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운동

 


1. 개요
2. 배경
2.1. 백정에 대한 여전한 차별대우
2.2. 수평운동과의 연대
3. 전개
3.1. 형평사 창설과 형평운동의 확산
3.2. 형평사의 활동
3.2.1. 사회운동
3.2.2. 경제운동
3.3. 반형평운동
3.4. 분열과 변질
4. 형평의 의미와 사상


1. 개요


신분제 철폐 이후에도 여전한 사회적 차별을 받던 백정들이 1923년부터 전개한 신분 해방 운동.

2. 배경



2.1. 백정에 대한 여전한 차별대우


백정갑오개혁으로 신분이 법적으로 철폐되기까지 사회의 최하층 천인으로 취급되었으며, 갑오개혁 이후에도 사회적 제약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일상 생활에서 그들에 대한 차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고, 명주옷이나 갓, 망건, 탕건, 가죽신 등을 착용할 수 없었으며, 외출할 때에는 봉두난발에 평량자(平凉子: 패랭이)를 써야 했다. 또한 일반인 앞에서 음주나 흡연을 할 수 없었고, 집안에서 향연도 할 수 없었다. 장례를 지낼 때 상여를 쓸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묘지를 일반인과 같은 구역에 쓸 수 없었으며, 가묘도 금지되었다. 결혼할 때에도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었고, 여자는 쪽을 짤 수 없었다. 성과 이름도 일반인과 구별되어 성이 분명한 백정이 별로 없었고 이름이 인(仁), 의(義), 효(孝), 충(忠)의 글자를 쓸 수 없었다.
또한 1896년에 도입된 새로운 민적법으로 호적이 통합되기는 했지만 백정 직업에 도한(屠漢)이나 붉은 점을 표시하는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1909년 8월 21일에 통감부가 도축장을 허가제로 변경하고 일본인들이 도부업 및 수육판매업을 전국에서 자유롭게 영업할 수 있도록 보장하면서, 백정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들은 통감부가 설정한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키기 어려워했고 일본인들이 도축업을 잠식하는 걸 맥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919년 11월에는 도축장 경영자가 도살종사자의 주소와 이름 및 연령을 담당 경찰서에 제출하고 인가하도록 해 도부들에 대한 속박이 더욱 강화되었고, 도축장은 정당한 이유 없이 도살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여전한 사회적 차별대우와 경제적 상황 악화로 위기를 느낀 백정들은 차츰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해야겠다는 욕구를 품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공, 사립학교에 입학시켜 좋은 교육을 받게 해 출세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일반 시민들의 차별의식으로 인한 배척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총독부는 형평운동이 일어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경남 진주군 진주면 대안동에 이학찬이라는 백정 출신 자산가가 있었다. 그는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수차례에 걸쳐 공, 사립학교에 입학시키려 노력했으나 백정이라는 구실로 거절당하거나 혹 일단 허가를 받아도 백정 자제임이 알려지면 주위의 배척이나 압력을 받아 중도에 퇴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사회의 몰이해를 원망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본 관서지방에서 수평운동이 활발하다는 소문을 들은 이학찬은 일반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에게 백정의 고충을 호소하여 이들의 찬동을 얻어 이들 및 같은 백정 출신인 장지필 등과 함께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백정들의 신분해방 운동단체인 조선형평사를 조직하게 되었다.


2.2. 수평운동과의 연대


형평사가 결성되었을 당시,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1923년 5월 3일자 기사에서 "수평사의 선동인가! 운동을 시작한 조선의 특수민"이라고 보도했다. 또 오사카 매일신문은 1923년 5월 1일자 기사에서 "형평운동의 개시, 수평사와 같은 주장으로 전 조선에 격발"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수평사는 일본 사회에서 특수부락민 부라쿠민(部落民)의 해방운동으로, 1922년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수평사는 1924년 4월 조선형평사 대회에 다음과 같은 축사를 보냈다.

형평사 동인(同人) 제군, 우리들 수평사 동인과 제군 사이에 있는 것은 단 하나의 해협뿐입니다. 우리들은 고작 122마일에 불과한 이 해협이 우리의 굳건하고도 따뜻한 악수를 막는 데에 얼마나 무력한가를 몰지각한 인간 모독자의 눈앞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른바 정신적 노예제의 영역을 돌파하려는 인류의 기수(旗手)로 선택된 민중이라는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진군합시다.

형평사 인사들 역시 수평사와의 제휴를 모색하며 강사 초빙 혹은 일본 수평사 방문 등의 활동을 진행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평사와 제휴하여 보조를 같이할 필요가 있다하여 이번 수평사에 대하여 강연할 연사를 청구하야 그 대표자가 경성에 올 예정이오. 사회주의자로 이름난 북성회원 백무씨 외의 몇 사람도 출석하여 강연할 모양이라는데...

조선일보, 1924년 4월 24일자 기사

일본 수평운동과 연락하는 동시에 일본 중앙정부의 양해를 얻어두기 위하여 십구일 오후에 동경에 왔는데 종래 백정이라 하는 이름으로 특수한 대우를 받던 사십만명의 대표인 만큼 경시청 기타 각 방면에서 주목중이라 하더라.

