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만
1. 개요
일제강점기 처음엔 한국의 항일운동가였으며, 이후 중국공산당 및 조선공산당 산하 조직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오기만은 1905년 8월 21일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연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제2학년을 수료한 후 면학을 목적으로 수 차례 중국을 왕래하면서 민족운동가들과 교유하였으며, 1928년 4월 16일 신간회 배천지회 설립대회 당시 준비위원으로 홍세혁(洪世赫) 등과 함께 격문을 배부하려다 연백경찰서에 체포되어 해주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1929년 1월 홍남표(洪南杓)의 권유로 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에 가입하였고, 동년 겨울 홍남표, 김형선(金炯善), 구연흠(具然欽) 등과 함께 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를 해체하고 유호한인독립운동자동맹(留滬韓人獨立運動者同盟)을 결성하여 민족운동 기념일마다 재류한인들에게 격문을 반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구연흠, 조봉암 등과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여 청년반제상해한인청년동맹(靑年反帝上海韓人靑年同盟)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들은 중국공산당민족위원회 산하 청년반제대동맹에 소속되어 있었다.
1931년 6월 상하이에서 김단야로부터 국내의 김형선과 협력하여 적색노동조합(赤色勞動組合)과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재건명령을 받고 귀국하여 동년 7월 경성에서 김형선을 만나 협의한 결과 함남 진남포에서 활동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이에 그는 1932년 1월 진남포로 갔고, 한국형(韓國亨), 심인택(沈仁澤) 등과 함께 적색노동조합 결성을 기도하여 동년 10월 적색노동조합부두위원회(赤色勞動組合埠頭委員會)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진남포상공학교(鎭南浦商工學校) 적색비밀결사(赤色秘密結社)를 조직하였고, 평양에서는 면옥노동자총파업을 선동하는 등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1933년에 상하이로 이동한 뒤 코민테른 원동부에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나 1934년 4월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 국내 경기도경찰부로 압송되었다. 동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중병으로 인해 1936년 6월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1937년 8월 23일에 사망했다.
3. 기타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오기만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망우역사문화공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고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691-4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