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관영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오관영은 1901년 2월 8일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 관북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평양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5월 3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형 70도에 처해졌다. 이후 1921년 9월부터는 동지 조형섭(趙亨燮)과 공모하여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 발행한 항일문서와 탄환을 가지고 군자금 모금에 진력하였다. 같은 해 10월 1일 평원군 양화면 옥정리에 사는 김병건(金炳健)에게 군자금 300원을 출연(出捐)하지 않으면 사형선고장을 발하겠다는 급고경고문(急告警告文)을 발송하였다. 이어 같은 달 10일에도 순안면 사직리의 김병룡(金炳龍)에게 역시 같은 방법으로 군자금 4백 원을 청구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순안면 택엄리에 거주하는 석근옥(石根玉)과 신안리의 김학용(金學鏞)에게도 경고장을 발송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다가 1921년 11월 초순경 동지들과 함께 순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후 1922년 3월 1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공갈미수 및 총포화약령 위반으로 징역 3년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 등지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지속하다 병을 얻어 1936년 귀향했고 한달 만인 1936년 10월 3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오관영의 독립운동 행적은 오랫동안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단 이유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2년 오관영의 아들 오준식 씨가 부친의 독립운동 행적을 동아일보 1921년 11월 30일자 기사와 12월 1일자 기사 등에서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 이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오관영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5년 국립대전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