조선일보, 1924년 9월 21일자 기사

이후로도 양측은 서로 교류를 지속했고 1927년에 정식으로 제휴를 결정하기도 했다. 이후 형평사는 일본 수평사의 강령 및 선언에 맞춰 자신들의 입장을 수정하는 등 수평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3. 전개



3.1. 형평사 창설과 형평운동의 확산


1923년 4월 24일, 경상남도 진주시 대안동의 진주 청년회관에 70여 명이 모여 형평사 기성회를 개최했다. 그들은 다음날인 4월 25일 형평사 발기 총회를 열고 형평사 전반에 관한 주요 사항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형평사 창립취지를 담은 '형평사 주지', '형평사 사칙' 등을 정했으며, 회원들의 교육과 다른 지역에 형평사 취지를 알리는 일 등도 논의했다. 형평사 창립에 참여한 인사들은 대개 백정들이었지만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 인사들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형평사가 진주에서 창립된 배경은 다음 몇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진주는 경남의 도청소재지로 새로운 개혁운동의 주요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경남 일대에서 벌어진 사회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곳이 진주였다. 또한 진주는 양반의 세가 강해서 사회 전반에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이 때문에 백정들이 피부로 겪는 차별대우는 상대적으로 강했다.[1][2] 또한 진주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백정들이 일부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사회적 대우 개선 욕구는 매우 컸다.
이렇게 해서 창설된 형평사는 주지와 사칙의 채택에 이어 임원선거, 유지방침, 교육기관 설치, 회관 설치, 각지에 출장하는 선전활동, 신문지상의 광고 등의 제반 내용을 결의하며 운동을 진행했다. 5월 13일에는 형평사 창립 축하식을 거행했는데, 간부 측에서 선전 활동을 위해 자동차 3대에 나누어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선전면 7천여 장을 배포했다. 창립축하식은 위원장 강상호의 개회사와 위원 신현수의 형평운동의 취지 설명, 정희찬의 일본 각 사회와 지인이 보낸 축전들을 낭독하는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후 형평운동 관계자들은 출장지를 확정하고 삼남 각지로 출장했는데 도처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취지와 선전문을 배포했다.
1923년 5월 14일, 진주청년회관에서 지방대표 300여 명이 모여 임시의장 신현수의 사회 아래 장래 형평사 조직의 유지방침과 여러가지 중요사항을 결의한 결과 사내에는 서무부, 재무부, 외교부, 교육부, 정행부의 다섯 부를 두기로 결정했다. 유지방침에 대해서는 각 지방 대표와 개인의 의연금을 바탕으로 사업을 영구히 실행하기로 결정했고, 상무위원 1인을 두어 구체적인 사무를 집행하게 했다. 또한 각도와 각 군에 지사와 분사를 설치하여 형평운동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기 위해 현장에서 부산, 대구, 논산, 옥천의 네 곳에 지사를 설치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23년 5월 27일 정읍에 분사가 설치되었고, 5월 29일에 대구에 설치되었다. 이후 5월 30일 광주, 6월 4일 군산, 9월 11일 충주, 1924년 4월 20일 인천, 영등포, 부천 등이 설치되었다. 설치된 각 지사와 분사는 지사장과 지사집행위원이 위원회를 구성하여 지방의 문제를 처리해나갔다.
형평사 창립 후 1년이 지난 1924년에는 전국적으로 12개의 지사와 67개의 분사가 설치되었다. 경상도에 31곳, 충청도에 25곳이 설치되었으며, 전라도에 14곳, 경기도 2곳, 강원도 5곳이 세워졌다.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타 지역보다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것은 두 지역이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양반층이 많이 잔존해 있어서 백정과 같은 천민에 대한 차별대우가 타 지역에 비해 심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1928년 4월 24일까지 전국에 67개소의 지사가 설치되었고, 1933년 8월까지 240여 개의 분사가 설치되어 전국 40만 백정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로 성장했다.
형평사는 매년 4월 25~26일에 창립기념식을 겸한 정기적인 총회를 열었고, 필요에 따라 임시총회나 지방대표자 회의 등을 열어 형평사원의 활동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경찰 당국의 압력으로 상정된 안건들이 모두 순조롭게 토의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총회에서의 토의안이나 결의안 등의 안건은 그 시기의 당면문제를 총괄적으로 반영했다. 또한 토의 결과는 각 지, 분사에 전달되어 활동방향이나 내용의 기본 지침이 되었다.

