신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11세기 들어서는 야만족으로 인한 혼란도 잦아들고, 비교적 평화로워져 인구가 늘자 토지 개간이 활발해진다. 그에 따라 영주의 농노경작지에 대한 소유권을 깔끔히 포기하고 새 토지를 개간하거나, 더 좋은 조건을 내거는 영주의 휘하로 옮겨가는 식으로 해방되기도 했다.
13세기 들어서는 서유럽의 대부분의 토지가 개간되어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영주의 행정적 역량도 그에 따라 강화됨에 따라 농노에 대한 예속이 강화되었고, 이런 강화된 영주 권력과 농노제를 재판(再版) 농노제, 재판 영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차부제나 부제, 사제 서품을 받고 성직자가 되면 영주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저절로 농노의 신분에서 해방된다.
부모가 농노라도 혼외관계에서 생긴 사생아임을 증명하면 농노 신분에서 해방된다. 법이론상으로 모든 인간의 자연 상태는 자유인이며, 상속권이 없는 사생아는 부모가 영주에게 빚진 의무 역시 상속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생아도 여러가지 신분적인 제약이 있고, 상속권에 매우 심한 제약을 받기 때문에 일장일단이 있지만, 실제로 농노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법정에서 스스로 사생아임을 주장한 사례들이 있었다.
북프랑스 보베지 지방의 관습법에서는 농노가 자신의 영주와 결혼한 경우 저절로 농노 신분에서 해방된 것으로 여겼다.
독일 같은 경우 발트해 동쪽의 식민지 개척(동방식민운동)으로 인해 일손이 많이 필요하자 농민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자유로운 신분을 약속하고 사람들을 끌어모으기도 했다. 유명한 하멜른피리부는 사나이 이야기도 젊은이들이 대규모로 동부 식민지로 떠난 것을 모티브로 한다는 설이 있다.

6. 중세 이후



6.1. 서유럽: 쇠퇴


장원 조직의 쇠퇴와 부역 노동의 완화는 이미 12세기에 서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시작되었으며, 농노의 해방은 13세기 중반부터 진행되다가 14세기 동안 완료되었다.[2] 농노제가 쇠퇴한 원인으로 생산력 증대로 인한 무역과 상업의 발달, 관료제 발달, 흑사병 등을 꼽을 수 있다.
중세 전성기에 들어 무역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폐쇄적인 고전장원경제 하에서보다는 상대적으로 계층 이동의 가능성이 높아졌고, 화폐경제의 발달로 장원 내에서도 각종 부역을 세금으로 대체하게 되면서 농노와 자유소작인의 실질적인 경계가 모호해졌다. 1300년경 잉글랜드에서는 농노들에게 강제로 부과된 노역이 영주 직영지에서 행해진 노동의 8%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3]
12세기부터는 국왕의 사법권이 확대되고 법률이 체계화되었다. 결혼에 관해서는 교회법이 게르만법과 로마법의 상위에 있는 최고법으로 인정되었는데, 교회법은 영주가 동의하지 않아도 농노가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3세기 잉글랜드에서 자유민과 농노 사이의 결혼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자유민과 예속민의 이분법으로 사회적 신분을 나누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이런 경향이 지속된 결과, 13세기경의 소송 사례들을 보면 법적으로는 농노 신분임에도 스스로를 예속민이 아닌 자유민으로 여기며 자신에게 세금 이외에는 어떠한 의무도 없다고 주장하는 농민들이 많이 나타난다. 결국 14세기 경부터 잉글랜드에서 농노제는 거의 사문화되었으며, 프랑스에서는 1318년 필리프 5세의 칙령으로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자연법(jus naturale)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유인으로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 왕국에서 오랜 세월 보존된 특정한 전통으로 (중략) 그리고 그들의 선조들의 악행으로 백성들 중 많은 사람들이 노예 또는 그와 비슷한 다양한 예속 상태의 올가미에 걸려있으며, 우리 왕국의 이름이 자유인들(Franks)의 왕국이라는 점에서 이는 우리를 불쾌하게 만든다. 이 명령으로 노예들은 자유를 얻을 것이며 최근에 그렇게 되었건, 오랬동안 그래왔건, 아니면 평생 그랬건 간에 혼인이나 거주지에 의해 예속의 상태에 빠진 사람들 역시 알맞은 조건으로 자유를 얻을 것이다.

