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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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일화
4. 교과서 수록


1. 개요


梁柱東
1903년 8월 16일 ~ 1977년 2월 4일
대한민국시인이자 국문학자, 영문학자이다. 호는 무애(无涯).

2. 생애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중동고등보통학교(현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본래 영문학 전공이었으나 시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 때문에 당시 유행하던 문학 동인지 활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국문학계에 발을 들였다. 카프가 등장하여 계급 문학론과 민족 문학론으로 문단이 나뉘었을 때, 염상섭과 더불어 절충론적 입장을 취했다. 1930년에 시집 '조선의 맥박'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는 문인으로서보다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더 큰 명성을 떨쳤다. 특히 한국 고대시가 연구에 불을 댕긴 시조격으로 그 중에서도 향가 연구의 권위자이다. 그에 앞서 향가를 해독, 연구한 것은 1929년 오구라 신페이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뿐이었는데,[1] 194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를 해독한 '조선고가연구'를 펴냈다. 이후 김완진, 황패강, 서재극, 김동욱, 유창균 등이 향가 연구를 이어갔으나, 현재 국어 및 문학 교과서에 실린 향가 해독문의 대부분은 여전히 양주동의 것일 정도로 그의 그늘이 크다.[2] 1947년에는 고려 속요를 연구한 '여요전주'를 저술한 바 있다. 전해진 여요가 모두 수록되어 있으며 한 글자씩 그에 맞는 해석과 주석을 붙인 여요마스터본이다. 그만큼 내용도 많은데다가, 세로쓰기로 기술되어 있고, 온통 한자라는 점에서 읽기에는 어렵기 그지 없으나 국문학도라면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2탄으로 향가를 다룬 '사뇌가전주'[3]도 있는데,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친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작품들이 모두 들어가 있다.
1947년 동국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김구가 세운 건국실천원양성소 강사로도 활동했다. 1954년 대한민국 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이후 학계와 방송계 등 다방면에서 활동을 벌이다 1977년 2월 4일 오후 5시 경, 한일은행 청계지점에 들렀다가 뇌졸중으로 졸도하여 인근 백병원으로 이송되던 도중 숨을 거두었다. 향년 74세.

3. 일화


생전 조선 최고의 천재 중 하나로 칭송 받았던 만큼 그 스스로도 상당한 나르시시스트였던 모양으로, 자신을 조선 국보 1호로 자칭하기도 했다. 일화로 서울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는 기사한테 "국보가 탔으니 조심히 운전하시오" 라고 말했다고(....)
오대산에서 탄허 스님에게 장자 강의를 들었다. 10살 연상인 양 박사에게 탄허는 먼저 절을 올렸었다.
애주가로도 소문났는데, 한번은 벗과 부산 여행을 가서 숙소에서 짐을 풀자마자 맥주 한 상자를 그자리에서 비우고, 또 밤바다 경치를 보면서 그 자리에서 맥주를 계속 마셨다고 한다.
1964년 첫방송 시부터 일생 동안 동아방송(DBS)의 히트 프로그램 이던 '''유쾌한 응접실'''[4]의 고정 패널로 출연했다. 당대 지식인들과 연예인들을 초청해서 주제에 맞는 대화를 나누고 노래도 듣는 교양 예능 프로그램 이었는데, 양주동은 특유의 언변과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어려운 화제를 쉽고 즐겁게 풀어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양주동이 작고한 다음 날, 유쾌한 응접실 제작진은 생전 그의 활약상을 묶은 추모 특집을 방송했다.
지금도 동아일보 사이트의 데이터 베이스에는 당시 방송분의 오디오 파일이 저장되어 있다. 물론 같이 출연했던 몇몇 연예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인물은 현재 고인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대학가 유머로 퍼져 있는 '선풍기 채점' 설화의 주인공이다. 답안지를 쌓아놓고 그 앞에 선풍기를 틀어놓아 더 많이 날아갈수록 점수를 깎았다고 하는데, 이유는 종이의 무게는 똑같으니 많이 적을수록 잉크가 많이 묻어있어 더 무거우니 덜 날아간다는 것이다. 이는 학사관리가 허술했고 대학만 나와도[5] 취업이 쉽게 이뤄지던[6] 1960년대여서 가능했던 이야기이다. [7]
어려서 부모를 모두 여의었다. 이는 그의 수필 '질화로'[8]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5세 때 아버지를, 12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가 '어머니의 마음'[9]이라는 노래를 작사한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4. 교과서 수록


2009 교육과정 문학 교과서(천재교육, 정재찬[10], 류수열[11], 유성호[12], 김외곤[13] 외)에 그의 '몇 어찌' 일화와 수필 '면학의 서'가 실렸다.
[1] 이뿐만 아니라 국어사의 현대적 연구의 시초격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이외에 경성제국대학 교수 시절 이희승, 이숭녕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죽어서도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의 떡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2] 향가의 예를 들면, 현재 전해지는 향가의 '''70%'''를 양주동 박사가 해석하였다! 양주동 박사의 해석 이후 추가로 더 해석된 것은 기껏해야 전체 향가의 1~20% 정도라고... 향가 해석의 방법을 제시한 것도 양주동 박사였다.[3] 사뇌가는 향가의 다른 말인데, 향가라는 표현이 사대주의적 성격이 짙기 때문에 양주동이 사뇌가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지금도 사뇌가가 맞는지 향가가 맞는지는 국문학계의 화두.[4] '사랑'편에서는 20대의 엄앵란이 게스트로 나왔는데, 사회자가 언제 사랑을 느끼냐고 물어봤더니 "일식집에서 '''전복'''을 먹을 때 사랑을 느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이 전복에는 중의적 의미가 들어가 있다.'''(링크 클릭 시 후방주의)'''[5] 1960년대 당시까지는 초등학교만 다니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고등학교는 커녕 중학교 진학률도 50%선을 간당간당하게 넘었을 정도로 중등교육이 보편적이지 않았으니 자연히 대졸은 희귀했던 시절이었다. 대졸자가 넘쳐들어서 대졸실업이 문제가 되는 21세기의 대한민국과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6] 이 때는 학사경고를 받아도 웃어넘기던 시절이다.[7] 이 설화를 당연히 몰랐겠지만 훗날 이걸 역으로 이용해 멀리 날아갈수록 승진시킨 회사도 등장했다.[8] 200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 수필 기출 지문이다.[9]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라는 첫 소절로 유명한 바로 그 노래이다.[10]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전 청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시를 잊은 그대에게로 유명한 그분 맞다.[11]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전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12]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13]상명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 201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