3.2. 형평사의 활동



3.2.1. 사회운동


형평운동의 최우선 목표는 백정들의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철폐하고 인간으로서의 평등한 권리와 존엄성을 갖도록 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시민들의 백정에 대한 의식 변화였다. 그들은 1923년 4월 30일 조선일보 기사에 '형평사 주지'를 기고해 "계급타파, 모욕적 칭호 금지, 교육의 장려" 등을 밝히며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으며, "우리도 이 세상 사람의 일분자이니 압박 멸시 계급을 타파하고 우리의 후손이라도 문명의 길로 나가게 해주시오."라고 호소했다. 또한 사원들은 그동안 일상적으로 당해오던 차별대우와 굴욕적 관습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그 결과 양자간의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1925년 2월 5일 전북 익산군 함열 구읍에서는 청년 노동자 수백명과 형평사원 수백명이 모여 대치하면서 일대 충돌이 일어날 뻔했다. 이에 총본부에서는 서광훈을 급파해 진상을 조사했다. 이 사건은 함열 구읍의 주점 주인이 주민에게 구타당하여 입원하자 형평사원 4, 5명이 위문 차 주점 주인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주민들이 형평사가 음모를 꾸미는 것이라 생각하고 형평사원을 구타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형평사 총본부 임시간부회에서는 강원도 홍천과 전북 금산에서 일어난 주민과의 충돌사건의 원인인 차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부들로 구성된 응원대 파견을 결정하기도 했다.
1928년 전국대회 정치총회에서는 차별대우 적극적 철폐에 관한 건을 의결했으며, 충남 천안 입장분사의 임시총회에서는 차별대우에 대한 것에서 "차별적 대우가 있을 시에는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피차별자로서 투쟁치 않을 시에는 사에서 엄중처벌한다"는 결의를 하여 분사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차별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서울 본사나 각 지사에서는 간부들이 개입하여 그것을 형평사원 전체의 문제로 전환시켜 사원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관심을 촉구했다.
그들은 또 백정이라는 호칭에 대한 신분표시 삭제, 관리에 의한 공적인 차별의 철폐를 요구했다. 1923년 5월 14일 경상도 고등과장이 형평사를 방문하자, 진주 본사 간부 일동은 "민적난에 백정(도살)이라고 기재되어 있음은 절대 불가한 일이며 계급타파에 가장 모순되는 일인 즉 하루 바삐 정정키를 요구"하였고, 이에 고등과장도 이해하여 각 군청에 민적을 정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민적에서 백정이란 용어가 완전히 철폐되기까지는 좀 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또한 형평사원은 관리들의 부당한 대우의 시정을 바라며 당국에 규제 제정을 촉구하기도 하고 항의성 방문을 통한 의견 관철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1926년 4월 28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형평사의 다음과 같은 지시를 게재했다.

혹시 각 경찰과 기타 특수한 계급으로부터 횡포를 당할 경우 (중략) 차별적 계급에 대한 적극적 반항의 기세를 보이자.

또한 1926년 7월 6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형평사의 다음 지시를 게재했다.

우리도 사람이란 것을 자각한 이상에는 지금에 오히려 무리하게 주먹으로 때리거나 몽둥이로 치는 때에는 달게 받지 말고 주먹이나 곤봉으로 대항하자.

한편 형평사는 백정들의 자녀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조선일보 1925년 7월 7일자 기사에서, 형평운동에 가담한 한 백정은 다음과 같은 과격한 논설을 게재했다.

만약 그들이 고의로 입학을 거절하면 우리의 자손은 언제든지 지식의 차이로 이와 같은 압박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차라리 우리의 소 잡든 칼로 살아서 소용없는 자식을 먼저 죽이고 그 다음은 그 칼로 학교 당국자를 대항하자!

형평사는 백정 자녀에 대한 교육 거부에 대응하기 위해 형평사원 스스로 야학강습소 및 학교 설치를 할 것을 권고했고 자녀들에게 예의범절과 신문 낭독 등의 간단한 지식 소양을 익히게 해 장차 시민들에게 괄시받지 않게 할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이같은 교육의 열기에 비해 실제로 개설된 야학강습소는 20여 개에 불과했다. 이는 형평사원의 사회적, 경제적 여건이 매우 불리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지역에 따라 활동이 지지부진한 분사에서는 야학이나 강습소를 개설할 수 없는 곳도 허다했다. 그렇지만 백정이 스스로 야학강습소를 설치했다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파장은 상당했고, 개중에는 무사히 정착하여 기숙사를 설치한 곳도 있었다.
1925년 6월, 형평사 총본부는 교육담당부서로서 형평학우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회관을 신축하여 형평학교의 설립을 계획했지만 무위에 그쳤고, 형평학우회에서는 형평사원 자녀들의 학업 능력을 고취하기 위한 순회학원을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여름 휴가 중에 대전에서 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아직까지도 학교 입학을 거절당하는 일이 있으니 앞으로는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한편 군산에서는 형평여성동우회가 창립되어 여성운동에도 관여했다.

