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찰
1. 개요
향찰(鄕札)은 한자의 음과 뜻을 활용하여 한국어를 표기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주로 신라 시대 향가에 사용되었다. 한자를 차용하였지만 그 당시 쓰였던 말을 정교하게 적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삼국시대 때부터 쓰였다.
이두나 구결에서는 그 어순의 차이가 있을지언정[1] 한문 원문의 실질 형태소는 음독하고 조사, 어미와 같은 형식 형태소만을 차자 표기법으로 읽은 데에 비해,[2] 향찰에서는 어순이 '''우리말 어순'''임은 물론 체언, 용언 어간과 같은 '''실질 형태소'''까지 차자 표기법을 동원하여 읽었다. 즉 표기만 한자일 뿐 가장 완전한 당대 한국어 문장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일반적인 이두보다 더 많은 정보를 함축한 만큼 이두에 비해 해독이 어렵다. 적어도 구한말까지 실용문자로 잔존한 이두와는 달리 향찰은 길어야 고려 초기까지만 사용한 탓에 단절된 기간이 매우 길다. 그래서 음독과 훈독을 구분하기가 이두보다 훨씬 힘들다. 게다가 지금까지 전해지는 기록 중 향찰로 기록된 자료 자체도 매우 적다. 향가 연구가 어려운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일본에서 한자를 이용해 일본어를 표기하던 방식인 만요가나와 많이 비견되는 표기법이며, 향찰과 만요가나의 유사성이 일본의 학자들이 향가를 처음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 예시
향가 〈서동요(薯童謠)〉를 통해 향찰 표기례를 살펴보자. 참고로 해석은 양주동의 설을 따랐다.
실질 형태소 'ᄂᆞᆷ'은 '남 타(他)'로 쓰고 석독자로 읽었다,〈서동요〉 원문: 他 密只 嫁良 置古(ᄂᆞᆷ 그ᅀᅳ기 얼어 두고)
〈서동요〉 해석: 남 그윽히(몰래) 얼어(결혼해) 두고
실질 형태소 '그ᅀᅳ-'는 '그윽하다(≒은밀하다) 밀(密)'로 쓰고 석독자로 읽었다.
형식 형태소 '-기'는 '다만 지(只)'로 쓰고 음가자로 읽었다.[3]
실질 형태소 '얼-'[4] 은 '얼다(≒시집가다) 가(嫁)'로 쓰고 석독자로 읽었다.
형식 형태소 '-어'는 '어질다 량(良)'[5] 으로 쓰고 음가자로 읽었다.
실질 형태소 '두-'는 '두다 치(置)'로 쓰고 석독자로 읽었다.
형식 형태소 '-고'는 '옛 고(古)'로 쓰고 음가자로 읽었다.
그러나 향찰은 어디까지나 신라 고유의 시가 갈래였던 향가 전용 표기법이었기에 신라 멸망을 기점으로 쇠퇴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여 고려 중기부터 사용자가 급속히 줄었고 고려 말기 들어와서는 완전히 사장되었다.
[1] 상술하였듯 이두에서는 한국어 어순, 구결에서는 한문 어순[2] 물론 석독 구결에서는 실질 형태소도 뜻으로 읽었다.[3] 고대국어에서 支, 只 등은 '''기'''로 음독한다. ('김무림-고대국어 한자음에서 3등갑을, 위국봉-‘只'와 ‘支'의 음독에 대하여, 최중호-고대국어에 사용된 장계자(章系字) 한자음의 음가 고찰 -"지(只)" "지(支)"를 중심으로' 등을 참고할 것)[4] '얼다'는 '결혼하다, 남녀가 관계를 맺다'는 의미이다. '어른'이 '얼은'에서 나왔다.[5] 당시에는 '량'이 아니라 '아, 어'로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