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립(1880)
1. 개요
김립(金立, 1880년 ~ 1922년 2월 6일)은 한국의 공산주의자이며, 한국의 항일운동가이다. 본명은 김익용(金翼容)이다. 다른 이름은 김익용(金益庸), 가명은 양춘산(楊春山)이다. 호는 일세(一洗)이다.
2. 생애
2.1. 초년 시절
1880년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다. 한때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귀국하기도 했다.
2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였고, 이때쯤 신민회와 서북학회에서도 유력한 청년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10년 2월에 보전 법과를 졸업하였는데, 같은 고향 출신 후배인 긍인 허헌 등과 함께 일본과 영국의 입헌제도에 관심을 갖고 입헌군주국을 세우기로 결심하였으나 한일 강제 병합으로 무산되었다.
2.2. 북만주에서의 독립운동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망명, 1911년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新韓村)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勸業會)가 조직되자 동참하였다. 1912년 시베리아에서 이상설, 이동휘와 함께 한인 교포 자녀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광성학교(光成學校)를 설립하여 한인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또 이동휘와 함께 길성학교(吉成學校)를 설립한 뒤 만주로 건너갔다. 이때부터 이동휘의 최측근이 되었다.
1913년 만주 왕칭현(汪淸縣) 뤄쯔거우(羅子溝) 다뎬쯔(大甸子)에 있는 동림무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17년에는 독일 스파이라는 혐의로 러시아 임시정부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그 다음해 1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 부회장에 선임되어 기관지 《한인시보(韓人時報)》를 발행하였으며, 그해 2월에 열린 신민회(新民會) 망명간부회의에서 공산주의 수용을 주장하였다.
1918년 4월에는 이동휘, 한형권, 김알렉산드라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선전부장이 되었으며, 기관지《자유종》 주필이 되었다. 이어 9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었다가 1920년 사임하였다.
그리고 1921년에는 이동휘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고려공산당 상해파를 결성하여 비서부장에 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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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이동휘와 고려공산당의 주요 간부들의 단체 사진이다.
2.3.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코민테른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한민족을 도와주는 차원에서 한인 독립운동에 200만 루블을 원조하기로 결정했고, 1922년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김립은 활동 자금을 모스크바에서 치타로 운반한 한형권으로부터 자금을 인수해 상하이로 운반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 때 기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게 된다. 일명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다.
임시정부 측에 따르면, 김립은 이동휘, 한형권 등과 함께 60만 루블만 가지고 와서 사용하였으며 레닌이 지원한 자금을 내놓지 않고 한인사회당 등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에는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김구는 부하인 오면직과 노종균을 보내 1922년 2월 11일에 김립을 상하이 자베이(閘北) 거리에서 암살했다.
이 사건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백범일지는 이러한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표현했고 지금까지는 그것이 통설로 받아들여졌지만, 김립이 이 기금을 사적으로 횡령했는지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김립은 이 자금을 한인사회당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에 사용했다고 봐야 옳다.
무엇보다 한인사회당과 이를 모태로 만든 고려공산당은 임정 국무총리 이동휘가 이끌던 정당이었고, 엄밀히 말하자면 임시정부 산 정당이었다. 이러한 사적 횡령 설은 임정 내부의 공산주의 정당에 대해 적대적인 세력이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할 목적으로 유포한 소문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대부분 멸실되었기에 진위를 확인하기 어렵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의 동지들에게 3차례에 걸쳐 나눠서 전달된 200만 루블의 자금은 한인사회당과 고려공산당 등에 의해 어렵게 운반되었다. 그런데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주류를 이루는 지도자들의 손에 모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던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립과 이동휘는 오래전부터 투쟁방법론 문제로 임정 주류와 갈등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정 탈퇴까지 계획해두고 있었다는 주장도 학자들 사이에 제기되었다. 말하자면 이 때의 자금 사건으로 임정 내부의 노선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다.
무엇보다 김립이 암살되면서 나머지 140만 루블은 구경도 못하게 되었다. 물론 김립이 편을 갈라서, 한인사회당 등 자기 편 독립운동가들에게 이미 다 나눠줬을 가능성도 있다. 이 증발한 자금이 당시 동아일보 주필 장덕수를 통해 동아일보로 흘러들어갔다는 의혹도 존재한다.[1]
2.4. 김립 피살 사건의 진실
거기다 후일 공개된 소련의 옛 보고서엔 ''''상하이 공산당 횡령근거 없다''''라는 결론이 내려지고 있다. 구 소련붕괴 이후 구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문서보관소에서 국제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비서(Секретарь ИККИ) 오토 빌레 쿠시넨(Otto Wille Kuusinen, 1881년 10월 4일 ~ 1964년 5월 17일)이 1922년 5월 11일자로 작성한 훈령이 발견되었는데, 이 문서에는 문제의 40만 루블과 20만 루블이 모두 상하이파 공산당에 지급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자금의 결산 보고 의무도 상하이파 공산당에 부과되어 있다.
또 다른 기록이 있다. 국제공산당은 모스크바 자금의 정산 실무를 극동공화국 외무부장관(Министра Иностранных Дел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й Республики) 야코프 얀손(Яков Давидович Янсон, 1886년 5월 22일 ~ 1938년 9월 1일)에게 위임했는데, 그가 주도한 자금결산규명위원회가 결과 보고서를 제출한 시점은 1922년 8월 18일이었다. 이 보고서도 모스크바 자금의 수령자를 상하이파 공산당으로 지목했다.
보고서 결론에 따르면 상하이파 공산당의 자금이 사적으로 유용되었다는 여러 가지 악평은 소련 영토 내의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근거가 없다고 한다. 요컨대 코민테른 문서들은 어느 것이나 다 모스크바 자금의 처분권자가 한인사회당과 그 후계자인 상하이파 공산당이라는 점을 뚜렷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서대로라면 김구는 무고한 독립운동가를 살해한 셈이 된다.
현재까지도 건국훈장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김구의 오해로 인해 찍힌 횡령범이라는 낙인 때문에 한 독립운동가가 지금까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셈이다.[2]