필리프 5세의 1318년 칙령

이렇게 해체된 농노제의 자리는 소작제로 대체되었다. 흑사병 대유행 직후 농촌 질서가 재편되던 14세기 중반, 북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1~5년 정도의 소작 계약이 유행했다.
하지만 불법이든 편법이든 가리지 않고 술수를 써서 영주가 농민을 부역에 동원하는 경우는 여전히 많이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자유소작계약인데 관습적인 임금에 훨씬 못 미치는 임금을 주고 사실상 농노처럼 부린다든가.[4] 프랑스의 일부 지방에서는 이런 유사 농노제가 프랑스 혁명 전까지 존속되었다.
14세기 중반에는 흑사병으로 절대인구 자체가 감소하다보니 노동력의 가치가 상승해서 상대적으로 농민들이 유리해졌다. 이에 따라 조건이 불만족스러우면 도주하거나 이주해버렸으며, 영주는 이게 싫으면 부역과 세금을 경감하는 등 유인책을 펼쳐야 했다.
물론 아니꼬운 높으신 분들은 노동자 조례[5], 노동자법 등의 법령으로 규제하려 시도했지만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1381년의 와트 타일러의 난은 비록 무력으로 진압되었지만, 노동조례를 폐지하고 모든 부역을 세금으로 대체하라는 반란군의 요구는 결국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수용되었다.
중세 후기-근대 초기 잉글랜드에서 농노들이 진 의무와 제약은 지속적으로 경감되었으나, 그러는 동안에도 농노제의 공식적인 폐지는 없었다.
13세기의 농노소작지는 농노의 의지대로 양도하거나 매매할 수 있는 재산에 가까웠고, 지역 관습법에 의해 이러한 권리를 보장받았지만, 이론상으로는 영주의 소유였으며 농노들이 가진 권리의 정도는 지역 마다(대표적으로 상업이 발전한 동부와 장원제도의 영향이 남아있는 서부) 차이가 있었다.
1300년경에 보통법의 기준에서 농노가 아닌 자유민으로 분류되는 농민 인구가 거의 절반 또는 과반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14세기의 농노들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증명하는 등본을 발부받았다.
15세기에 과거의 농노소작지의 후신인 등본보유권 토지(copyhold land)는 자유소작지보다 비싼 지대를 내야 하고 차지취득세를 징수할 권리 등이 영주에게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확실히 소작인의 재산이 되어 있었고, 등본보유권 소작인들도 국왕 법정에 자신의 영주를 고소할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농노제는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1922년 재산법(Law of Property Act 1922)으로 등본보유권이 폐지되면서 농노제의 옛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6.2. 동유럽: 재판(再版)농노제