3.2.2. 경제운동


형평사는 일제의 도축 정책으로 인해 생존권이 위협당하는 백정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졌다. 1925년 정기총회에서는 생활문제로 도수장에 관한 건, 수육판매에 관한 건, 우피건조장에 관한 건, 도부요금에 관한 건 등이 결의되었다. 그리고 1926년에는 도축장 세금, 우육판매, 우피건조장, 도부요금에 관한 건이 결의되었으며, 1928년에는 사원 생활권 보장에 관한 건의, 1929년에는 산업별 조합 결성의 건의, 1930년에는 생활 문제로 도살 요금 인하 운동에 관한 건의, 도부요금에 관한 건의, 산업별 조합 조직에 관한 건의 등이 주요 의제로 상정, 결의되었다. 이러한 의제들 모두 형평사원의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들이었다. 특히 형평운동 초기에 총본부를 운영하기 위한 자금 도입과 무직자를 위한 대규모 사업을 구상하기도 했다.
1924년 대구지사에서는 창립 1주년 기념식에서 도수장 관리를 형평사에 허가하도록 총독부에 진정하는 진정위원을 선정했다. 또한 1926년 함남 홍북형평사에서는 도우임금인상을 요구했지만 하등의 효과가 없자 50여 명의 사원이 도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도부들은 더 나아가 작업환경의 개선과 임금 인상 등을 요구했고 때로는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파업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운동에도 불구하고 백정의 삶의 질은 갈수록 악화되어 1920년대 후반기로 갈수록 임금 수준이 낮아졌다.
형평사는 수육판매조합을 결성해 경찰이 엄격해 통제해 놓은 고기 가격을 시장원리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경찰의 압력이 가해지자 결국 굴복했다. 그래도 일부 도 단위 지역에서는 사원들의 이익을 위해 공동생산, 공동판매체제를 갖추려고 노력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비사원 출신과 일본인 동업자들까지 포함해 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또한 형평사원들은 건피장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일부는 관청이나 일본인 친목단체, 또는 부유한 개인에게 넘어간 건피장의 소유권을 되찾으려 노력했으며, 또다른 이들은 가내 수공업으로 생산한 제품의 공동구매 및 판매망을 만들려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은 경찰 당국의 엄격한 통제 때문에 여의치 못했다. 이에 형평사는 사원의 경제적 침탈을 타개하기 위해 형평산업주식회사의 설립을 추진했지만 이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3.3. 반형평운동


형평사 설립에 대한 사회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었지만 반발의 목소리도 컸다. 1923년 5월 14일자 조선일보 기사에는 이와 관련된 논평이 실려 있다.

온 세상에서 큰 말거리가 되어 혹은 가하다 당연히 할 일이다 하며 혹은 시기가 아직 이르다고도 하며 모모신분에서는 절대 반대운동을 선전하여 이미 조선에는 백정의 계급타파 한지가 삼십여년이나 지났는데 이제 새삼스럽게 계급 타파를 절규하고 시위 운동을 행함은 무식자들의 밥을 구하기 위하여 선동함에 지나지 못한다하고....

형평사 창립기념식이 열린지 열흘이 지난 1923년 5월 24일, 진주지역 24개 동리의 농청 대표자들은 중안동 동사무소에 모여 형평사 반대를 결의했다. 이들은 쇠고기를 사먹지 않기로 했고 시내 전역을 돌며 형평운동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둘째날 부터는 본격적인 쇠고기 불매운동을 벌이기 시작해 마을마다 쇠고기를 사먹는 집이 있는 지 감시하고 협박했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24개 동리에서 온 농청 대표자 70여 명은 진주 시내에서 가까운 의곡사에 모여 형평사에 관계하는 자는 백정과 동일한 대우를 할 것, 쇠고기를 절대 사먹지 않을 것을 동맹할 것 등 형평사를 배척하는 5가지 사항을 결의했다. 이후 양반의 신분으로 형평운동에 적극적으로 활약한 강상호 등은 '신백정(新白丁)'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다.
1923년 5월 25일 탁윤환이란 사람이 형평사 근처의 술집에 가서 술을 달라 했는데 술이 떨어졌다고 하자 "백정 놈들에겐 밥을 팔더니 나한테는 술이 왜 없다고 하는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형평사 사람들이 분노해 그를 폭행했고, 탁윤환은 이에 복수하고자 패거리를 몰고 형평사로 몰려갔다. 동아일보 1923년 5월 30일자 기사에 따르면, 탁윤환 일행은 형평사에 찾아가 강상호를 불러내 두 뺨을 무수히 난타하고 의복을 찢는 등 모욕을 줬다고 한다. 이후에도 형평사원과 일반인 간의 소요 사건이 발발하여, 1925년까지 경상도에 21건, 충청도에 19건, 전라도에 25건의 소요가 발생했다. 경찰은 이러한 소요에 대해 방관하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러한 태도는 아래의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폭행을 하였으나 경찰당국에서 무슨 진압에 대한 방침을 취하지 아니하고 경관들은 등불을 들고 그 군중을 따라다니며 방관을 하였을 뿐이다가 형평사원의 집이 다섯 집이나 참화를 당한 뒤에 비로서 간섭을 시작하야.....

조선일보, 1923년 8월 24일자 기사

구타를 시작하며 다수한 군중은 그놈들 밟아 죽이라는 소리가 논산이 진동하였다하며 이같은 소동이 일어난 사건을 논산주재소에서는 전연히 모른다고 하여 일반 형평사원들은 경찰에 대한 비난이 많으며 피해자는 진단서를 첨부하여 고소를 기하였다더라.

조선일보, 1925년 9월 6일자 기사

또한 경찰 당국자들이 형평사원을 비하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순사가 박용출의 고기파는 시장 수육판매점에 와서 간판 붙인 곳에서 왜 안팔고 딴 곳에서 파느냐는 것과 남편의 이름으로 허가를 맡아가지고 어찌 아내가 파느냐하며 형평사를 꾸미는 백정년놈들이 언제든지 경관 명령은 어긴다고 이뺨 저뺨 갈기는 바....

조선일보, 1925년 4월 15일자 기사

이러한 반형평운동 사례 중 대표적인 사례로 짚을 수 있는 것은 1925년 8월 14일에 발생한 예천 사건이다. 1925년 8월 9일 예천분사 창립 2주년 기념식에서, 형평청년회장 김석희가 축사 도중에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지금 새삼스럽게 형평사를 내세워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것이니 그보다 백정들의 실질적 향상에 힘쓰는 것이 타당하다."

