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
1. 개요
鄕歌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초중기까지 창작된 문학 형식의 하나로 주로 신라 때에 창작되고 향유되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향찰로 표기된 국문학으로 삼국 말 부터 고려 전기까지 향유된 길이에 따른 3가지 분류로 나뉘는 문학이다. 워낙 적은 수의 작품만이 남아 있어 향가의 분류를 확장하여 신라시대에 향유된 모든 노래를 향가로 취급하려는 학자도 있으나 이럴 경우 장르 구분의 의미가 없어지기에 아직까지는 작품 수가 적더라도 위의 조건을 갖춘 작품만 향가로 취급하고 있다. 신라 때에 민담 중 일부를 시로 옮긴 것에서 시작하여 고려 전기까지 이어졌으나, 중국에서 직수입된 한문이 점차 지배계급을 중심으로 일상화되면서 한시에 밀려서 점차 사라져갔다.[1]
다른 한편으로는 향가의 '향(鄕)'이 지역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 사대주의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하며, 순우리말을 음차한 사뇌가(思腦歌)(사내가, 시뇌가)라는 표현을 해당 장르의 이칭으로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사뇌가에 대해서는 향가와 동의어가 아니라 향가의 하위개념인 한 장르[2] 나 작품명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다.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향가이다.)
향가를 적는 방식은 향찰(鄉札)로, 한자를 빌려와 우리나라 문법에 맞게 음차(주로 문법형태소)와 훈차(주로 실질형태소)를 뒤섞어 쓰는 방식을 사용했다. 아래 처용가의 2구를 예로 들면, '동경(東京)', '명(明)'은 훈으로 읽어서 각각 '새벌(서라벌)', '밝-'이라고 하지만 '기(期)', '량(良)'은 조사이기 때문에 음으로 '긔(은)', '래(에)'라고 읽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향가는 《삼국유사》에 14수, 고려의 승려 균여가 지은 《균여전》에 11수, 장절공신선생실기에 1수로 총 26수가 남아있다. 신라 진성여왕 때 각간 위홍이 당시의 향가를 집대성하여 《삼대목(三代目)》을 지었다고 하지만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물론 신라시대 당시에는 훨씬 많은 향가가 있었을 것이고, 양산가(陽山歌)처럼 가사가 전하지 않고 제목과 유래만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 발견된, 신라의 김대문이 지었다고 하는 《화랑세기》의 필사본에 기록된 향가 2수가 있으나, 《화랑세기》필사본은 위작성이 강하여 아직 향가의 자료로서는 본격적으로 포함하지 않는다. 이외에도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신축부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 우물에서 수습한 목간에 쓰인 향가 1수를 발견했다고 하나, 과연 향가가 맞는지 논란이 끝나지 않아 2017년 현재 공식적으로 현전 향가를 말할 때 아직 논하지 않는 편이다.기사링크
2. 연구사
향가는 조선시대를 지나서 일제강점기가 되도록 한국인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향가를 처음으로 언어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일본인 학자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沢庄三郎, 1872-1967)[3] 였다. 일본인들이 향가에 처음 손댈 수 있었던 이유는, 향가의 표기 방법인 향찰이 일본의 만요가나[4] 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만요가나는 겉보기에는 일반 한문같지만 음으로 읽는 글자와 훈으로 읽는 글자가 섞여서 그 해석이 매우 까다로웠다. 만요가나는 에도 시대 학자들도 깊이 연구하였으므로, 일본인 학자들은 여기에 익숙했다. 따라서 이들은 향찰도 비슷한 방법론으로 접근하였다. 가나자와는 향가 중 <처용가>를 처음으로 해독하였고, 그 이후로도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864-1946) 등이 일부 향가들을 해독하였으며, 1924년에 일본의 조선어 연구자 오구라 신페이의 저서 《향가 및 이두에 대한 연구(郷歌及吏読の研究)》에서 최초로 향가 전체를 해독하였다.
한국인 학자 양주동은 여기에 자극받아 1944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모든 향가에 대한 주해서인 《고가연구》를 발표했다. 이 책은 1964년에 내용 일부가 수정되어 《증정 고가연구》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이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수많은 한국학자들이 향가 해독을 시도하며 이전 설에 대해 수정을 가하였으나, 현재 교과서에 올라올 정도로 유명한 것은 양주동과 더불어 1980년에 김완진이 발표한 《향가해독법연구》 정도이다. 근래에는 한자음 연구자 유창균이 《향가비해》(1994)를 발표하였는데 제법 권위를 인정받는다. 이와 별도로 북한에서는 홍기문[5] 이 《향가해석》(1956)이라는 책을 펴내어, 독자적인 향가 해독을 했다.