그러나 동유럽/남유럽과 달리 '''농노제가 오히려 강화되었다.''' 독일의 동방식민운동으로 개척된 북동부나, 그보다 동쪽은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의 수가 압도적이어서 사회적 변동도 적었고, 도시의 발달도 미약해서 농민들의 억압이 심해져만 갔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 일단 절대적인 자유민의 수 자체가 비교적 적었다.[6]
  • 전통적으로 동유럽은 타 유럽지역에 곡물 수출을 해왔는데, 이것은 동유럽 쪽에는 상업자본이 발달하는 기회가 상실되고,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에게 경제적 주도권이 주어지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 위 두가지 이유로, 도시들이 발달하지 못했다. 또 귀족들은 도시들에 끊임없이 견제를 해서 발달을 방해했다. 한자동맹으로 대표되는 해안 도시들은 경쟁에서 패배하여 쇠퇴했다.
  • 반면 서유럽은 동유럽에서 유입되는 곡물로 인해 곡물가가 하락했고, 서유럽의 토지 귀족들은 장원의 경제적 가치가 하락했지만 도시들은 귀족에 대한 식량 의존도가 줄어들었다. 이것은 서유럽의 도시가 발전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동유럽을 '서유럽 최초의 식민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 수백년이 지나며 인구가 늘고 한계지(限界地)[7]까지 모조리 경작한 서유럽과 달리, 동유럽은 아직 경작할 토지가 방대하였다. 유럽 지도를 펼치면 러시아 쪽으로 땅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럴 때 해결책은 좋은 조건을 내걸어서 외부에서 인구를 들여오거나, 아니면 기존의 농부들을 더 착취하는 것 둘 중 하나였다. 외부 이민은 당연히 그만한 메리트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특권을 양보해야 했고, 동유럽의 사회적 경제적 주도권을 둘 다 쥐고 있던 귀족들은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다.
이런 이유로, 13~15세기 이후 서유럽은 도시와 왕이 결탁해서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과 도시 경제와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하지만, 동유럽은 강력한 귀족 세력이 사회 주도권을 계속 가져 왕권의 발전도 미약하고 상공업과 자본주의 등에서도 서구에 비해 뒤쳐지게 된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19세기까지 농노제가 존속했으며, 산업 혁명의 바람이 불어 많은 채광 회사들이 우랄 산맥에 생겨나자 땅이 아니라 기업이 농노를 소유하는 변질된 형태의 농노제도 생겨났다.[8]
이 농노제가 끝나는 시점은 알렉산드르 2세 6년인 1861년에 발표된 농노해방령이었다. 그러나 농노해방령은 토지 분배가 매우 부실하게 진행되었고, 기만이나 다름 없는 농노해방령으로 인해 농노해방이 이뤄진 약 4천만의 러시아인들은 대다수 이름만 다를 뿐 자유민이 아니라 극심한 경제난과 빚에 허덕이는 농노가 되었다. 이러한 나날들이 4 ~ 50년 가까이 되면서 불만은 점점 쌓여서 20세기 극초반, 결국 사회주의를 들고 일어나 차르에게 반기를 든 사상가들과 이에 동조한 인민들의 형태로, 볼셰비키란 이름으로 폭발하게 되었고, 원한이 쌓일대로 쌓이고 속을대로 속았던 농민들은 황족과 귀족들을 프랑스 혁명 이후 자코뱅당 이상으로 닥치는 대로 죽여버렸다[9]. 러시아에서 먼저 공산주의가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농노제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00년대 초에야 역사적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7. 유사 개념



7.1. 소작과의 차이점


소작과 흔히 헷갈리곤 한다. 사실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소작제로 서서히 변환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제로 경계가 흐릿한 것이기도 하다.
다만 농노제는 게르만의 관습법인 종사제에 기반한 종속 관계가 섞여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농노제에서 소작제로의 전환은 단순 화폐 경제의 발달만이 아니라 자유민과 자유민의 계약에 기반하는 로마 보편법의 발전이 병행되어야 했다. 소작은 어느 때건 한측에서 계약 관계를 폐지한다고 선언하면 폐지가 가능하다. 농노제는 종속 관계가 세습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영주측이 농노에 대한 사법적 관할권을 지닌다고 간주되었다. 지주가 소작농에게 잡일을 시키는 것은 그냥 갑질이지만, 영주는 농노에게서 부역이나 세금을 물리는 것이 합법이었다.
다만 대지주-소작농 관계가 실제로 저렇게 상호 신의성실한 관계인 경우는 비서구 서구를 막론하고 별로 없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 후기 소작농 생애나 일제 시대 지주들의 만행을 보면, 지주들이 소작민에 대한 만행을 부리는게 영주랑 별 차이 없다는걸 느낄 수 있다. 농사란게 한번 시작하면 수확할 때까지 결과가 안 나오는 것이다보니 쫓겨나는 쪽만 극심한 손해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공산주의자들이 소작제를 봉건적인 제도라고 비난하며 토지 개혁을 추구했을까.
이탈리아 지역, 특히 교황령에서는 고대 로마의 제도와 법적 규칙이 계속 유지되어서, 농노제가 아닌 고대 로마식 소작제도가 8세기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7.2. 노예와의 차이점


농노는 예속된 처지지만, 노예들과는 비교되는 차이점도 있었다.
  • 농노는 결혼하여 가족을 꾸릴 수 있다. 유럽에서 초야권이 있었다는 오래된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인신구속을 확인하는 세금 개념이었다.
  • 농노는 개인 주거지를 소유할 수 있다. 다만 주거지는 영주의 땅 내부로 제한한다.
  • 농노는 개인적인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
  • 영주는 농노만을 단독으로 매각할수 없다. 다만 러시아에서는 노예처럼 매각, 양도, 교환이 가능한 관행이 있었다.
  • 농노는 토지에서 나오는 작물을 소유할 수 있다.
  • 농노는 수확물 등 각종 물품을 영주에게 일부를 바치므로 납세의무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노예는 모든 생산품을 밥 빼고 주인에게 뜯기므로 납세로 볼 만한 의무가 없다.

