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구라 신페이
1. 개요
小倉 進平
1882년 6월 4일 ~ 1944년 2월 8일
일본 출신 언어학자이다.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였다. 1924~1926년에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유학하였고, 돌아와 1926년 경성제국대학에서, 그리고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도쿄 제국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국 한자음인 '소창진평'으로도 알려졌다.[1] 국어학을 가르치는 사람마다 이 사람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데, 오구라 신페이라고 일본어 원음으로 부르기도 하고 소창진평이라고 한국 한자음으로 부르기도 한다. 두 이름 모두 동일인을 지칭하니 착각하지 말자.
2. 영향
소개만 보면 식민지 조선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평범한 일본인 학자처럼 보이지만, 이 사람이 근현대 국어학에 미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던 1920년에 《조선어학사》(朝鮮語学史)를 펴냈고, 교수로 재직하던 1929년에는 한국 고전문학에 대한 연구인 〈향가 및 이두의 연구〉(鄕歌及吏讀의 硏究), 1944년에는 《조선어 방언의 연구》(朝鮮語方言の研究)를 펴내었다. 한국의 국어학과 고전문학을 연구하여 성과를 낸 학자이다.
오구라는 조선총독부로부터 후원을 받아 한국어를 연구하였다. 총독부는 다양한 학술영역에서 한반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식민지배에 활용하였다.
초기연구라는 한계 때문에 오구라의 연구는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일반적이다. 방언 연구의 경우, 오늘날에는 방언의 특성상 음운에 훈련된 전문가가 현지에서 직접 자료를 수집하기가 보통이지만, 오구라 신페이는 각지의 교사나 지식인에게 우편으로 자료수집을 의뢰하고, 그들이 보내 온 간접자료로만 연구하여 신뢰성이 떨어진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오구라 이후로 전국적인 방언조사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오구라가 만든 방언지도를 사용한다.
향가 등 고전문학 연구에도 족적을 남겼다. 의외로 향가의 초기연구는 조선인 학자보다는 일본인 학자가 주도하였는데, 향가의 특징인 향찰과 일본의 만요가나가 유사하다고 관심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본래 언어학자인 양주동 박사가 향가를 비롯한 고대문학을 연구한 계기가 오구라 신페이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인데, 민족의 옛 문학을 연구한 사람이 일본인이란 사실에 반발심을 느꼈다는 카더라가 있다...
오구라 신페이의 연구는 70년 전 결과물이기도 하다 보니 오늘날에는 많은 부분이 사장되어 대체되거나 보충되었다. 하지만 근대학문으로서 국어학의 초기연구성과까지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오구라의 이름은 국어학이나 한국 고전문학 입문서나 개론서에 오늘날 까지도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1] 그 예로 小倉進平'''과''' 國語音韻論이라는 2009년에 출판된 책이 있다. 만약 저 이름을 '오구라 신페이'라고 읽었다면 조사가 '과'가 아니라 '와'여야 하는데, '소창진평'으로 읽었기 때문에 '과'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