이에 대해 형평사원들의 질문과 공방이 이어졌고 장내는 긴장감이 팽배했다. 그러자 축하식을 구경하러 온 일반 시민들이 "백정들이 요새 너무 건방지다"며 청중들을 선동해 형평분사를 습격하여 수십명의 형평사원들을 부상입혔다. 1925년 8월 19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인류 평등의 대의로 보거나 피압박계급의 일치단결의 필요로 보거나 또는 민족으로서의 공동한 피압박상태에 있는 견지로서 보거나 노농회원이라는 신분을 가진 동포들이 그릇된 차별적 생각을 가지어 형평사원 대습격을 자행하였다는 것은 매우 탄식할 일대 실책이다.

예천 경찰서는 이 사건에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고 피해자는 형평사측 보다는 예천시민과 농민들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8월 30일에 "예천소요사건 진상"이라는 진정서를 각지 경찰서에 발송했는데, 그 내용은 '금범 사건은 돌발 사건으로써 형평사원의 과도한 언동에 일반이 분개하여 그리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찰의 태도에 분개한 각 사회단체들은 예천 사건에 대한 관심과 적극적인 해결 방법의 모색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한양청년회는 형평문제 대강연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종로 경찰서에 의해 금지당했다.
이렇듯 형평사는 반형평운동으로 공격받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조직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사회운동 계열로부터 지원받으면서 형평운동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이면서 전국적인 사회운동단체로 거듭난다. 그러나 1924년경 형평사는 분열하기 시작한다.

3.4. 분열과 변질


형평사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상되고 있을 무렵, 진주와 같이 협소한 곳에 본부를 두는 것은 운동상에 불편한 점이 많으니 조선의 중앙지인 경성으로 본부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다. 이후 사원간의 분열이 시작되자, 이를 종식시키기 위해 신현수가 진주 본사의 특파로 경성에 상경해 타협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형평사는 창립한 지 1년이 채되지 않은 시점에서 분열되어 경성에 형평사혁신동맹회가 설립된다. 이후 두 개의 형평사 본부는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형평사연맹총본부는 성명서를 내어 경성의 형평사혁신동맹회에게 분열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이에 경성의 형평셕신동맹회 또한 성명서를 배포해 이를 반박했다. 이후 상호간의 공방이 지속되었고, 양측의 대립은 갈수록 격화되었다. 이에 두 단체의 분열에 대한 반성과 통일을 추진하는 움직임 또한 일었고, 대전에서 전조선형평사원 대표자 회의를 통해 남북의 대표자들이 분열에 대한 대책을 토의한 결과 남북의 통일을 선언했다. 형평본사의 명칭은 조선형평중앙총본부가 되었고 위치는 경성으로 결정했다. 또한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 임시대회는 규칙, 재정, 조직 등의 제문제를 검토했다. 그 결과 조직에 중앙집행위원 40명을 두고, 서무부, 재무부, 교육부, 조사부, 사교부, 산업부의 6부를 두었다.
이후 조선형평중앙종본부는 분열의 원인으로 간주된 강상호, 장지필의 배제를 결의했다. 그러나 장지필이 여전히 경성에서 형평운동에 관여하자, 경남 각지에서 이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일었다. 1924년 10월 1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이러한 동향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당시 통일을 선언할 때 일반사원은 분열의 원인이 강상호, 장지필 두 사람에게 있으니 두 사람은 형평운동에서 제외하여야만 분열이니 내홍이니 하는 문제가 없어지며, 형평운동이 원만히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결과 양씨는 형평운동에 참가치 않기로 가결되었었는데, 그 후 장씨는 여전히 경성에 와서 형평운동에 대하여 다소 간섭을 한 일이 있었는데 경남 각지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장지필씨는 대전대회 당시에 형평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게 된 사람임에 불구하고 다시 총본부의 배후에 앉아있음은 무슨 술책을 부리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대전 회의를 부인하고 마산에서 다시 경남형평사원대표자회의를 열게 되어 다시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음으로....

이 일로 분란이 일었지만, 1925년 4월 24~25일 양일간 경성에서 개최된 제3회 전조선형평대회에서 모든 분란을 덮어두고 총단결하기로 결의되면서 분열 위기는 종식되는 듯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형평사 내부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인사들이 형평사의 권력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이 일면서 또다시 분열 위기가 찾아왔다.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인사들은 "백정에 대한 인권 유린이나 사회적 차별은 자본주의의 소산이므로 노동자, 농민의 계급투쟁과 제휴하여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정치투쟁에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며 운동방향의 전환을 주장했다. 1929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 <금후의 조선>에는 이러한 이들의 입장이 실려 있다.

조선의 형평운동은 순전히 인권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압박이 심하여 수많은 희생자도 내었고 따라서 운동의 효과도 적지 않게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계급의 철저한 해방은 이와같은 미지근한 인권운동으로서만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 과거 경험에서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후 우리 운동은 방향을 전환하여 경제적 내지 정치적으로 진출하려 합니다. 이것을 실현하는 방법으로는 같은 사원간에도 불순분자, 다시 말하면 개인의 안락을 위하여 지배계급의 주구짓하는 자를 제외한 분자의 별개 단체 구성에 있는 줄 알고 새해부터는 그것을 실현할 작정이외다.