3. 역사와 특징
향가는 고유문자가 아닌 중국어를 쓰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인 한자를 통해 고유어를 적어야만 했던 한계성과 향찰표기 전통이 오랫동안 단절된 점 때문에 해독이 극도로 난해하다. 더불어 전해지는 작품 수가 매우 적어 온전한 연구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로 인해 학자에 따라서는 아예 향가의 전체적 의미마저 완전히 상반되는 결과를 내놓는 상황에 있다. 이 점은 앞으로 계속 연구하여 극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향가를 해독하는 의미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예컨대 근대의 몇몇 시만 하더라도 단어의 난해한 의미 맥락 때문에 해석이 분분한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 해독이 쓸모 없다고 말할 수 없듯이, 향가 해독 역시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향가는 한반도의 노래 행위가 구술행위 중심에서 문자로 넘어오는 시기에 탄생한 작품이다. 한문을 이용해 우리말을 기록하는 방식이 점차 발달하였고, 비가악계 노래 향유 전통이 점차 발달하면서 이를 기록할 필요성이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기층민 사이의 민요적 특징을 가진 향가와 지배층 사이의 서정적 특징을 가진 향가가 따로 발달하다가 점차 하나의 장르로 굳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본격적으로 8세기에 들어서며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루어졌고, 향가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현재 전해지는 신라시대 향가 14수 중 8수가 이 시기에 창작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활발한 향유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이 때 4구체 향가가 지배층으로 확대(예시: 도솔가)되고, 10구체 향가가 기층민으로 확대(예시: 도천수대비가)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시간 흐르고 9세기 이후 '처용가'를 제외하면 제목만 전해지는 부전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이 때 부터 서서히 활력을 잃었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진성여왕이 앞서 말한 삼대목을 편찬한 것을 생각한다면 당대 주류 문학 장르의 지위는 잃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라 왕조가 끝나고, 고려 왕조가 성립하였다. 문화적으로 크게 다른 왕조는 아니었기에 향가 향유 문화가 급격하게 단절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점차 한문의 유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며 주요 창작 계층이 향가 대신 한시를 주로 창작하면서 대중적인 영향력이 감소하였다. 종국에는 기층민은 구전에 의존하고, 왕실[6][7] 과 불교계에서만 드문드문 사용되는 장르로 전락하였고, 고려 중엽부터는 자료가 남지 않은 것을 보면, 이 무렵부터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3.1. 4구체 향가
민요라고 하면 구비되는 문학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일반 서민들의 소박한 염원이나 감정이 담겨있고 일종의 주술적 성격도 담겨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동요'와 '풍요'는 동요와 노동요의 성격이 기반이 되고 있으며, 두 노래 모두 주술적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는 시각이 있다. '헌화가'와 '도솔가'는 서사문맥과 긴밀히 연결되는 창작성을 가지고 있으나 역시 민요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주로 기층민이 향유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외에도 서정시로의 성격이 조금 약한 것이 특징이지만 통일신라 시기에는 '도솔가' 등 분명한 역사적 인물이 창작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봐서는 지식인 계층으로 향유가 넓어졌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3.2. 8구체 향가
8구체 향가는 딱 '모죽지랑가', '처용가', '도이장가'의 3개만 전해지는 데다가 내용적으로 긴밀한 특징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모죽지랑가는 10구체 향가의 전통을 이어 받아 만든 작품으로 이해하고, 처용가와 도이장가는 4구체가 2연시로 작성된 작품으로 이해하여 분류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크게 4구체 계열 향가를 민요계 향가로, 10구체 계열 향가를 사뇌가계 향가로 보아 연구를 진행하기도 한다.
3.3. 10구체 향가
공동이 창작하는 민요적인 특정이 아닌, 개인이 창작하는 서정적 특징이 두드러지는 작품이 많다. 누이의 죽음을 애도하며 종교적 승화를 이뤄낸 '제망매가'가 대표적으로 종교적 혹은 정치적 색채와 더불어 서정성이 담겨 있는 특징이 있다. 짧은 작품들에 비해 형식적인 구조(전절-후절-낙구의 3단 구조)가 잘 짜여져 있어 시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으며, 승려와 화랑 등 상류층 계급이 주로 향유했을 가능성이 높은 작품들이 많다. 다만 '원왕생가'나 '도천수대비가' 등 불교 신앙에 충실한 작품이나 주술적 느낌이 있는 작품이 후반에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는 기층민들도 후대에는 10구체 향가를 향유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4. 현전 작품
4.1. 삼국유사 수록
4.2. 균여전 수록
- 보현십원가
- 광수공양가
- 보개회향가
- 상수불학가
- 수희공덕가
- 예경제불가
- 참회업장가
- 청불주세가
- 청전법륜가
- 칭찬여래가
- 항순중생가
- 총결무진가
4.3. 장절공신선생실기 수록
- 도이장가
4.4. 기타
- [9]
- 풍랑가[8]
- 청조가
- 목간 기록 발굴
- 가칭 만신가 : 위작 논란은 없지만, 향가가 과연 맞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고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것이라 보통 현전 향가 목록에서는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 악학궤범 수록
- 정과정 : 도이장가는 향가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나 정과정은 10구체 향가와는 달리 감탄사의 위치가 바뀌었으며 내용상으로 격조가 다소 떨어지는 면이 있다 하겠다. 다만 고려가요 중 작가가 알려진 유일한 작품이며, 유배문학의 효시이기도 하고 연군가의 조상격인 작품이기도 하다.
[1] 조동일,'한국문학통사1',지식산업사,2005[2] 이 경우 주로 10구체 향가를 뜻한다.[3] 한국어 연구에 대단한 공헌을 하기는 했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절대 좋게 볼 수 없는 인물로 이 사람의 연구가 일선동조론의 합리화에 쓰였다.[4] 고대시가를 모은 만요슈(만엽집)에 쓰인 가나로서, 현재 쓰이는 가나(문자)가 아니라 한자를 그대로 써서 일본음을 나타내었다.[5] 벽초 홍명희의 아들이다. 국사학계에서는 북한판 조선왕조실록인 '리조실록'번역팀의 총책임자로 유명하기도 하다.[6] 현화사비 기록엔 현종은 사찰을 완공하자 '직접' 향풍체(鄕風體)로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아마 우리말로 가사를 쓴 향가인 듯 한데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신하 11명에게도 완공을 축하하는 시뇌가(詩腦歌)를 쓰게 해 나무판에 새겨 법당의 바깥에 걸게 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7] 예종은 도이장가, 뻐꾸기 등 향가를 만들었다.[8] 또는 송출정가(送出征歌)라고도 한다. 이 명칭들은 정연찬 서강대 교수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한편 송사다함가(送斯多含歌)라고 부르기도 한다. 참고[9]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위서#s-1로 보는 시각이 강하며 국문학계의 입장은 해당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