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환(독립운동가)
1. 평택시 출신 독립운동가, 오성환
오성환은 1895년 8월 26일 경기도 진위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진주에서 형평사(衡平社)를 창립하고 대표로서 형평운동에 가담했다. 이후 1924년에 있었던 형평사 본부의 이전 문제에 대해 진주에서 서울 또는 대전으로 옮기는 데 찬성했다. 그 결과 2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전에서 이른바 대전 회의를 열고 전라·경기·강원·평안도의 동지들을 모아 형평사혁신회(衡平社革新會)를 발기하고 형평사 본부의 이전을 결의하였다.
1924년 3월에는 형평사혁신회의 창립총회를 천안에서 열고 혁신회 창립 동기에 대한 설명과 함께 2주일 이내에 형평사 본부를 서울로 옮길 것을 결의하고 장지필(張志弼)등 4명과 함께 이전 준비위원장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동년 8월에 개최된 조선형평사 중앙총본부 임시대회에서는 조사부 상임위원으로 임명되어 서무부 백송계(白松溪), 재무부 조귀용(趙貴容), 교육부 이이규(李利圭), 사교부 이지영(李祉永), 산업부 이학찬(李學贊) 위원 등과 함께 사회개혁운동에 앞장섰다.
1925년 4월 24일, 25일 양일간에 서울 시천교당(侍天敎堂)에서 있었던 전조선형평대회에서는 이학인(李鶴仁)·이춘봉(李春峰)·이광수(李光洙) 등 20인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여 정의부의 양기탁을 위시로 고활신(高豁信)·현정경·곽종대(郭鍾大) 등과 천도교 혁신파인 김봉국(金鳳國)·이동구(李東求)·송헌 그리고 노령에서 온 이규풍(李奎豊)·주진수(朱鎭秀)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여 무장항일 투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1926년 12월 만주 장춘에 있는 동아정미소에서 이동락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동지 16명과 함께 뒤따라 체포되었다. 그 후 1928년 4월 22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았으며, 동년 10월 1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평택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4년 7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오성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4년 국립대전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2. 단천시 출신 독립운동가, 오성환
오성환은 1886년생이며 함경남도 단천군 이중면 하전리 출신이다. 그는 1921년 대한광복단의 문부부장(文簿部長) 김도빈(金道彬)이 국내로 잠입한 뒤 단천군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할 때 여기에 가담하여 안인현(安仁賢)과 함께 군복을 입고 육혈포를 들고 16개 처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다. 1922년 6월 3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이른바 제령 제7호 위반, 묘지화장장 매장 및 화약취체규칙 위반 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오성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