이에 대해 지도층은 "형평운동은 백정의 인권옹호와 차별철폐의 본래 목적에 충실해야 하며 외부의 정치, 사상단체와 제휴해서는 안된다"고 맞섰다. 이리하여 양측의 분파 투쟁이 전개됐다.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인사들은 진보적인 성향으로 급진적인 변혁을 지향했기에 '급진파'로 불렸고, 일체의 제휴를 거부한 인사들은 보수적이며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해 '온건파'로 불렸다.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당시 조선에서 사상단체의 2대 세력으로 칭하여진 서울, 북풍 양파에서는 형평사의 향배가 곧 세력 신장에 다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면서 형평사의 회유 쟁탈에 부심하였다. 형평사내에서도 형평운동은 끝까지 본래의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할 것이고 사상단체를 이용하거나 또는 사상단체의 주구가 되는 것을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온건파와, 한편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대우는 자본주의의 소산이기 때문에 그것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타도가 선결문제이며 그리하여 백정의 근본적 해방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파의 양파로 분열되어 서로 암투가 계속되었다.

1931년 3월, 수원형평사는 임시대회를 열어 4월에 있을 전국대회에서 형평사 해소안을 제의할 것을 결의했다. 그들은 "형평사는 소부르주아 집단이기 때문에 단호히 해소하고 도부노동조합(屠夫勞動組合)으로 전환해 일반 산업노동조합과 적극적으로 제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뒤이어 양양, 입장 형평사가 해소를 결의하자, 예산, 원주, 둔포 등의 형평사는 해소에 반대해 해소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불거졌다. 해소에 반대하는 이들은 “형평운동이 민족해방운동으로부터 경제투쟁으로 전환한 것은 사실이나 전반적 추세로 보아 해소문제는 시기상조이므로 이를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온건파 간부들 역시 해소안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들은 형평운동의 특수성과 고유성을 내세워 해소안에 반대했는데, 형평사가 다른 사회운동과 협력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서로 성격과 과제가 다르기 때문에 해체하여 통합한다는 것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이었다.
사실 해소를 주장한 이들은 형평사를 아예 해산시키는 걸 원한 게 아니라 한 운동에서 다른 형태의 운동으로 전환하는 걸 원했다. 그들은 형평사가 가지는 전술적, 조직적 오류를 극복하고 '보다 고도의 운동방향으로 도약'하길 원했다. 박호군(朴好君)은 <형평운동의 금후>라는 글을 게재해 “도부들로만 도부조합을 조직하고 그 지부를 현 형평사 지부가 있는 곳마다 둔다고 한 것은 산업별적 조직의 전체적 방법을 몰이해하였고 또 노동조합조직원의 구성적 성격을 몰각하는 등의 오류가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형평사를 해소하여 각 지역의 편차에 따라 노동조합 또는 농민조합을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소 주장은 온건파가 주류인 형평사 지도부를 압도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고, 형평사는 그런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던 1933년 1월, 일제는 형평사원 50여 명을 긴급 체포했다. <동아일보> 1933년 1월 27일자 기사에 따르면, 검거된 형평청년들은 백정의 해방은 현재의 형평운동보다는 계급운동의 일부분이어야 한다고 하여 형평사 해소를 주장하는 동시에 적화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를 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시작된 형평사원 검거선풍은 제2차, 3차, 4차에 걸쳐 전국각지에서 100여 명을 검거하여 7개월간 취조했고, 이중 서광훈(徐光勳) 등 13명은 형평청년전위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후 급진파는 당국의 탄압으로 구속되거나 형평사를 탈퇴했고, 형평사는 장지필 등의 온건파가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 형평사는 경제 생활 중심의 활동을 하는 백정의 이익단체, 친목단체로 전환되었다. 그들은 우육판매산업에 비사원들의 침투 반대와 저지를 위한 활동, 피혁조합 설립 논의, 건피장 관리권의 형평사원으로의 이전 요구 등 경제적 이익을 위한 활동을 강조했다. 그러나 형평사의 세력이 약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지, 분사의 개수는 1932년 161개에서 1935년 98개로 줄어들었고, 사원수는 1932년 8,293명에서 1935년 6,540명으로 줄어들었다.
1935년 4월, 제13회 형평사 전국대회는 형평사의 명칭을 대동사(大同社)로 개칭했다. 이후 대동사는 "종래의 투쟁주의적인 운동방침을 일본주의적, 협조적으로 전환한다"고 선언했고, 일제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국방성금을 모금하고 전투기 한대 값에 상당하는 돈을 일본 정부에 전달했으며, 전 백정이 단결하여 덴노를 위해 헌신하자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40년 이후에는 형평사의 중추였던 도부조합이 일제의 관제조합인 조선축산조합(朝鮮畜産組合)에 흡수되었고, 일체의 정치, 경제, 사상운동은 금지되었다. 이리하여 형평운동은 종말을 고했다.