7.3. 노동자와의 차이점


산업혁명 시기 농노의 자리를 메꾼 노동자들은 이전까지 있던 각종 관습(법)과 중세시대 법이 공장주를 비롯한 사용자들이 거추장스럽게 여겨 대부분 폐지해버렸다. 공장제 수공업을 운영할 때는 노동자들이 생산품 일부를 가져가서 따로 팔 수 있는 관습이 있었으나 산업혁명으로 공장제 대규모 기계공업시대에 이르자 공장주들은 이를 절도로 간주하고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근대 초기 노동자들은 농노보다도 대우가 나빠졌다. 이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
말하자면 농노는 사회적 상한선과 하한선이 있었다면, 노동자는 둘 다 없었다고 볼 수 있었다. 농노보다 출세할 가능성은 크지만 농노보다 폭망할 가능성도 크다는 것.

8. 기타


오래된 루머인 '초야권'도 실제로는 '농노들은 결혼하려면 영주에게 결혼세를 내서 허락받고 해야 한다' 정도의 규칙이 부풀려진 헛소문이다. 예를 들면 "결혼세로 은화 10개를 내거나 첫날밤을 영주에게 바쳐야 한다." 같은 식이다. 마누라 뺏기기 싫으면 돈내라는 얘기인데, 누가 결혼세 아낀다고 첫날밤을 바칠까.. 즉 명목상의 규칙일 뿐이었다. 초야권 빌미로 신부들을 희롱하다가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킨 사례가 유일한 초야권 기록이다. 게다가 연구가 더 진행되면서, 이런 식의 명목상의 규칙조차 존재했는지도 의문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초야권 문서 참조.
참고로 유럽처럼 봉건제 국가였던 에도시대 일본 역시 농노제 사회와 비슷한 부분이 많이 있었다. 에도 시대 일본의 농민은 자유로운 이주가 불가능했고, 쌀로 세금을 납부하고 고구마감자를 많이 먹었다. 링크 또한 조선시대 노비의 경우도 노예보다는 농노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보는 편이다. 이영훈 교수의 반박 조선의 노비제 숙의

9. 같이 보기


[1] 상기했듯 8세기 이전까지 신분적으로 같은 유래를 가진 이들도 시간이 흐르면 일부는 농노 계층이 되버리고, 일부는 기사 계층으로 나뉘게 된다. 똑같이 어느 영주에게 종사 계약을 맺어 예속민이 되었어도 무기를 가져 전투에 치중한 직업을 가진 덕에 상위 계층으로 올라간 것.[2] Karl Gunnar Person, <유럽 경제사>[3] Christopher Dyer, ''An Age of Transition?: Economy and Society in England in the Later Middle Ages'', 90.[4] 이는 자유로운 고용 관계가 확립된 현대사회에서도 상사 집에서 김장 담근다 하면 가서 일해주는 것을 보면 이해가 빠르다.[5] 흑사병이 한창 유행한 1349년 6월 제정된 영국 왕령. 품삯과 노동조건을 흑사병 유행 이전으로 동결하려 하였다.[6] 논란이 있는 가설로 동방식민운동으로 유럽에 편입된 이래로 동유럽의 대부분의 민중인 슬라브족/발트족은 거의 다 농노로 편입되었고, 극히 일부 자유민과 귀족들은 거의 다 서유럽에서 유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다른 의견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같은 경우는 폴란드계와 리투아니아계, 루스계가 귀족의 대부분을 이루었고 독일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폴란드계 귀족에 동화되었다. 독일계는 오히려 상인과 기술자로서 활약했다.[7] 아주 쉽게 말하면 한 시대의 농경기술로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농지를 말한다.[8] 유사한 사례로 남북전쟁 이전 미국에서는 노예를 농장이 아니라 공장에 보내는 일이 잦았다.[9] 그래서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도 대대로 물려받은 작위를 공식 석상에서도 자칭하는 것을 1970년대까지 용인받을 만큼 귀족들의 영향력이 셌던 프랑스와는 달리,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혁명소련 출범 직후에 해외로 망명한 극소수를 제외하면 귀족의 씨가 말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