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혁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오주혁은 1876년 10월 16일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조약 체결 반대 상소들을 반박하는 선언서를 낸 일진회를 향해 "개와 말만도 못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간사한 계교와 여우같은 아첨으로써 우리 선량한 백성을 몰아다가 남의 보호 지도, 감리하는 밑에 돌아가고자 하느뇨"라고 성토했다. 이후 1907년 12월 함경도 출신 인사들과 함께 서울에서 계몽운동단체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 특별총회에 참여해 이동휘 등과 함께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해외로 망명한 그는 1910년 블라디보토크에 설립된 성명회 회장을 맡았다. 1911년 8월 26일, 오주혁은 합병 무효를 천명하는 선언서를 여러 언어로 작성해 8,624명의 서명을 받아낸 후 미국과 프랑스 정부에 보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국내로 끌려가서 1년간 경기도 인천구 소무의도에서 거주제한 조치를 당했다.
이후 풀려난 그는 해외로 재차 망명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동휘와 함께 권업회를 재정비하고 교육부장을 맡았다. 또한 1919년 2월 25일 대한국민의회에 참석하여 군자금 모집 임무를 맡았으며, 1919년 3월 무렵부터 김립과 함께 중국 왕청현의 삼분구와 토문자의 중간 지역인 나자구라는 산골의 조선인 마을에 사관 학교를 설치하여 병력을 모집하고, 훈련시키는 활동을 벌였다. 특히 김립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스크우스리스크 일대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간도로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1920년에는 대한북로독군부 제1군사령부 참모로 활동했으며, 1922년에는 흑룡강성 오운현 배달둔에서 조직된 항일무장단체 혈성단(血誠團)의 일원으로 일제에 맞서 싸웠다. 이후 흑룡강성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다 1934년 9월 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오주혁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