4. 형평의 의미와 사상


형평(衡平)의 사전적 의미는 '균형이 맞은 상태'로, 불평등을 평등한 것으로 개혁한다는 사회적, 개혁적 의미가 담겨 있다. 형평운동을 추구한 백정들이 지향한 평등은 상향적 평등으로, 자신들이 받는 차별대우를 근절하고 평민과 대등한 수준으로 대우받는 것이었다. 1923년 4월 30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게재된 '형평사 주지(主旨)'엔 이러한 백정들의 소망이 잘 담겨 있었다.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다. 연(然)함으로 아등(我等)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야 아등도 참 사람이 되기를 기(期)함이 본사의 주지이다.

하지만 초기의 형평운동은 '민족문제'나 '계급투쟁'과 같은 민감한 사상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사실은 형평사 지회 중 하나였던 전북 김제 서광회(曙光會)가 1923년 5월 26일자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기사에 게재한 선언문에서 드러난다.

백정! 백정! 불함리의 대명사, 부자유의 대명사, 모욕의 별명, 학대의 별명인 백정이라는 명칭하에서 인권의 유린, 경제의 착취, 지식의 낙오, 도덕의 결함을 당하야 왔다. 아! 과연 이것이 정복계급의 죄냐, 피정복 계급의 죄냐. 아니라. 질곡적(桎梏的) 제도에 있으며 전통적 습관에 있도다. (중략) 여기에서 권리를 회복하고 자유를 해방하려고 질곡적 제도를 탈출하며 전통적 습관을 타파하야 동민족적(同民族的) 차별을 철폐하려는 동시에 모멸적인 백정이라는 명사를 철폐하야 우리의 역사를 일층 신선케 하며, 우리의 생활을 일층 진선미(眞善美)케 하랴 한다.

그들은 신분차별의 원인을 정복계급과 피정복계급 사이의 관계에서 찾지 않고, 질곡적인 제도와 습관에서 찾았으며, 자신들은 계급투쟁 같은 과격한 방식을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사회주의자 박평산(朴平山)은 1931년 <형평운동의 今後>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오늘까지의 형평운동이란 조선운동 전체적 입장에서 너무도 계급적 전체 관계를 무시하였으며, 아울러 형평운동 자체에 있어서도 모든 것이 비대중적이었던 것은 우리 운동 실천에 있어서 명확히 증명되고 있는 바이다. 보라! 계급성을 전연 무시한 전백정층의 총조직이란 계급 전체에 한 사람이 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며, 아울러서는 백정층 계급적 진출을 막을 뿐이다.

또한 형평운동을 주관한 이들은 지식인 계층의 '애정' 내지 '동정'을 호소했으며 개인적인 차원에서 신분 해방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들이 내세운 6개 세칙 가운데 4개 항은 개인의 행동에 관한 내용을 다뤘다.

一. 야학 또는 주학강습소를 증설하고, 신문잡지의 구독을 장려하고 수시 강연을 하여 상호지식을 계발케 한다.

一. 주색(酒色) 및 도기(賭技)를 금한다.

一. 풍기를 문란케하는 행위를 금한다.

一. 근검질소(勤儉質素)를 주로 하고 상호부조(相互扶助)의 미풍을 조장한다.

이렇듯 그들은 평등이 사회의 근본이라고 선언하면서도 불평등의 근원인 사회구조나 질서를 깨뜨리기 위한 적극적인 인식이나 실천적 방법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우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들과 같은 수준의 인격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들은 유신론적 관념을 견지했으며 천부인권설에 기초한 인간해방이 자신들의 추구하는 방향임을 여러 차례 드러냈다. 이는 사회주의자 김덕한(金德漢)이 <개관(開關)> 1924년 7월호에 실은 <형평사의 내실과 형평운동에 대한 비판>에서 지적한 바 있다.

형평운동은 유신론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선전 비라에서 '천부인권', '천의(天意)', '하나님은 공평무사하시다'[3]

등의 표현을 즐겨쓰고 있는 것에서 이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형평운동은 프로레타리아 운동과는 거리가 너무 있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형평운동계 내부에서 지도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신분 차별의 철폐를 사회적 책임을 돌리고 제도 개혁을 주창하는 목소리가 확산되었다. 1928년 4월 제6차 형평사 대회에서 채택된 형평사 강령엔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아등은 경제적 조건을 필요로 한 인권해방을 근본 사명으로 함.

아등은 일반 사회단체와 공동 제휴하여 합리적 사회건설을 기함.

아등은 형평운동의 원활과 단일의 촉성을 기함.

아등은 본 계급의 당면한 실제적 이익을 위하여 투쟁함.

아등은 아등 자신의 힘으로써 절대의 해방을 기함.

안병희는 1929년 <형평운동의 정신>이란 제목의 글을 게재해 일반 사회 단체와의 제휴를 강조했다.

