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준
1. 영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오석준(吳錫浚)은 1876년 12월 24일 경상도 영양현 청초면 청기동(현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청기리)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1일 안동군 임동면 중평리 편항마을에서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유동수·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 등은 이어 영양군에 잠입, 입암면 대천동 이원오(李元五)의 집에 모여 비밀회합을 갖고, 3월 25일 영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오석준도 이때 영양군 측 시위 주도 인사로서 이 회합에 참여하여 청기면과 입암면 주민들을 동원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장이 서기 전날인 24일 이강욱의 주도 하에 청기면에서 먼저 시위가 전개되어 이에 참여한 주민들은 밤늦도록 시위에 참여했다가 다음날 영양읍 장터에서 다시 모일 것을 약속하고 해산하였다.
한편 일본군 헌병분견소에서는 입암면 주민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미리 탐지하여 당일 아침부터 읍내로 들어오는 4개의 간선도로를 차단, 군경을 배치하고 삼엄한 경비를 하였다. 낮 12시 30분경, 각지로부터 6백여명의 시위군중이 10∼20명씩 무리를 지어 영양읍내로 들어왔다. 이에 일본 군경은 읍 소재지 밖 2.5km 지점에서 일일이 신체 검색을 하여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군중은 이들의 경계망을 피해 읍내 시장으로 들어와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오석준도 일본 군경의 만류를 뿌리치고 읍내로 들어와 이미 들어온 시위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그날 오후 5시경 시위군중이 1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자 일제는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시위군중들을 총칼로 위협하여 그 중 167명을 영양금융조합 창고에 가둬 개별적으로 조사한 후 모두 방면하였는데, 오직 그 만은 주동자로 검거되어, 그해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6일 특사로 출옥한 후에는# 교육 사업에 종사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향교 전교로서 독립사상보급에도 진력하였다. 이후 광복을 맞이하였고 1951년 8월 7일 별세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평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오석준(吳錫俊)은 1862년 12월 23일 황해도 평산군 문무면 물안리(현 황해북도 인산군 안창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전 목천군수(木川郡守) 박기섭(朴箕燮)[4] 이 황해도 평산군 도평산(桃平山)에 의병진의 거점을 정하고 격문을 돌렸을 때, 격문을 받아들고 그 휘하에 입대하였으며 곧 향궤관(餉饋官:군량미를 조달하는 직책)에 선출되었다.
그후 유격장 이진룡(李鎭龍)·한정만과 돌격장 김창호(金昌浩)·유달수 등과 연안면·온정면 등지의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또한 본인 소유의 전답과 재물을 매각하여 의병진에 제공하기도 했다.
한일합방 후에도 의병활동을 지속하여 별세하기 전까지 지하공작과 유격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15년 8월 4일 별세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대한민국의 가수
1966년 6월 26일생 부산광역시 출신의 가수. 현재는 주로 작곡가로 활동한다.
대표곡으론 '웃어요', 장필순, 박정운과 같이 부른 '내일이 찾아오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