우리의 형평운동의 사명은 우리 동족을 위하야 인간 사회를 위하야 '자유를 찾자', '평등을 찾자', '행복을 찾자' 함에 있다. 우리 동족이라 함은, 즉 백정계급의 사람이라는 말이다. (중략) 자유를 찾자, 평등을 찾자, 행복을 찾자 함에 있어서는 일반 사회단체와 공동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일반 사회 단체의 운동이나 우리 형평 단체의 운동이나가 다 동일한 사회운동, 즉 사람의 운동인 고로 제휴를 면치 못할 것이며 공동을 피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형평운동의 주류가 사회주의적 계급투쟁이 아닌 평등주의적 사상임은 분명했다. 형평운동에 가담한 이들은 인간은 모두 대등한 존재이며 어떠한 사람도 다른 사람의 인간적 존엄성과 가치를 제약할 수 없다는 천부인권적 사상에 공명하고 있었다. 이 점은 형평사가 발행한 <조선형형운동의 취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래 5백년간을 동일한 사람, 동일한 민족이면서도 이것을 부인하는 모든 굴욕과 학대 하에 신음하고, 또 그것을 감수하여 온 우리 백정도 어리석다면 어리석지만, 야비한 그 풍속과 무리한 습관 등 몽매한 원시시대의 그대로의 생활을 가지고 현사회에서 어깨를 겨누고 생을 구하려고 하는 우리들의 일반 사회도 또한 합리적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백정 계급인 우리들의 천부의 인권을 회복하며 사회정의에 호소하기 위하여 '형평' 2자를 이 세상에 절규하고 나서는 바이다.

또한 안병희는 <형평운동의 정신>에서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다같은 조선민족이지만 '백정'이니 '피쟁이'니 '갓바치'니 '천인'이니 하야 그 무엇이 특별한 조건이나 있는 것처럼 왜 천대를 주며 학대를 주며 멸시를 하는가. (중략) 우리 형제 자매는 인생이 아니라는 말인가. 왜 천대를 받는가. 왜 멸시를 당하는가. 다 같은 인생으로, 다 같은 조선 사람으로, 다 같은 남자로, 다 같은 여자로 짐승이나 또는 저 무엇으로 대우할 이유가 무엇이며 무슨 도리인가. 우리들은 이와 같은 생각에 없던 눈이 떴으며 없던 귀가 뚫렸으며 없던 입이 벌어졌다. 옳거니, 이때까지의 모든 천대와 멸시가 우리의 과실이다. 왜 그러냐 하면 눈이 없었던 것이 과실이었고, 귀가 없었던 것이 과실이었으며, 입이 없었던 것이 과실이었다.

이렇듯 형평운동을 이끈 이들은 공산주의처럼 계급투쟁을 통해 다른 계급을 타도하는 것을 거부하고 모든 사람을 인간적인 존재로 발전시켜 그들이 하나로 화해하는 화평세계를 만드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형평운동의 핵심 인물인 장지필(張志弼)은 "우리들은 해방이 되어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이상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라며 이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1] 진주 지역에서 백정들이 겪었던 수모 가운데 하나를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1909년 진주 봉래동의 진주교회(당시 옥봉리교회)에서 있었던 이른바 '동석 예배 거부 사건'인데, 호주 장로회 소속 의료 선교사 카를(Hugh Curell, 한국명 거열휴) 목사가 1905년에 세운 이 옥봉리교회는 평신도들이 백정들과 함께 예배 보기 싫다고 해서, 백정들은 버젓이 교회와 예배소가 있는데도 들어오지 못하고 따로 예배를 보았는데, 카를 목사의 후임으로 온 데이비드 리알(D. M. Lyall, 한국명 나대벽) 목사는 이를 보고 "'''하나님 앞에서는 귀하고 천한 이가 따로 없다'''"며 백정들도 일반인들과 같은 장소에서 함께 예배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1909년 5월 둘째 주일에 백정 신도들이 예배당으로 들어오자 30여 명의 신도들을 제외한 나머지 200여 명은 "'''백정놈들하고는 같이 천국 가기 싫다'''"며 그 자리에서 예배당을 나가 버렸다. 리알 목사는 처음에는 "하나님 뜻을 따라야지, 사람 뜻을 따라서야 되겠느냐"고 호기롭게 받아쳤지만, 결국 7주가 지난 뒤 종전처럼 일반인과 백정이 따로 예배 보는 것으로 돌아갔다. #(출처:김중섭, 『형평운동』, 지식산업사, 2001) [2] 여담으로 이런 식으로 사회에서의 차별이 종교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흑인교회, 백인교회 등으로 나뉘어 예배를 보던 1970년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 후보가 다니던 플레인즈 침례교회에서 주일예배를 하려고 했는데, 그 자리에 글렌 킹이라는 흑인 목사가 참석하자 교회에서는 예배 자체를 중단해버렸다. 전국흑인공화당협의회 제임스 커밍즈 회장은 11월 1일 성명을 발표하고 "자기 발 밑의 인종차별도 해결하지 못했다"며 "대통령이 비민주주의적이고 철저한 인종차별을 표방하는 기관에 적을 두고 있어서야 어떻게 민주주의 미국을 대변할 수 있겠는가?"라고 카터를 비판했다. # 지금도 이런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2020년 영국에서는 남부 잉글랜드 지역의 어느 성공회 교회에서 "주민들이 모두 백인이라"는 이유를 들어 흑인 목사의 부임을 거절한 사건이 있어 성공회 교회가 직접 나서서 사과하기도 했다. #[3] 일본의 부라쿠민 단체였던 수평사를 설립한 사이코 만키치(西光万吉)도 수평사의 상징 깃발을 '고난'과 '해방'을 상징한다는 취지에서 예수의 가시 면류관을 도안으로 삼아 깃발을 만들었다. 사이코 만키치는 기독교 사회주의자였는데, 부라쿠민들은 일본 주류 종교(불교, 신토)로부터 외면받았기 때문에 대안종교로 기독교를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